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52
252
종장, 그리고 서장.
공기가 죄여 들었다. 검신은 우락부락하지도, 인상이 사납지도 않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평범한 청년이 명검도 아닌 허름한 검을 들고 있었다.
과학의 선공을 시작으로 멈췄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월자들은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검이 그리는 선은 여전히 그들의 몸을 지나고 있었다.
심검. 극도로 발달한 감각이 보여주는 살기의 궤적. 하나의 검로. 무엇이라 표현해도 좋았다. 뭐라고 표현하든, 이 일격은 그 이상을 보여줄 것이기에.
검을 늘어뜨린 검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세계에 한 가닥 검로와 그만이 남았다.
***
프라그하는 자신의 머리를 지나는 선에 묶여 움직이지 못했다. 형체가 없는 선은 그녀의 머리를 관통해 저 멀리 있는 백모왕에게로 이어져 있었다.
자연스레 알았다. 이건 하나의 검로, 검이 지나는 길이다. 검신의 검은 이 검로 안이라면 어디든지 나타나고 사라질 수 있다.
‘농담이 아니야.’
검신은 이 일격에 혼을 걸고 있다. 선을 통해 느껴지는 검신의 의지가 그러했다. 이 일검은, 정말로 열 명의 초월자를 구천으로 데려갈 수 있다.
그걸 알기에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검신은 검에 모든 걸 쏟고 있다. 그의 몸은 무방비하다고 봐도 좋다. 그러나 무방비한 몸을 노리는 것도 쉽지는 않아 보였다.
나타나고 한 번도 불을 뿜지 않는 달, 그리고 달의 표면에 달라붙어 있는 남자가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검신은 초월자들을 견제하고, 무방비한 검신을 달로 엄호한다. 달은 대 초월자용으로 개발된, 잃어버린 기술이 사용된 무기다. 일반 병사들이 달의 엄호를 뚫고 그 안에 있는 검신을 공격하는 건 힘들다.
설령 달의 화망을 뚫어도 달 표면에 있는 남자의 실력이 미지수였다. 검신을 지키는 마지막 방패로 선택된 만큼 가벼운 실력은 아닐 터. 검신을 공격해 검로를 지운다는 건 힘들어 보였다.
프라그하가 낙담한 그때, 제약 없이 걸어 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이게 윌리엄의 뜻이냐?”
현이었다. 현의 몸에는 선이 지나지 않고 있었다. 모두가 묶인 가운데 현만이 멀쩡했다.
“마왕은 용사와 일대일을 원한다.”
“여기서 내가 널 공격하면?”
검신은 이 일격에 목숨을 걸고 있다. 세계를 위한 희생, 외팔, 압도적인 전력 차이, 안색으로 봐선 내상도 입고 있는 걸로 보인다. 저 모든 요소가 검신에게 힘을 주고 있다.
“내 영혼을 걸고 장담하지. 다섯 이상.”
검신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말하고 있었다. 현이 검신을 공격하면, 그는 자신의 모든 걸 대가로 다섯 이상의 초월자를 길동무로 데려갈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멋에 죽고 멋에 사는 검신의 말이기에 개소리 취급할 수 없었다.
현은 망설였다.
검신을 죽이고, 달을 부수고, 샬롯과 이선, 윌리엄까지 죽여 혼란이 끝난다면 망설임 없이 검신을 공격했을 것이다. 희생을 감수했을 것이다. 뒤따라올 험담과 원한은 현에게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싸움이 끝난다고 세계 평화가 찾아오는 일은 없다. 떨어지는 운석, 잠시 움직임을 멈췄지만 건재한 지네, 세계 각지에서 터지기 시작한, 드래곤이 억누르고 있던 각종 문제. 이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손 하나가 아쉬웠다.
다수의 초월자를 한 사람에게 잃는 건 극심한 손해다.
현은 무방비한 검신을 지나쳤다. 자신의 개입 여부를 떠나 검신의 검이 움직이는 순간 다섯 명 이상이 죽는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검신을 보호하고 있는 달. 저 달은 윌리엄의 마스터키의 영향에 있다. 윌리엄을 죽이고 달을 탈취하면, 저 대치 구도에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달로 만들어낼 변수, 현은 그것에 걸어볼 생각이었다.
숨 막히는 대치를 이어가는 초월자들을 뒤로하고, 현은 윌리엄이 기다리는 위원회 본부에 발을 들였다.
위원회 본부는 썰렁했다. 그리고 그가 알던 모습과 상당히 변해 있었다. 건물의 반 이상이 과학을 위한 건물로 개조되어 있었다.
