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248
248화 함정에 빠지다
같은 시각.
해안가는 매우 평화로웠다.
세 해적선의 허상은 실체화된 빛이 되어 선체 내부를 비추고 있었고, 빛이 응집하며 수많은 부문과 도문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해적선의 방어력은 절세의 고수라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다.
실체화된 빛무리는 그 누구도 부술 수 없는 견고한 요새와도 같았다.
선장들이 마음 놓고 배를 떠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러한 단계에 이른 해적선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단단한 방어력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항상 망각하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요새도 내부에선 공략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유령호.
유령호 선장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그는 마침내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모습을 드러냈다.
다소 마른 얼굴 외에는 딱히 특징 없는 평범한 외모였다.
그러나 그의 목에는 괴상한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푸른 손이 그의 목을 옥죄이고 있는 듯한 모습이랄까.
선실을 나온 그는 무표정으로 이부와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발걸음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순식간에 제자리엔 남자의 허상만 남았다.
그렇게 그는 갑판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재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어서 그가 주먹을 꽉 쥐자 투명한 실이 그의 다섯 손가락 위로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갑판에 있던 모든 선원의 머리가 몸통과 분리되었다.
머리와 분리된 몸통에선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갑판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끈적한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다시 선실로 들어갔다.
그는 선실 가장 깊은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모든 이들은 뭐라고 반응할 틈도 없이 목이 잘려 나갔다.
그렇게 선실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다.
남자의 한쪽 손이 나무로 만든 문 위에 얹어졌다.
문 위로 은은한 빛이 피어오르며 복잡한 도문과 부문으로 이루어진 진법이 나타났다.
남자의 손바닥에서 쏘아진 진원은 곧바로 진법 안으로 흘러들었다.
바로 그 순간, 나무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와 남자를 강타했다.
퍽-!
빛이 번쩍이며 남자는 곧바로 뒤로 날아가 버렸다.
가슴 아래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버렸고, 얼굴 역시 절반 이상이 날아가 버렸다.
누가 봐도 단 한 방에 골로 가버린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때, 검은 기운이 그의 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혈의 힘이 피어오르며 반쯤 날아가 버린 남자의 얼굴은 다시 원래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고, 뭉개진 몸도 빠르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복구된 그의 얼굴엔 놀람과 분노가 뒤섞여있었다.
“망할 자식.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수를 써놓을 줄이야!”
남자는 차갑게 웃으며 다시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가락에서 검은 기운이 맴도는 듯하더니 문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문에 걸려있는 진법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은 검은 기운에 침식되며 점점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검은빛은 진법의 빛과 함께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검은빛이 뿜어져 나오며 마치 개미가 굴을 뚫는 것처럼 나무 문을 마구 갉아먹기 시작했다.
마침내 부문이 모든 빛을 잃고 사라지자 남자는 가볍게 문을 밀었다.
문은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열렸다.
문 너머의 공간은 바닥에 빼곡하게 깔려 있는 진법 외에는 텅 비어있었다.
중심부엔 백여 장 정도 되는 거대한 무언가 놓여있었다.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는 그것의 정체는 바로 이 배의 심장인 대일화로였다.
화로에서 샘솟는 힘에 남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온몸이 타버릴 것처럼 뜨거웠으나 남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침내 도달했군.”
남자는 화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기운이 손끝에서 쏘아져 대일화로의 하부로 스며 들어갔고, 모든 것을 침식해나가기 시작했다.
뜨겁게 타오르던 대일화로가 빠르게 냉각되기 시작했다.
영기가 끊어지자 사방으로 공급되던 힘도 점점 차단되기 시작했다.
대일화로는 연료를 잃은 화로처럼 점점 불꽃이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불꽃은 완전히 꺼져버리고 말았다.
대일화로의 불꽃이 사그라들며 유령호 위로 실체화된 빛무리가 펑- 하며 깨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섬 전체를 덮고 있던 빛의 쇠창살도 하나씩 사라져가기 시작했고, 세 개의 기둥 중 가장 굵직한 기둥도 점점 빛을 잃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많은 이들이 적지 않게 놀랐다.
부도마교의 장로는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광소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단 말이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하하하!”
한편 임풍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빛기둥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제어하고 있던 곳에 세워진 빛의 기둥도 점점 빛을 잃고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물을 끼얹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빛이 사라진 자리엔 평평한 검은 바위만이 남아있었다.
임풍 일행은 곧바로 해안가로 달려갔다.
