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182
1182화 뺨 후리고 싶은 충동
칼날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진양의 뒤에 있던 백옥 신문에서 은은한 빛무리가 피어오르며 진양을 감쌌다.
“지식은 곧 힘이다.”
진양의 나지막한 한마디와 함께 거대한 칼날은 빛무리에 닿기 무섭게 소멸되어버렸다.
영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양이 어떤 힘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양은 고개를 들어 영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영제에 대한 공포심이 이 순간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다.
백옥 신문이 허무의 땅을 집어삼키는 것을 막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런 결과가 나올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백옥 신문은 한층 더 높은 단계로 진화했다.
이제 더 이상 언제 백옥 신문을 열 수 있을지 얽매여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
한 세계의 정보의 기반을 모두 삼킨 백옥 신문은 아직 완전히 흩어지지 않은 일념의 바다에게 있어 진리의 문이나 마찬가지다.
영제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신의 권력과 그 권력에 함께 부여된 힘이 전부다.
그러나 진양은 권력과 백옥 신문 모두를 쥐고 있다.
즉, 이 세계의 진리를 쥐고 있는 것.
영제에겐 세계의 진리를 파괴할 만한 힘이 없다.
설령 그가 진양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의 진양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하다.
이는 곧 이 세상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진양은 자신이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걸 선호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제 보니 지금처럼 주먹 하나 움직이지 않고 벌이는 전투야말로 전자보다 훨씬 더 가슴이 뛰었던 것.
진양이 손을 뻗으니 하나의 그림이 나타났다.
그림에선 방금 전 영제가 일격을 날렸던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양은 지팡이를 붓 삼아 가볍게 그림을 건드렸다.
은은한 빛과 함께 그림 안에 녹아있던 진리가 수많은 부문이 되어 나타났고, 이내 소리 없이 소멸되었다.
그와 동시에 영제는 다시는 방금 전의 일격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펼칠 수 있는 것은 이 세계의 진리다.
그러나 현재 세계의 진리의 권력을 쥔 진양이 그것을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다.
이 세계에선 진양도 마찬가지로 영제가 사용했던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애초부터 그것은 진양의 힘이 아니었으니까.
잠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한참 진양을 응시하던 영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이미 신의 권력을 손에 넣었다. 네가 지금처럼 계속해서 날 붙잡고 있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내가 이곳을 떠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나의 수명은 네 수명을 월등히 뛰어넘는 수준에 올랐다. 너도 언젠간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 결국 난 이곳을 벗어나게 될 거다. 이렇게 막고 있어봤자 아무 의미 없다.”
“웃기고 있네. 천하의 영제도 수세에 몰리니까 혀가 길어지는군! 지난번에 내 검은 솥을 박살 냈을 때만 해도 기세등등하더니 말이야.”
진양은 차갑게 웃으며 말을 하긴 했으나, 검은 솥을 떠올리니 속이 쓰려 미칠 것 같았다.
그 누구보다 검은 솥에는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진양은 더 이상 영제를 상대할 생각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백옥 신문에 대해 살펴보기 시작했다.
현재 백옥 신문은 이곳 세계의 진리의 문이 되었다.
막강한 진리의 힘을 손에 쥘 수 있는 건 모두 이것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영제를 막아설 수 있는 것도 이것 덕분이다.
현재 영제는 속수무책이었다.
진양의 저지를 뚫고 나가는 것도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그를 죽이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마찬가지로 진양도 영제를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이대로 대치 상태를 유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영제는 홀로 일념의 바다에 만 년이라는 시간을 버틸 만큼 강한 인내심의 소유자다.
이 정도라면 진양이 수명을 다해 죽을 때까지도 대치하기엔 충분했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수련 경지를 올리는 건 쌀 없이 밥을 짓는 것보다도 어려웠다.
영제의 말이 맞다.
이대로 계속해서 버틴다면 결국 진양은 수명을 다해 죽게 될 거고, 결국 영제는 이곳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지금처럼 침묵의 소모전을 벌이는 건 일말의 의미조차 없다.
하지만 소모전을 벌이는 동안 다른 일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진양은 뒤로 돌아서서 두 손으로 백옥 신문을 가볍게 밀었다.
오랫동안 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백옥 신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쉽게 열려버렸다.
백옥 신문 안쪽으로 오색찬란한 만화경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진양은 이것을 백옥 신문이라고 생각하고 연 것이 아니다.
진리의 문으로 여기고 연 것이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지팡이가 영제와 관련된 부분으로 진양을 이끌었다.
진양은 금세 수많은 만화경을 뚫고 어느 한 세계에 도착했다.
