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398
1398화 기회가 알아서 굴러드는군
진양은 수도사를 대표하는 네 개의 기예 안에 드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인형사와 같이 다소 낮은 지위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수습하지 않는 시신을 대신 수습해 주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어차피 당장은 딱히 할 일도 없다.
당장 기회를 노려볼 수 없다면 일단은 할 일을 찾아 돌아다니면 된다.
하는 김에 양지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신분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이 모든 건 진양의 원래 신분을 파괴해버린 장정의 때문이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대놓고 천궁을 누비고 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천궁에선 벌써 넷이나 되는 대신관을 잃었다.
이들은 소행을 벌인 이들이 상고 지부의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풍도대제 세력 아니면 부군 세력이 벌인 것이라고 말이다.
상고 지부 사람들은 별다른 해명을 하진 않았다.
애초부터 그들과는 대립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불가계 내에는 크고 작은 세력들까지 날뛰며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이런 상황에서 돌연 시신을 수습하고 다니는 괴인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어쨌든 확실한 꼬리표를 가진 인물이야말로 양지에 돌아다니기에 훨씬 더 안전하고 적합하다.
적어도 진양의 입장에선 그렇다.
양쪽에서 아무리 박이 터지게 싸움이 벌어져도 제대로 된 신분만 걸치고 있으면 그 누구도 웬만해선 진양을 건드리진 않을 것이다.
웬만해서라고 한 이유는 진양이 적에게 관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진양을 두고 시신을 파먹는 독수리라고 하고, 누군가는 사도로 여긴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시신을 수습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신을 수습하는 건 사술을 익히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하지만 한층 더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은 대략적으로 눈치를 챘을 것이다.
진양이 단순히 호의를 베풀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기예를 연마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천궁 쪽에서는 진양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상고 지부의 강자들도 진양에겐 크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무덤을 파헤친 건장한 남자는 진양에게 욕을 먹었지만, 결국엔 개의치 않다는 듯 웃기만 했을 뿐이다.
또다시 혼란스러운 전투가 벌어졌다.
진양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살피며 언제든 방치된 시신을 수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천궁의 사람들도 전투에 가세했다.
그중에는 별별자도 있었다.
그는 못 보던 사이에 기운이 한층 더 강해진 모습이었다.
일원중수에 대한 지배력도 한층 더 강해진 듯했다.
덕분에 바다에서 전투를 벌일 때 그의 힘과 권력을 한층 더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 흘러나오는 기운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천천히 살펴보던 진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만났던 별별자는 축 늘어진 채 죽음을 기다리는 이족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별별자는 마치 용감한 맹수의 모습이었다.
눈빛에서 힘이 느껴졌다.
확고한 의지와 굳은 심지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하마터면 별별자가 고급 첩자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 * *
한창 상고 지부의 적들과 전투를 벌이는 별별자에게선 조금도 대충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장은 더욱 혼란스러워져 가고 있었고, 그런 와중에도 멀리서부터 검은 힘에 의해 불가계가 삼켜지는 모습이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별별자의 의지는 한층 더 단단하게 굳어졌다.
장정의의 희생은 그의 마음속에 아직도 깊게 남아있었다.
그는 별별자가 권력을 빼앗고 그것을 계승할 수 있도록 도왔을 뿐만 아니라 천궁의 의심을 피할 수 있도록 흔쾌히 그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별별자의 어깨는 한층 더 무거울 수밖에 없다.
단순히 자신의 꿈만 아니라 장렬히 희생한 장정의의 기대와 소망까지도 함께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명이나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최후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견뎌낼 수 있다.
의지는 한층 더 굳어지며 별별자의 마음속에서 빛났다.
그것은 권력조차도 흔들 수 없는 태산 같은 의지였다.
한편, 먼 곳에서 있는 거대한 눈알에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기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단단한 의지로 굳어진 별별자의 마음을 흔들기엔 역부족이었다.
거대한 일원중수의 파도가 일어났다.
별별자는 파도의 꼭대기에 서 있었다.
그의 눈에선 무시무시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파도가 거대한 눈알을 향해 돌진했다.
주위에서 수많은 강자들이 이를 막아서기 위해 몰려들었다.
별별자의 입에서 모여든 여섯 겹의 일원중수가 붉게 물들며 검붉은 화살이 만들어졌다.
화살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을 가르며 눈알을 관통해버렸다.
별별자는 등에 짊어지고 있는 등껍질로 모든 공격을 막아내며 바닷속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하늘 높은 곳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진양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겨우 얼마나 지났다고 별별자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진양은 제자리에 분신을 남긴 뒤 빠르게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닷속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일원중수의 강한 압력이 느껴졌다.
해저로 향할수록 압력은 강해졌지만 진양은 육신으로 버텨내며 별별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별별자의 미간이 다소 찌푸려졌다.
그가 누군지는 알고 있다.