이들이 해안가에 도착하기 무섭게 해응호 선장이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유령호 선장에게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콰광-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고, 두 사람은 곧바로 뒤로 물러서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해응호 선장의 얼굴은 새파랗다 못해 보라색으로 질려있었다.
“유령, 자네가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겐가!”
뒤늦게 다가온 임풍 역시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유령호의 선장 유령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유령,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놈을 풀어주고 나면 자네는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겐가?”
유령의 얼굴은 망토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이를 꽉 깨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이 일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그 사악한 놈을 풀어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내가 놈을 풀어줄 리는 없다.”
“자네, 설마 단천궁을 배에 남겨두고 온 겐가?”
무언가 문득 생각난 듯 임풍이 물었다.
“유령 해적단에 배신자는 절대 남겨둬선 안 된다고 했지 않았는가! 이미 한 번 풍림호를 배반하고 도망친 자를 다시 받아주다니. 스스로 병을 키운 꼴이 따로 없구만! 다 같이 죽게 생겼는데, 이제 어떻게 할 겐가!”
해응호 선장은 잔뜩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 녀석일 리는 없어!”
유령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유령 해적단에는 배신자를 남겨두지 않아.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고.”
“그럼 그 녀석 말고 누가 또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겠나? 이미 일은 벌어지고 말았어. 이대로 꺼져버린 유령호의 대일화로에 다시 불을 지피려면 최소 보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그 사이 치명적인 손상이라도 입게 된다면 그땐 보름이 아니라 수개월이 걸리게 될 걸세!”
유령을 다그치는 임풍의 얼굴은 한층 더 딱딱하게 굳었다.
임풍과 해응호 선장은 유령을 가운데 두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유령, 그 녀석이 아니라면 남은 건 자네뿐일세. 더 이상 자네를 믿을 수가 없구만.”
유령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그는 두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설령 모두가 죽을 위기에 놓였다 하더라도 그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유령 해적단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지만 나 역시 배신자를 살려두지 않아. 단천궁, 그 녀석은 이미 오래전에 나의 화신이 되었다. 그러니 절대 놈의 짓일 리 없어. 적어도 난 자네들을 배신할 이유가 없단 말일세.”
유령은 사실을 실토했다.
두 선장은 다소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단천궁을 화신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유령이 도대체 왜 배신자를 받아주었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어쨌든 단천궁은 죽었고, 유령의 화신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도대체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쩌적-
그때, 갑자기 청량한 소리가 하늘에 울려퍼졌다.
섬 전체를 뒤덮은 빛의 쇠창살 우리가 갑작스럽게 하늘 위로 나타난 것이다.
쇠창살 우리 겉면에 빼곡한 실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지난번 강화시켰던 봉인까지 깨져버리다니…….”
“해적선은 봉인을 강화시키는 법보이자 외층의 봉인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지. 아무래도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잊고 살았던 것 같군…….”
나지막하게 말하는 임풍의 얼굴은 더욱 새하얗게 질려갔다.
잠시 뒤, 또 하나의 빛으로 만들어진 쇠창살 우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나타나기 무섭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해적들은 더욱 큰소리로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건 훨씬 더 이전에 강화시켰던 봉인이잖아!”
“젠장! 외층의 봉인이 붕괴되기 시작했어!”
“이제 놈이 깨어나는 건 시간 문제로군……. 큰일이야.”
외층의 봉인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로, 단순히 한 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겹이 겹쳐진 형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정도는 강화하지 않고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큰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는 꽤 오래전부터 전해져온 사실이기 때문에 해적 단원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봉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멀쩡했던 봉인은 불안정하게 변해가기 시작했고, 반드시 매번 찾아와 강화해 주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현재, 겨우 한 번 강화에 실패했을 뿐인데 연쇄 반응이 일어나며 외층의 봉인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봉인 전체가 붕괴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세 선장 중 이렇게 된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봉인을 푸는 열쇠인 전함을 모두 가동시킨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봉인이 풀리는 건 말이 안 돼. 이렇게 되면 가능성은 오직 한 가지뿐.”
부서져 가는 봉인을 바라보는 임풍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우린 오래전부터 놈의 함정에 빠졌었던 것 같아. 전임 선장,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 함정에 빠졌을지도 모르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인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두 선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그럴 리 없어! 이게 놈의 함정이라고? 그렇다면 어째서…….”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강직한 모습만 보여주었던 해응호 선장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잔뜩 겁에 질린 메추리 새끼와 같은 모습이었다.
“일부러 그런 거겠지. 외층의 봉인이 겹겹이 쌓일수록 많은 힘이 모이게 되고,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 그 누구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되니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계속해서 봉인을 강화하도록 놔둔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