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178
1178화 전승은 이어나가야 한다
차분해진 진양이 입을 열었다.
“봉호도군이라면?”
“봉호도군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다. 다만 반드시 이쪽으로 정통한 자가 봉호를 받아야만 가능하다. 게다가 오직 이곳처럼 불안정한 세계에서만 가능하지. 대황 같은 대세계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냉정한 진양이 사자결을 발동했다.
그의 앞으로 수많은 허상이 스쳐 지나가며 많은 양의 정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잠시 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다. 도군의 경지로 도약을 할 때 아주 잠깐 세계의 근본과 닿는 순간이 있다. 바로 이 순간 기회를 포기하는 대신 그에 맞는 신통력을 손에 넣는 거지.
혈라마는 사방을 휩쓸고 다니며 사람들을 도화시키고 있다. 그러니 이미 수개월 전에 도군의 경지에 올랐을 거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서 가장 유력한 범인은 영제뿐이지. 오직 영제처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들어온 사람만이 이토록 많은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실력을 모두 회복하진 않았어도 도기는 어느 정도 회복했을 거다. 놈의 입장에선 추수가 시작된 거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 모든 외부인들이 자신과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없게 만든 거지.”
진양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졌다.
‘영제, 이 매정한 놈.’
영제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상당히 매정한 인간이었다.
그런 기회는 한 번 날리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기회를 포기하고 앞으로는 사용할 일조차 없는 신통력을 선택했다.
오직 단 한 번의 승리를 위해서 말이다.
이미 상황은 벌어졌다.
이 이상 떠들어봤자 별다른 의미는 없다.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 해야 이 난국을 헤쳐나갈지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실패했을 때를 대비하여 준비한 퇴로를 끊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원래의 계획에는 아무 지장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 계획만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퇴로는 충분히 있다.”
처음 계획은 영제가 허약한 상태일 때 그를 죽이는 것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지만 영제는 어딘가에 숨어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세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어서 두 번째 계획.
가장 밑바닥부터 권력을 빼앗고 신의 유산을 계승하여 일념의 바다를 파괴하는 동시에 일념의 바다 안에 있는 영제도 함께 소멸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진양의 문은 실패했을 때도 반드시 이용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네 계산에서 빠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마도 동쪽이겠지.
영제는 이미 회복을 마쳤어. 물론 전성기 시절만큼 회복하진 못했겠지만, 그래도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하진 못할 거야. 그럼 그냥 내버려 두자고. 혈라마와 서로 물고 뜯고 박 터지게 싸우도록 말이야.
우린 동쪽으로 간다.”
눈을 뜬 진양은 심호흡을 한 뒤 방향을 남동쪽으로 약간 틀었다.
혹여나 영제와 만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 *
몽의는 멀리 동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자신의 비밀을 엿보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비밀을 엿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담하게 시간의 강을 훔쳐봤던 건 다른 건 몰라도 이럴 때만큼은 상당한 장점이었다.
그의 눈 안쪽은 여전히 시간의 강과 연결이 되어있다.
때문에, 그 누구도 온전히 그를 엿볼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이미 자신의 묘비까지 세웠고 이름도 새겨두었다.
그는 여전히 살아있으나 이미 자신을 묻은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매장된 도문의 묘지기를 훔쳐볼 순 없었다.
몽의는 동쪽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건만…….”
곁에 있던 의사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몽 선생, 때가 되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별것 아닙니다. 제 말은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최후의 보루를 전부 현임 도문 전도인에게 전달해 주셨으니, 그가 끝까지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도록 지켜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냥 목숨만 내놓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죠.”
요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세 사람은 미끼가 되어 모든 시선을 끌 계획이었다.
이들은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다.
진양에게 자신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달라고 했던 건 정말로 이들을 데리고 나가달라는 뜻이 아니었다.
이들의 소식과 징표를 가지고 나가달라는 뜻이었다.
세 사람이 떠나고 난 뒤.
동쪽을 바라보던 몽의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 * *
괴산.
가희는 응백과 마주 앉아있었다.
가희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차를 우려 응백에게 먼저 한 잔 따라주었다.
“드세요.”
“걱정 안 되세요?”
응백은 지금 차를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제가 간다고 해도 도움은 안 될 겁니다.”
가희는 냉정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괴산 주봉(主峰)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발휘할 수 있는 힘도 크게 줄어들 거예요.
영제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면 진양에게도 어느 정도 승산은 있어요. 물론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해도 진양에겐 나름의 계획이 있을 거예요.
지금 제가 나선다고 해서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거예요. 오히려 일을 망쳐버릴 수도 있죠. 지금은 감정적으로 나설 때가 아니에요.”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가희의 손에 들려있던 옥잔이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순간 그녀의 기운도 흐트러졌다.
