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305
305화 의심
방금까지만 해도 뒤에 우뚝 서 있던 언덕은 빛에 휩싸여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마치 거인이 한 입 덥썩 베어 물어버린 듯 말이다.
빛이 퍼지는 속도는 진양이 달리는 속도보다 압도적으로 빨랐다.
그렇게 빛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와 진양을 뒤덮으려는 순간.
등 뒤에 업힌 소녀는 그제야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볍게 손을 들어 휘젓자 빛은 엄청난 광풍과 함께 완전히 흩어져버렸다.
진양은 광풍에 휩쓸려 허공 위로 높이 떠 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상태로 아래를 보니, 단약이 떨어졌던 곳을 중심으로 사 리에서 오 리 정도 되는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져있었다.
주위에 있던 언덕은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어서 지면 위로 떨어지기 무섭게 주위가 왜곡되며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주위는 다시 처음 보았던 광장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여덟 개의 비석 중 무려 다섯 개가 박살이 나 있었고, 화로엔 누군가의 손바닥 자국이 남아있었다.
손자국은 무려 세 뼘이나 화로를 파고 들어가 있었다.
매끈한 광택을 뿜어내던 화로는 더 이상 빛을 내뿜지 못하고 있었다.
완전히 박살 난 듯했다.
진양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젠장, 중앙에 있던 단약 화로를 잊고 있었네.’
하마터면 방심하는 사이에 단약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다.
진양은 힘을 잃은 화로 쪽으로 다가갔다.
화로를 열자 십여 개의 단약이 들어있었다.
대부분 단운(丹暈, 단약에서 뿜어져 나오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운), 문드러진 상태였다.
멀쩡한 건 오직 세 개.
황금색을 띠고 단운을 뿜어내고 있는 단약이었다.
진양은 그것을 옥병에 담고 무려 세 겹이나 되는 봉인을 걸어두고 나서야 주머니에 넣었다.
‘위험한 물건이니 나중에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한바탕 소동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진양은 무사히 광장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진양은 자신의 등에 업힌 붉은 면사포 소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자신을 도운 건 아닌 듯했다.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겠지만, 아마도 스스로가 위협을 느꼈기에 본능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 분명했다.
물론 어찌 되었든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를 돕기 위해 이런 일을 한 것과 스스로 위협을 느껴서 한 건 전혀 달랐다.
‘젠장. 쓸데없는 기대를 했군.’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생각했던 그녀에 대한 모든 추측은 수포로 돌아가게 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녀가 진양을 돕지 않는다는 건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앞으로 소녀에게 위협이 될 만한 상황이 펼쳐지지 않는 이상, 설령 진양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소녀는 결코 진양을 돕지 않을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녀와 함께 다니는 장점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아니, 아직 한 가지는 남아있었다.
중요한 순간에 검둥이가 튀어나와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한쪽이 잠잠해지니 이번엔 다른 한쪽이 난리구나!’
이렇게 되면 차라리 그녀가 없는 게 훨씬 나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아직 한 가지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녀가 장해도군과 구면이라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호연이든, 악연이든 그녀는 무조건 반응하게 될 것이었다.
악연이라면 다짜고짜 달려들 수도 있고, 호연이라면 지금까지 업어준 진양의 목을 칠지도 몰랐다.
이렇게 되면 장해도군에게 습득 능력을 사용하려고 했던 진양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많은 생각과 고민이 꼬리를 물었으나, 그렇다고 발걸음을 멈출 순 없는 법.
진양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삼 일이 지나자 ‘단’과 관련된 건물이 몰려있는 곳의 중심에 도착했다.
이곳은 과거 자소도군을 통해 보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중심지는 건물 하나 없이 텅 빈 공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진양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꽤 많은 사람이 몰려있었다.
심각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서로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흉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마불에게선 이전과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목검을 든 단장공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요염하게 생긴 여인도 한 사람 있었다.
미간 사이에 가득한 악랄한 기운,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 같은 눈동자.
아마도 시해를 통해 육신을 탈출한 고혈도희일 것이었다.
벌써 새로운 육신으로 이사한 것으로 보아 미리 준비해 둔 육신인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운은 처음 봤을 때보다 확연하게 약해져 있었다.
다소 의외인 점도 있었다.
등종의 종주와 대장로가 같은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멀지 않는 곳에 누군가의 시신이 누워있었다.
등종 삼인방 중 한 사람인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의 목엔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있었고, 목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진양이 이곳에 나타나는 순간, 대치하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진양에게 몰렸다.
살기와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 진양에게 고정되었다.
“저기……. 전 그냥 지나가던 길인 것뿐인데…….”
진양은 덜컥 겁이 났다.
아직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와도 척진 일이 없는데, 왜 이런 식으로 쳐다본단 말인가?