전장을 누비며 시신을 수습하고 다니는 그의 소문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는 직접적으로 전투에 관여하진 않았기 때문에 천궁에서도 일부러 그를 먼저 자극하진 않았다.
진양은 일곱 겹의 일원중수를 별별자의 앞에 펼쳐 보였다.
“어르신!”
눈앞에 펼쳐진 일곱 겹의 일원중수, 그리고 ‘어르신’이라는 미묘한 호칭.
별별자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별별자는 일원중수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신이다.
때문에 진양이 펼친 일곱 겹의 일원중수의 근원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전임 일원 신이 만들어낸 가장 핵심이 되는 일원중수였다.
이것을 손에 넣으려면 전임 일원 신이 죽어야만 한다.
“당신은…….”
별별자가 놀란 얼굴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저는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입니다. 저희는 권력이 아닌 신에 중점을 두고 움직이고 있죠.”
그 말에 별별자는 곧장 눈치를 챘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소.”
“아닙니다. 예를 거두시지요.”
“아무 이유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진 않았을 터. 내게 원하는 것이라도 있소?”
“그런 건 없습니다. 다만 어르신께 천궁에 대한 정보를 조금 듣고 싶습니다. 특히 석양 대신관과 지곡 대신관에 대한 정보가 알고 싶습니다.”
진양이 특별히 그에게 원하는 것은 없다.
별별자야말로 순수한 이상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다.
진양은 숭고한 이상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서로의 목적이 같기 때문에 ‘어르신’라고 칭한 것이다.
신분을 확인하고 난 별별자도 더 이상은 숨길 필요가 없었다.
이제 와서 천궁에서 그에게 수작을 부려 첩자를 심거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별별자는 그동안 천궁에서 수많은 하급 신들을 보아왔다.
때문에 오늘날 하급 신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급 신은 그저 권력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하다.
자아조차 빼앗긴 채 살아가는 그들은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별별자는 최근의 천궁의 상황부터 지금까지 보아온 것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얘기해 주었다.
이 외에 잘 모르는 것들은 돌아가서 확실하게 알아보고 다음에 만나면 다시 전해주겠다는 말을 남겼다.
짧은 만남이 끝나자 진양은 일원중수 밖으로 모습을 감췄다.
별별자도 일원중수를 다시 거둬들이며 바다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천궁으로 향했다.
이번 전투에서 그가 할 일은 상고 지부의 눈알을 파괴하는 것이다.
임무는 이미 완료했으므로 자리를 이탈해도 무방하다.
별별자는 자아를 가지고 있는 하급 신이다.
때문에 일반적인 하급 신보다 훨씬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천궁에서는 이런 그를 적극적으로 쓸 수밖에 없다.
천궁에선 결코 그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사람과 갈라서도록 만들려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천궁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를 보낸 건 단순히 다른 하급 신보다 쓸모 있었기 때문이다.
천궁으로 돌아온 별별자는 하급 신을 찾아가 상처를 치료한 뒤 대신관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시신 수습인에게 부탁받은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영감이 사라졌기 때문에 정보를 모으는 일은 매우 수월했다.
보안과 관련된 모든 업무가 영감에게만 치중되어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보안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며 일어난 하나의 폐단이었다.
정보 수집을 마친 별별자는 다시 일원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파견을 나갈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한 달 뒤.
별별자는 또다시 명을 받고 전장으로 나섰다.
한편 진양은 대놓고 전장 이곳저곳을 활보하며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그는 적당히 기회가 생겼을 때를 노려 별별자와 대화를 나눴다.
이번에는 꽤 중요한 정보를 손에 넣게 되었다.
바로 석양 대신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정보였다.
신에게 수명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다른 사람의 수명을 거둬들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석양 대신관이지만 그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족쇄는 수명이었다.
그는 아마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모든 방법은 이미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현임 석양 대신관의 권력 지배력은 낮은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수명은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통해 곧 석양 대신관의 권력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석양 대신관을 끌어낼 절호의 기회였다.
시신 수습을 마친 진양은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그를 유인해낼지 고민에 빠졌다.
며칠 뒤.
한창 유인책을 고민하고 있던 진양은 한 강자의 시신을 종문에 돌려주러 갔다가 재미있는 소식을 하나 듣게 되었다.
최근에 사방을 돌아다니며 무덤이란 무덤은 전부 다 파헤치고 다니는 미치광이가 있다는 얘기였다.
심지어 수만 년 전에 멸문하며 사라졌던 문파의 조상 무덤조차도 전부 그에 의해 도굴당했다고 한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놈이 무덤 도굴을 마치고 나서 오히려 조상 무덤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는 사실이었다.
온갖 악랄한 진법이란 진법은 전부 다 걸어버린 것이다.
이 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진양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미치광이’의 정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남의 무덤을 함부로 도굴하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악랄한 공법까지 걸어버린다?
이건 누가 봐도 장정의의 짓이었다.
진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기회가 알아서 굴러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