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392
1392화 일단 못 본 척
장정의의 말을 듣고 나니 대략적으로 머릿속에 당시의 장면이 그려졌다.
진양은 고개를 들어 태호 호량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천궁 사람들이 우세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건 바로 상고 지부 사람들이 가장 믿고 있던 보루인 여자 수도사의 능력이 완전히 폐지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장정의가 이성을 잃고 동귀어진을 시전하는 바람에 여자 수도사의 능력이 완전히 폐지된 게 분명했다.
다만 장정의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여자 수도사는 상당히 소름 끼치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능력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조정하여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상대가 스스로 자결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장정의를 상대로 한다면 얘기가 매우 달라진다.
그 누구도 장정의를 완벽하게 죽이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현실로 인해 신통력 자체가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인지, 아니면 장정의가 그녀가 신통력을 사용하는 대가로 치러야 하는 희생을 촉발시킨 것인지.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당장 눈앞에 펼쳐진 상황만 본다면 후자의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남의 생각을 조종하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반격까지 가하는 신통력을 공짜로 마구 부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 말이다.
물론 여자 수도사가 어쩌다 신통력을 잃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다.
이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때다.
돌발 상황으로 인해 원래의 계획을 실행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 계기로 장정의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물론 운 좋게 뒷걸음질 치다가 개구리를 잡은 꼴이나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상고 지부의 사람들이 죽게 놔두거나 태호 세계에서 쫓겨나도록 해선 안 된다.
지금 상황에선 이들보다 훌륭한 화살받이는 없다.
만약 이들이 사라지게 된다면 천궁에선 주심 성관이나 성은 성관을 찾아내기 위해 조금씩 사방으로 손을 뻗치기 시작할 것이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상고 지부 사람들을 지켜내야 했다.
아직은 화살받이로 충분히 써먹을 수 있는 자들이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번에 이곳으로 넘어온 상고 지부의 사람들의 실력은 천궁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간신히 늑대를 쫓아내고 나서 그보다 훨씬 더 흉폭한 호랑이와 정면으로 맞서는 경우는 없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구체적인 건 일단 상황을 지켜보고 난 뒤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더 확실하게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정의야, 근데 왜 그 여자 수도사가 다른 대신관은 전부 제쳐두고 너 같은 잔챙이를 노린 거냐?”
순간 장정의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뭔가 있군.’
진양은 장정의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앞으로는 상황을 설명할 때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하렴. 그러다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움직였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고 있지?”
“크, 크흠! 사형,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전 그냥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말씀드리지 않은 것뿐입니다. 사실 그 여자가 왜 저만 노린 건지는 저도 아직 잘 모릅니다만…….”
“왜 널 노렸겠니? 당연히 내 신분으로 그 여자 수도사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겠지.”
진양은 한층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장정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진양은 이 일로 자신에게 화풀이를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태호 세계에 들어왔을 때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얘기해 주었다.
진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정의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의야, 내가 물불 가리지 않고 일단 네게 화풀이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그런 일이 있었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생각해 보렴. 내가 널 죽일 생각이었다면 명황의 지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도와줬을 리도 없지 않겠니? 그럼 오히려 네 녀석이 더욱 마음 놓고 죽게 될 수 있는데 말이야.
방금 다짜고짜 널 죽인 건 단순히 네가 맞는지 확인해 보려고 한 것뿐이란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신들은 온갖 기괴한 권력들을 가지고 있잖니. 그러니 철저한 확인은 반드시 필요한 법이지.
생각해 보렴. 너만 완벽한 위장으로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반대로 다른 사람도 완벽한 위장으로 나나 나를 속일 수도 있는 법이지. 그렇다면 방금 했던 것처럼 네 목을 비틀어 확인하는 것 외에 또 무슨 방법이 있겠니?”
진심이 담긴 말에 장정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충분히 수긍이 가는 말들이었다.
장정의는 스스로 위장 능력이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을 매우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절대로 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장정의를 구분해낼 방법은 불사신황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수밖에.
“아직도 날 감정적으로 화풀이나 하는 사람으로 보는 거냐? 그렇다면 큰 오해를 하고 있구나. 난 결코 감정에 좌우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니깐.”
장정의는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얘기는 이쯤 해두기로 하자. 난 이만 바빠서 먼저 가보도록 할게.
아, 혹시 아직 주변에 숨겨둔 대비책이 더 남아있니?”
“물론이죠.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내려놓고 나니 장정의는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네 녀석도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것 같아서 말이야.