외견은 변했으나 길은 달라지지 않았다. 현은 윌리엄이 있을 장소로 곧장 나아갔다. 윌리엄의 집무실은 현의 기억 그대로였다. 미국 느낌이 물씬 나는 3층 저택에 발을 들인 현은 바로 윌리엄의 방을 찾아갔다.
방문을 열자 익숙한 풍경과 함께 익숙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야.”
턱을 괴고 앉은 윌리엄의 근처에는 다섯 개의 아티팩트가 마력의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현도 몸에 검은 강기를 감았다.
“그래, 오랜만이지. 이런 식의 재회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게. 리센과의 약속, 내 역할. 그것들을 충실히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어. 조금은 요령 부려도 좋았을 걸. 그래도 후회는 안 해. 옳다고 정한 길을 끝까지 걷기로 했거든.”
윌리엄의 말에 힘이 깃들었다. 의지로 이치를 바꾸는 힘이었다. 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했구나.”
“아니, 정해졌어. 네 말과 검신의 말이 이해가 되더라. 신념은 선택할 수 없다는 말.”
초월자의 벽을 넘기 위한 조건은 강한 정신력이 맞지만, 모든 초월자가 믿음으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다. 평생 동안 지켜야 할 신념이자 믿음을 가진 사람은 초월자 중에서도 소수다.
윌리엄은 신념 없이 정신력만으로 초월자가 된 경우였다.
그건 윌리엄이 자신과 세계에 들려주는 선언이었다.
“혈육보다 진한 피가 턱밑까지 차올라도, 후회도, 후퇴도 하지 않아.”
아티팩트에서 튀는 스파크가 강해졌다. 윌리엄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아래에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현의 몸을 감고 있던 강기가 투명해졌다.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현의 존재감도 함께 사라졌다.
천마신공 12성, 탈계. 정령신(精靈身).
“내 영혼의 반쪽을 찾아.”
가슴에서 나는 빛을 숨길 생각도 않는 윌리엄을 보며, 현도 전력을 개방했다.
고등학생 때 근원 세계에 소환됐고, 마법과 무공에 재능이 없다는 걸 안 이후부터 정령술과 마력에 모든 걸 투자했다. 근원 세계에서 살아온 시간이 20년이 넘는다. 현은 삶의 반 이상을 정령과 함께 했다.
그렇기에 가능한 일탈. 고금제일의 정령사, 정령을 빼면 정령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 이건 그 세월과 이해의 발현.
현의 몸이 점차 정령으로 변했다. 현은 하나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들어섰다. 친숙하지만 만질 수는 없던 그 세계를 이제는 만질 수 있게 되었다.
‘다를 건 없군.’
정령이 보는 세계도 사람이 보는 세계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정령으로서 현은 속성을 가지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그저 흔한 영(靈)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에게는 정령술이 있었다. 정령을 지배하고 규제하는 황제의 정령술이.
선공은 윌리엄이었다. 구슬 하나가 눈으로 잡기도 힘든 속도로 날아들었다. 마력을 압축한 아티팩트를 쏘아내 상대를 격살하는, 윌리엄이 애용하는 대인용 기술이었다. 아티팩트에 응축된 힘은 손실 없이 그 힘을 상대에게 전달한다.
대인용 마법 중에서도 위력은 최상위권에 있는 마법이다. 윌리엄은 진심으로 현을 죽일 생각이었다.
초고속으로 날아오는 구슬도 현에게는 그저 조금 빠른 정도에 불과했다.
‘불이라. 굳이 힘쓸 필요가 없지. 리아.’
‘이 날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주인님.’
물과 바람과 생명의 정령 리아가 현과 하나 되었다. 빙의에 비하면, 정령이 된 몸으로 정령인 리아를 받아들이는 건 간단했다.
현이 구슬을 낚아챘다. 구슬이 손에서 불꽃을 뿜어내며 회전했다. 그 불길이 화염의 폭풍이 되어 현을 휘감았지만, 물과 바람이 화염을 모두 흩어냈다.
‘노우라.’
‘다시 한번 주인과 같은 전장에 서고 싶다는 소원을 이런 식으로 이루는군.’
‘그래서, 싫어?’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좋다.’
현의 몸에 가득하던 생명력이 사라지고, 이번엔 안쪽에서부터 지옥의 업화가 타올랐다. 현은 손에 든 구슬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으로 삼키기에는 구슬의 크기가 너무 컸다. 현은 상상력을 발휘했다.
‘나는 정령이다. 정령에는 고정된 형태가 없다.’
