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177
1177화 문을 부수다
진양이 심해 세계로 들어가 보니 회색 폭설이 내리고 있는 세계 안 허공에 서적 모양의 광구들이 둥둥 떠 있었다.
냉정한 진양은 한참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왠지 모르게 일이 너무 술술 풀리는 것 같아. 가장 공략하기 어려울 것 같던 고수들도 오히려 쉽게 넘어왔잖아.
마치 누군가 뒤에서 상황을 조종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아니,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런 게 확실해. 상대는 분명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고.
하지만 상대의 이런 행동에 아무런 악의도 느껴지지 않아. 무엇보다 상대가 날 잘 알고 있는 걸로 봐선 이곳 세계의 사람은 아닌 게 확실해.
외부인 중에 형수님의 저지를 뿌리치고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텐데…….”
“이미 답은 찾은 것 같은데. 뭐하러 내게 와서 묻는 거냐? 시간 낭비가 따로 없군.”
냉정한 진양은 귀찮다는 듯 툭 대답을 내뱉었다.
그리곤 계속해서 바쁘게 처리하던 일에만 몰두했다.
진양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맞아.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고려해 보면 답은 오직 하나. 몽 사숙님뿐이지.
일단 얘기 좀 하자고. 방금 권력과 관련된 부분에서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거든. 상의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아.”
“일부 권력을 얻은 건 확실하게 느껴진다. 아마 어딘가 잘못되었을 리는 없다. 다만 예상했던 상황과 다소 차이가 있다는 건 우리가 최초에 입수했던 정보 중 일부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혹은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거지.
다만 어디가 부족한 건지, 어디가 잘못된 건지는 지금으로선 알 방법이 없다.”
계속해서 동쪽으로 가고 있던 건 일부 권력을 손에 넣은 걸 혈라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두 번째 인물이 권력을 손에 넣었다는 걸 눈치챈다면 진양의 위치까지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원래의 계획은 혈라마를 계속해서 동쪽으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혈라마는 영제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은 둘이 박 터지게 싸우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현재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수년 동안의 고생 끝에 결과를 손에 넣었지만 약간의 편차가 존재했던 것이었다.
그 바람에 원래의 계획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오직 최종적으로 신의 권력을 손에 넣은 자만이 해탈하여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
진양과 냉정한 진양은 한참의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결국은 원래의 계획대로 계속해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영제와 혈라마는 이미 이곳에서 한 번의 윤회를 겪으며 이곳 사람이 되었어. 그러니 권력을 손에 넣으려면 두 녀석이 손에 넣은 권력도 동시에 가져와야 하는 거지. 추측 결과는 어때?”
“별다른 문제는 없다. 이 부분이라면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손에 넣을 수 없다면 훔치는 수밖에 없지. 권력을 손에 넣은 걸 이토록 빠르게 느낄 수 있었던 건 이미 두 사람의 권력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진양은 놀랐다.
냉정한 진양이 이미 손에 넣었다니.
다소 의외였다.
“일전에 익혔던 영제의 일검 안에는 영제의 도(道)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필요한 건 권력이지, 모든 지식이 필요한 건 아니다. 기초적인 뼈대가 있어야 남은 부분을 채울 수 있는 법.
혈라마의 경우, 그가 아직 혈옥 상태일 때 이미 여러 번 써봤었던 것 기억나지? 무의식 중에 뼈대가 형성된 거다. 그러니 그저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되는 거지. 이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
진양은 놀란 눈으로 냉정한 진양을 바라보았다.
이쯤 되니 그가 몇 수 앞을 보며 계산을 한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공유된 기억 공간 속은 수많은 새로운 것들로 꽉 찼다.
이 정도면 원래의 진양이 수십 년 동안 밤잠도 줄이고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연구하고 생각해야만 나올 수 있는 양이었다.
냉정한 진양은 겨우 몇 년의 연구로 원래의 진양이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수백 년은 연구해야 할 양을 해낸 것이다.
때문에, 진양은 바깥의 일을 보고 남는 시간에 공유된 기억 공간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덧 냉정한 진양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기초적인 뼈대는 어느 정도 완성됐다. 하지만 새롭게 쥔 권력이 나타나고 나니 아주 중요한 일부 뼈대가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됐다. 육지에서 아무 소식이 없다는 건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마침 혈라마도 육지를 거의 다 점령한 듯하니, 너도 슬슬 바다로 나갈 때가 됐다. 영제는 동쪽에 있다. 그곳엔 분명 무언가 있을 거다. 그러니 그곳으로 가야 한다.
영제를 죽이려던 원래의 계획은 이제 폐기해도 될 듯하다. 지난 수년간의 시간 동안 영제는 우리가 죽일 수 없는 경지에 오르기에 충분했을 거다.
지금부터는 미리 비축해두었던 다른 계획으로 간다. 권력을 손에 넣고, 신의 유적을 빼앗고, 일념의 바다가 완전한 허무로 돌아가게 만든다.”
영제를 죽일 수 없다면 현재 영제의 기반이 되는 곳을 부수면 된다.
그렇다.
바로 일념의 바다를 완전히 박살 내버리는 것이다.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기초가 없으면 그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새로운 계획을 확인한 진양은 곧바로 심해를 빠져나왔다.
진양이 빠져나간 뒤.
냉정한 진양이 손을 뻗자 허공에 수많은 서적 광구들이 생겨났고, 광구에 띄워진 서적들은 동시에 펼쳐졌다.