“갑자기 일이 기묘하게 흘러가는 바람에 서로가 서로를 경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미안하지만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단장공이 굳은 표정으로 진양의 뒤를 가리켰다.
“오, 그 손짓은 설마 제게 또 선물을 주려는 건가요?”
“뭐라고요?”
단장공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난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당신을 만난 적이 없는데.”
“에이, 무슨 그런 농담도…….”
순간 진양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잠깐, 그럼 그때 봤던 게 단장공이 아니란 말이야?’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너, 등 뒤에 업혀있는 그 사람은 뭐지? 면사포 좀 벗겨 봐!”
고혈도희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얼굴엔 불안함이 가득했다.
“그건 안 됩니다. 그랬다간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르거든요.”
진양은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지? 소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오호라. 네 녀석이구나! 네가 바로 가짜구나!”
고혈도희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진양은 불쌍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와서 직접 해 보든지요. 대신 뒷일은 나도 책임 못 집니다.”
이대로라면 고혈도희를 죽게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진양은 굳이 고약한 성질의 그녀를 살려주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말릴 생각도 없었다.
고혈도희는 한걸음 가까이 다가오려다가 갑자기 다시 뒤로 돌아갔다.
그리곤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디서 새색시라도 얻어온 모양인데, 그렇다면 그 얼굴 없는 괴물은 아니겠군.”
그녀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고혈도희가 수그러들자 진양의 시선이 단장공에게 향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 좀 해 주실래요?”
“정체불명의 무면인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외모, 기운, 진원의 파동을 바꿀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대화를 나눠도 이상한 점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변장술을 쓰는 놈입니다.
각자 겪었던 일을 종합해 볼 때, 놈은 초면에 무조건 무언가를 선물인 척 상대에게 건네줍니다. 하지만 그걸 손에 쥐는 순간, 정체불명의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기운에 체내로 급속히 파고들게 되죠. 아마 당신이 이전에 마주했던 나도 내가 아니라 바로 그 무면인일 겁니다.”
“우리 모두 간신히 놈의 손에서 도망칠 수 있었지. 그런데, 약해 빠진 넌 도대체 어떻게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던 거지?”
고혈도희가 차가운 눈빛으로 진양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한 마디에 모두들 그제야 어딘가 이상한 걸 느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소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득이하게 입마 상태가 되어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만.”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던 소마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모두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진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서 간신히 무면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진양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모습이었던 것이었다.
때문에 순간 모두들 진양을 무면인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난 가지고 있던 고혈도병 중 가장 강력한 녀석으로 일곱 명을 희생시켰고, 그마저도 부족해 시해 공법을 사용해서 간신히 도망쳐 나올 수 있었지.”
고혈도희도 한마디 했다.
이쯤 되자 모두들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전 과거 한 여족의 목숨을 구해주며 받은 체신신상(替身神像)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단장공이 말했다.
“난 수명 삼백 년을 태워 혼등인로(魂燈引路)를 사용했다.”
등종 대장로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혼등인로는 등종에서만 사용하는 특별한 공법으로, 자신의 수명을 태워 건널 수 없는 장애물을 건널 때 사용하는 공법이었다.
일종의 허공을 횡단하는 공법으로, 다른 여러 강력한 공법과도 견줄 만한 수준의 공법이었다.
단지, 이를 사용하기 위해선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전 혈제(血祭)를 통해 강제로 신통력을 시전했습니다.”
등종 종주는 조용히 자신의 상의를 열어 보였다.
그의 왼쪽 가슴은 호심경으로 덮여있었다.
그러나 호심경을 치우자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혈육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있었고, 공간 너머로 갈비뼈와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의 모습이 보였다.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악화될 기미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이를 본 모든 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혈제란, 자신의 혈육을 제물로 바쳐 사용할 수 없는 신통력을 강제로 시전하는 방법이었다.
혈제로 인해 사라진 혈육은 평범한 단약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하며, 영약 중에서도 최상급 영약으로만 회복 가능했다.
보통 어느 부위의 혈육을 바치느냐에 따라 그 위력이 달라지게 되는데, 그는 혈육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위력을 낼 수 있는 심장 주위의 혈육을 제물로 바쳤다.
그만큼 탈출에 엄청난 힘이 필요했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여기 모여있는 모든 이들은 적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시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진양을 향했다.
“전 고혈도병에 쫓기고 있는 단장공과 만났었습니다. 놈이 저를 속이려고 하기에 오히려 역으로 그걸 이용했죠. 이러면 믿으시겠습니까?”
진양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단 한 사람도 진양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허! 황당하군. 왜 이렇게들 날 못 믿어주는 거지?”
누군가를 작정하고 속일 때도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다.
큰마음 먹고 솔직하게 사실을 얘기했는데도 이런 반응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