현의 입이 귀밑까지 쭉 찢어졌고, 벌어진 입으로 구슬이 쏙 들어갔다. 충만한 마력에 배가 따뜻해졌다. 양질의 마력에 노우라도 만족한 눈치였다.
“천마신공을 익힌 거 아니었어?”
윌리엄이 황당함을 숨기지도 않고 드러냈다. 빙의와는 다르다. 무공의 종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현이 저런 기술을 쓰는 건 보지도 못했고, 보고 받지도 못했다.
“천마신공 12성.”
“천마와 같은 경지냐, 빌어먹을.”
윌리엄이 인공 태양의 출력을 올리며, 예비용 아티팩트를 꺼냈다. 원본보단 못하지만 원본과 비슷한 성능을 가진 아티팩트다.
‘상성이 나쁘다.’
현이 정령술을 사용한다면, 원소 마법사인 윌리엄은 현에게 상성에서 밀린다. 고금제일의 정령사 앞에선 어떤 원소 마법사도 바보나 다름없다.
하지만 여기는 근원 세계. 상성에서 밀린다고 이길 방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물은 불의 천적이지만, 초고열의 불은 물이 닿기도 전에 증발시켜 버린다.
화력, 화력만이 답이다. 가슴 어림이 뜨거웠다. 윌리엄은 넘치는 마력을 몸에 담았고, 그러고도 넘치는 마력을 아티팩트에 나눠 담았다.
파지직. 파지직. 그의 주위에 마력으로 된 스파크가 튀었다.
인공 태양을 이식한 무신은 무서웠다. 윌리엄은 무신 같은 신위를 발휘할 자신이 없다. 그러나 하나. 무신보다 이 마력을 더 잘 다룰 자신은 있다.
마력의 번개에 윌리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현은 아까부터 손에 모으고 있던 작은 불꽃을 앞으로 던졌다. 다섯 개의 구슬 중 두 개가 빛났다. 불과 물이 만나 구름이 되었고, 구름이 번개를 만들었다. 사방의 번개가 구름에 모여 구름이 푸르게 빛났다.
번개가 쏘아졌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번개는 물리력을 가지고 있었다.
화염과 번개가 충돌했다. 압축되고 압축된 두 마력이 폭발하며 위원회의 마법진과 주술, 전자기기들을 박살 냈다. 공중요새의 땅에 금이 갔다.
‘아스모스.’
‘간다냥!’
빛과 어둠이 엎치락뒤치락 꼬이며 드릴이 되었다. 윌리엄의 아티팩트가 자동 요격 태세로 현을 막아섰다. 삼각형의 방패가 윌리엄을 덮었다. 방패는 마력이 담긴 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은 방패를 때리는 대신 땅을 때렸다. 땅을 타고 들어간 마력이 휘어져 윌리엄을 노렸다. 공간이동으로 사라진 윌리엄이 현의 뒤에 나타나 손가락으로 현을 조준했다.
빵. 총을 쏘는 동작과 함께, 오색의 마력이 현에게 쏘아졌다.
다섯 속성이 전부가 아니다. 속성들이 합쳐지고 분리되며 다른 십여 개의 속성을 낳았다.
현은 아스모스를 정령계로 돌려보냈다.
일찍이 현은 인간이며 정령들의 황제였다. 하지만 황제일지라도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천마신공의 탈계는, 현에게 그 제한을 벗어던지게 해주었다.
“자, 오거라.”
현은 환계 안으로 니케아나식 정령술을 사용했다. 정령을 절대복종시키는 지배의 힘이 환계를 스쳤다.
꽃가루가 폭발했다. 그런 착각이 드는 빛이었다. 형형색색의 빛이 하늘로 비산했다. 현의 앞에 생겨난 빛이 윌리엄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정령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벽의 강도는 강하진 않았지만, 대신 부서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복원되었다.
흩어지는 빛이 무지개처럼 아름다웠다. 현의 양옆으로 길게 꽃길이 생겨났다.
목숨을 건 싸움이 맞나 의심하게 되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현이 황제를 지키려는 정령들에게 명령했다.
“반격.”
빛이 천지를 뒤덮었다.
마력으로 강화한 귀에 이명이 들렸다. 눈을 뜬 윌리엄은 넝마가 되어 추락하고 있는 위원회 본부를 보았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는 하늘을 가득 뒤덮은 정령의 군세를 거느린 현이 있었다.
무수한 정령을 거느린 저 남자를, 사람들은 한때 이렇게 불렀다.
“고금제일의 정령사…….”
현의 손가락이 윌리엄을 가리켰다. 빛의 파도가 윌리엄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