이어서 생각하는 속도가 빨라지며 많은 정보들이 분류와 취합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높은 누각이 하나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정보들이 공유된 기억 공간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앞서 들어왔던 소식들은 층층이 뒤덮였다.
여기서 멈추거나, 혹은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는 이상 원래의 진양은 이 모든 정보를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 * *
극동 지역.
영제는 마치 새로운 허무의 땅과 동화된 듯했다.
이곳으로 몰려오는 모든 것들은 그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자원과 물질을 소모한 끝에 새로운 기반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신조에 매달릴 필요도 없고, 신조의 제약도 받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기반이었다.
비록 처음부터 다시 익히긴 했지만 이미 왔던 길을 다시 한번 걷는 것이라 상당히 수월했다.
게다가 기초도 있었으니 상처가 회복되는 것과 비슷했다.
영제가 두 눈을 뜨자 허공에 있던 원기가 순백의 꽃잎으로 변하여 흩날렸다.
천지지간에서 마치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오는 것과 같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직하면서도 예리한 기운이 패기 넘치는 기운이 되어 사방을 휩쓸었다.
현재 그는 허무의 땅 상공을 밟고 서 있었다.
하늘을 나는 새는커녕 운무조차 접근하지 못하는 곳.
그러나 영제는 이곳에 안정적으로 서 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마치 이 세계에는 오직 그 혼자만이 만물을 밟고 서 있는 듯했다.
이것은 영제가 도기를 다시 이루고 새롭게 도군의 길에 들어섰다는 증거.
이미 천지 그 자체에도 영향을 줄 수준에 올랐다는 뜻이다.
천지원기로 만들어진 꽃잎은 영제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며 전부 삼켜졌다.
모든 것이 회복되며 한층 더 강해질 수 있었지만 영제는 더 높은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허무 가운데 무언가를 취했다.
이것은 그가 잃어버린 것.
지난번 실패했던 이유였다.
그는 이것을 통해 하나의 신통력을 만들 생각이었다.
추상적인 형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종국에는 하나의 문의 형태를 이루었다.
이어서 그것은 끊임없이 수축하였고, ‘문(門)’이라는 글자가 되어 심전(心田)에 새겨졌다.
순간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그는 다시는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를 포기했다.
대신 앞으로는 전혀 쓸모없을지도 모르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꼭 필요한 신통력을 취했다.
영제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모든 것이 바로 이 문과 관련되어있다.
즉, 그의 문이 사라진 것이다.
그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문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은 그의 문이 아니다.
다만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었다.
현재의 국면에 있어도 문은 가장 핵심적인 단어다.
한참의 생각 뒤 영제는 한쪽 눈을 감고 한쪽 눈만 떴다.
그러자 심전에 새겨진 글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세계에서 색채가 사라지며 흑백의 세계가 펼쳐졌다.
이어서 세계는 수많은 부문으로 이루어진 선이 되었고, 그다음에는 작은 흑점이 되어 천천히 사라졌다.
모든 것은 마치 그림을 그리는 순서를 역으로 진행한 것 같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이 점차 사라지고 나니 어둠이 깔렸다.
죽음과도 같은 정적.
마침내 허무가 만들어졌다.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어둠 속 깊은 곳에서 두 개의 미약한 빛이 피어올랐다.
이 중 하나는 보일 듯 말 듯 상당히 미약한 빛이었는데, 그것을 잡으려는 순간 어두워지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머지 하나는 점점 더 밝은 빛을 뿜어내었고, 영제는 그것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점점 더 가까워졌고 종국에는 여덟 척 정도 되는 문의 형상을 이루었다.
문의 양쪽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곳은 가난한 집이니 도적질을 하러 온 것이라면 이만 물러가시오.’
이 외에 작은 글씨로 ‘집에 항상 사람이 있음’이라고도 적혀있었다.
영제는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했다.
누구의 문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가 소매를 휘두르자 강력한 힘이 기괴한 문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광-!
굉음과 함께 문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가 문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면 이제부터 외부인의 모든 문을 부숴버리면 그만이다.
즉, 외부인이 도망갈 퇴로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제와 반드시 싸워야 하는 수밖에 없다.
권력을 손에 쥐고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패자는 오직 죽음뿐.
영제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그러자 주변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허공을 밟으며 동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지나가는 곳에 있던 모든 것들이 전부 그에 의해 삼켜졌다.
* * *
“……젠장.”
진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진양은 곧장 심해 안으로 들어왔다.
심상치 않은 진양의 얼굴에 냉정한 진양은 한창 바쁘게 살펴보던 자료를 잠시 내려놓았다.
“문이 사라졌어. 좌표가 사라진 게 아니야. 누군가 문을 부순 게 분명해.”
냉정한 진양은 늘 그렇듯 차갑게 말했다.
“놀랄 것 없다. 지난번 영제가 문의 위치를 잊게 만들었던 것처럼 누군가 비슷한 방법으로 우리의 문을 파괴한 듯하군.
그 문은 실체가 없다. 그 장소도 큰 의미는 없다. 설령 누군가 그곳을 부순다고 해도 문은 여전히 남아있으니까. 그건 그저 우리가 이 세계에 남겨둔 하나의 표식에 불과하다.
이러한 일을 벌이려면 반드시 이 세계의 근본에 닿아야 한다. 하지만 도군 정도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지.”
냉정한 진양의 차분한 모습에 진양도 덩달아 차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