그녀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진양은 비록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절벽 끝까지 밀려난 게 아닌 이상 아무 확신도 없는 일을 벌일 사람은 아니에요. 진양이 성공한다면 다 함께 축하주를 들면 그만이죠.
만약 실패한다고 해도 그의 성격상 절대로 아무 확신 없이 이런 일을 벌였을 리는 없어요. 그러니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은 수련에 전념하여 하루빨리 봉호의 경지에 오르는 거예요. 그래야 영제가 밖으로 나온다고 해도 그와 맞붙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날 이후로 그 혼자서 준비를 하고 있던 게 아니에요. 저 역시도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경우가 찾아온다면 반드시 영제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할 겁니다.”
* * *
혈라마의 광기는 극에 달했다.
그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앞에 있는 것은 전부 밀어버렸다.
공법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도화시키고, 이렇게 도화시킨 사람들을 양분으로 삼아 스스로를 한 층 더 강화시켰다.
이 공법은 일념의 바다에선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공법이었다.
만약 밖에서 이런 공법을 사용했다면 만인의 적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삼신도군을 능가하는 공공의 적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삼신도군이 사용했던 방법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고 악랄했기 때문이다.
일념의 바닷속에 있는 생명체들은 이곳 안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생명체들이다.
하지만 진짜 생명체에 비해 영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들의 한계는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이들은 혈라마라는 무시무시한 존재 앞에 저항조차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육지는 혈라마에 의해 초토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족과 인간들이 희생되었고, 대량의 전승과 지식들이 소멸되었다.
한 종족이 전부 멸망하며 마지막으로 남은 전승과 전적들마저 모두 불타오를 때, 진양은 재빨리 이것을 발굴해냈다.
이로써 진양은 마지막으로 불씨를 이어나가는 자가 된 것이다.
진양은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권력이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점점 더 많은 지식을 손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충분한 지식이 있어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법.
진양이 긁어모으고 있는 대부분의 전적들은 사실상 전부 기본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들만 있으면 뼈대를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이룬 뼈대에 세밀하게 살을 채워나가면 비로소 권력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 권력을 이루는 핵심이다.
그리고 전기, 전설, 여행기 등의 기록은 생명체들이 존재했던 흔적이다.
이것을 하나로 합치면 곧 영제와 혈라마가 가려는 길과 같다.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 종착지는 하나인 것.
다만 이들은 강제적인 수단으로 권력을 손에 넣는 것일 뿐이다.
생명체를 죽이면 상대가 가진 모든 권한은 자연스럽게 주인을 잃는 법이니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영제가 인간의 모습을 한 허무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혈라마는 이미 동쪽 해안가에서 진을 펼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의사, 요사, 화사는 구름 위에 서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동해 남부에 꽤 오랫동안 모습을 감췄던 미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몸에서 빛이 번쩍일 때마다 수천 리를 뛰어넘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몸을 마음껏 불태우며 힘을 발산하는 듯했다.
다시, 한 번의 반짝임과 함께 그는 구름층에 도달했다.
그곳엔 흐르는 구름을 따라 여유롭게 극동 지역으로 향하는 진양이 있었다.
미음은 마대 하나를 진양의 앞에 내려놓았다.
“시간이 없어서 정리는 못 했으니 알아서 살펴보십시오. 그럼 전 이만 할 일이 더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잠깐만요!”
마대에서 쏟아져나오는 주머니 반지를 보며 진양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빛이 번쩍이며 미음이 허공에 나타났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진양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무슨 일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이것만은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승은 대대손손 쉬지 않고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미음은 웃으며 빛과 함께 멀어져갔다.
“제 이름은 미음이라고 합니다. 바깥에서는 저를 도문 백삼십 대 전도인이라고 부르더군요. 하하하! 그럼 또 만납시다.”
미음의 목소리는 점차 사라졌다.
진양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상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설령 그의 이름을 알았다고 해도 그가 도문의 선조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도문의 조상을 모신 사당에조차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나마 인상에 남아있는 건 바깥에서 고개를 내밀고도 살필 수 있는 묘지에 적혀있던 몇 사람이 전부였다.
어쨌든 미음과 만나고 나니 이전의 추측에 더욱더 확신이 들었다.
몽의가 일념의 바다 안으로 들어온 게 분명했다.
그리고 미음을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진양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게 분명했다.
마대 안에 있던 주머니 반지 하나를 꺼내 살펴보았다.
반지 안에는 대량의 전적이 들어있었다.
다른 반지도 마찬가지였다.
지식과 정보를 담은 서적, 죽간, 옥간, 벽화, 심지어 실체가 없는 광구도 있었는데 그곳에는 느낄 수만 있고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것들이 들어있었다.
전부 합하면 진양이 열심히 긁어모은 것과 맞먹을 수준의 양이었다.
진양은 곧바로 이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냉정한 진양에게 하나씩 살펴보며 빠르게 정리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