조금 이따 내가 전장으로 달려들면 기회를 보고 있다가 상고 지부 쪽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강력한 한 방’을 가하도록 해.”
여기까지 말한 진양은 잠시 멈칫하며 물었다.
“설마 상고 지부 사람들의 신분으로 위장해본 적이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닙니다만…….”
“됐어. 그럼 먼저 간다.”
장정의는 떠나는 진양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사형은 전부 다 알고 있었구나.’
그러나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미간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진양은 또다시 그를 한 번 죽게 만들려는 게 분명했다.
매번 죽고 난 뒤 몸이 다시 자라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이미 그에겐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어버렸다.
* * *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이 가득했다.
그러나 어둠 가운데 거대한 태양이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강렬한 빛이 비쳤다.
강렬한 빛은 어떻게든 어둠을 물리치려고 애를 쓰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태호 호량 안으로 셀 수 없이 많은 귀신들이 홍수처럼 마구 쏟아져 들었다.
귀번을 중심으로 모든 사악한 기운들이 강제로 하나로 뭉쳐졌다.
이렇게 모여든 기운은 날씨에 큰 변화를 일으키며 이곳을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곳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무래도 대신관들은 강렬한 태양의 힘을 빌리는 건 포기해야 할 듯했다.
양쪽 모두 혼란이 극에 달한 상황이라 진양은 감히 동술을 사용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상황은 전황을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복잡해졌다.
신의 기운은 사방으로 뻗어 나오며 주위를 한층 더 혼란하게 만들었다.
진양은 사자결 두 번째 단계를 발동하며 이곳의 상황을 살폈다.
사자결이 발동되는 순간 모든 것들이 정지 화면이 되며 진양의 머릿속에 나타났다.
태호 호량으로 쏟아지고 있는 귀신들은 아마도 상고 지부 쪽에서 힘을 쏟아붓고 있는 것인 듯했다.
건장한 남자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그의 귀번은 단독으로 싸움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하나의 독립된 강자로 봐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건장한 남자 역시 육신으로 대신관의 권력과 위세에 맞서 싸우면서도 조금도 밀려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때, 한 대신관의 몸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빛의 정체는 연체 수도사에겐 상당히 치명적인 대일신광이다.
대일신광 공법은 바로 대일 대신관의 권력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한편,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천지지간으로 녹아든 눈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환영을 만들어내 두 명의 대신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기분 나쁜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던 여자 수도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음장 같은 차가운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강력한 한기가 뒤섞인 살기를 내뿜으며 사성 대신관과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이 전투 중인 전장에는 강한 한기와 살기가 가득했다.
두 사람 모두 기세로는 서로에게 밀리지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겉보기에는 어느 정도 반격의 여지가 있어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자 수도사의 신통력이 폐지되는 바람에 겨우 네 명의 대신관을 상대로도 고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패배는 시간 문제나 다름없었다.
붕대를 감은 남자의 눈은 짧은 시간 동안 두 명의 대신관의 발목을 붙잡는 것까지는 가능하다.
하지만 건장한 남자와 여자 수도사가 각각 상대하고 있는 대신관을 꺾을 수 있는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일원 신과 서사 신은 말 그대로 ‘대충’ 싸우는 중이었다.
기껏해야 자신을 보호하는 정도로만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면에 영향을 주는 건 불가능했다.
진양은 천천히 먹구름 위로 향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구름을 갈라 틈을 벌렸다.
마치 수천 리에 달하는 거대한 눈이 뜨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눈알 속에는 두 명의 대신관의 모습이 보였다.
진양은 몸을 숨긴 채 붕대를 감은 남자의 눈알이 만들어낸 환영 속으로 들어갔다.
* * *
붕대를 감은 남자는 한참 두 명이 대신관을 제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 그의 입에서 눈이 하나 뜨였다.
눈에선 희미한 물결이 일어나고 있었다.
누군가 환영 안으로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누가 안으로 들어온 지는 뚜렷하게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상대가 지나간 흔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성은 성관이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환영 안으로 들어오면 그가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성은 성관도 이 사실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으로 들어왔다.
도대체 왜?
일단 천궁의 두 대신관을 구하러 들어온 건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이유는 단 하나!
일단 상고 지부와 태미 사이의 은원보다는 태미와 태호의 은원이 훨씬 더 크다.
그러므로 붕대를 감은 남자는 일단 못 본 척하고 아무 반응도 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