만화경 속에선 지금까지 영제가 펼쳤던 모든 공법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화면에서는 영제가 허무의 땅 가장자리에 서서 새로운 허무의 땅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양은 지팡이를 들어 그 화면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이제 이곳에서 영제는 그 어떤 것도 삼킬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신통력은 진리의 문에 의해 부정당하며 ‘무(無)’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어서 진양은 또 다른 장면을 향해 지팡이를 뻗어 완전히 지워버렸다.
영제가 이곳에서 시전했던 모든 공법들이 부정되며 무가 되어버렸다.
진리의 문밖.
영제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진양이 무슨 일을 벌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손을 뻗어 공법을 시전하려고 했으나 하마터면 힘이 역류하며 주화입마에 빠질 뻔했다.
존재하지 않는 공법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영제는 진리의 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나 진리의 문에서 뿜어져 나온 빛무리가 그를 막아섰다.
단순히 힘으로 그를 막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진리였다.
아무리 수천 권의 책을 찢어버린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결코 고칠 수가 없다.
흑 아니면 백, 모 아니면 도.
이것이 바로 진리의 힘이었다.
영제는 자신이 이 세계에 남겨두었던 흔적들, 그리고 시전했던 모든 공법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멍하게 진리의 문을 쳐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일 촌 남짓한 땅 위에 서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일 촌 남짓한 이 땅, 이것은 이 세계와 영제의 마지막 연결고리였다.
마지막 남은 땅 조각을 삼키면 그는 해탈을 향한 마지막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그러나 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이 땅을 삼키고도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면 계속해서 허무 가운데 속해있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 그는 이 땅을 삼키는 방법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공법 자체가 뿌리까지 부정을 당한 탓이었다.
이대로 진양이 자리를 떠난다고 하더라도 그는 해탈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진양의 계획이었다.
영원히 마지막 남은 일 촌 남짓한 땅에 가둬버리며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수명이 다하는 날 그는 완전히 허무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때, 진리의 문이 열리며 진양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진양은 유감스럽다는 얼굴로 진리의 문에 손을 얹었다.
진리의 문과 권력 지팡이만 있으면 이곳 세계에 있는 모든 진리를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있다.
즉, 진양은 이곳에 존재했던 모든 이들을 합쳐놓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마음껏 이들이 사용했던 힘과 능력도 펼칠 수 있다.
심지어 진리의 문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깨닫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한 천마보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완전히 손에 넣지 못한 것이 나타난다면 진리의 문에는 약점이 생길 것이다.
이는 곧 영제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진양은 진리의 문에 손을 얹은 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무소불위의 권력을 느꼈고, 이내 단호하게 돌아섰다.
진양은 영제를 한 번 바라본 뒤 진리의 문을 다시 열었다.
이번에는 만화경 세계가 아닌 괴산의 모습이 나타났다.
진양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만약 영제만 없었다면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수확을 거두고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쉽긴 하지만 이 세계의 진리는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남겨 세계를 이루는 기본적인 뼈대를 이루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영제를 지금 상태로 유지시켜 주는 일종의 감옥과도 같다.
만약 진양이 이것을 챙겨간다면 영제는 전성기 상태로 진양과 함께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진양은 영제를 상대할 방법이 없다.
진양은 진리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진양은 괴산 주봉 꼭대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에 있던 진리의 문이 스스로 닫히며 백옥 신문이 되어 다시 진양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진양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힘껏 주봉 꼭대기에 꽂았다.
“신을 쓰러뜨렸던 분이시여, 이 순간 다시 권력을 당신에게 돌려드립니다. 계속해서 신의 힘을 막아주시옵소서!”
권력 지팡이는 마치 늪에 가라앉듯 천천히 빨려 들어갔고, 이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순간 진양은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중추를 본 기분이었다.
과거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시괴의 시해가 신을 죽이고자 했던 의지는 마치 괴산처럼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오늘날 괴산으로 다시 봉인을 한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다.
진양의 표정은 멍했다.
무소불위의 권력, 온 세상의 진리.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느껴본 것이 전부였지만 여운이 꽤 길게 남아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무것도 모르는 문맹이 되어버린 기분이랄까.
마음속에 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공허감이 느껴졌다.
그때, 멀리서 한 줄기의 빗이 날아왔다.
가희였다.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띤 채 눈빛을 반짝이며 진양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진양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기뻐하긴 이릅니다. 영제가 완전히 죽은 건 아니거든요. 계속해서 방비를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영제라면 분명 어떻게든 그곳을 빠져나올 테니까요.
잘 알고 있겠지만 영제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아요. 겨우 이 정도로 녀석을 완전히 제압했다고 보기엔 무립니다.
그건 그렇고……. 아까운 내 검은 솥, 내 진리의 문!”
가희는 순간 움찔하며 멈춰 섰다.
이어서 천천히 지면으로 내려왔다.
복잡했던 감정은 일순간 눈 녹듯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왠지 모르게 진양의 뺨을 후리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