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498
498화 꽉 막힌 녀석
복도에 정천사 병사 두 사람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마다 한 바퀴씩 복도를 돌아보는 것이 전부일 뿐 그 외에 별다른 건 없었다.
어차피 한안명이 갑판 밖을 직접 지키고 있었으므로 설령 탈옥한다고 하더라도 멀리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유성우에 맞으며 잠시 소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그저 형식적으로 한 바퀴를 둘러보는 게 전부였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이들은 각자의 자리로 다시 돌아와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그때였다.
인마가 나타나 이들을 제압했다.
상대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곧장 마음속을 파고들어 깊은 공포감으로 무력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인마는 희색 기운으로 변해 한 곳도 빼놓지 않고 모든 감방을 한 번씩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러다 경비병들을 만날 때마다 먼저 달려들어 그들을 제압해버렸다.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이미 잔뜩 방심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잠시 뒤.
인마는 다시 입구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회색 기운으로 변하여 입구 쪽에 서 있는 병사에게 빙의했다.
* * *
같은 시각.
갑판 위에서 벌어진 술판도 어느덧 금방 정리가 될 분위기였다.
“한 대인, 걱정하지 마시지요. 전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요. 이제 내일부턴 서로 각자의 은원은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다음에 또 뵙게 된다면 더 좋은 술을 대접하도록 하지요!”
“마음만이라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은 처리해야 할 공무가 남아있어서 말입니다. 이 이상은…….”
“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한 대인께서 바쁘시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마침 일어나려던 참이었습니다.”
진양은 자리를 탁탁 털고 일어났다.
“한 대인, 그럼 하시는 일 모두 잘 되시길 바라며 전 이만 떠나보겠습니다.”
진양은 포권까지 취하고 나서야 비주 밖으로 사라졌다.
한안명은 멀어지는 진양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떡였다.
‘비록 신조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사람이로군. 뭐, 어찌 보면 저 사람도 이번 일의 피해자인 건 부정할 수 없으니…….’
비주는 계속해서 목적지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진양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선실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어느 한 병사가 뒤통수를 붙잡은 채 뛰쳐나왔다.
“대인! 크, 큰일 났습니다! 죄수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한안명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놀란 그는 황급히 선실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선실 안에서는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병사들이 감옥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문을 열고 있었다.
그러나 감방 안에 살아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혼란한 상황이 펼쳐진 사이.
회색 기운이 어느 한 병사의 몸에서 빠져나가며 곧장 선실 밖으로 흘러나갔다.
이어서 그는 재빨리 바람을 타고 비주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걸 본 한 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인, 쫓아갈까요?”
“쫓긴 뭘 쫓아!”
“인마 말입니다…….”
“뭐라고!?”
놀란 한안명이 황급히 선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인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굳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순간 술을 마시며 진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내일부턴 서로 각자의 은원은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왜 오늘부터가 아닌 내일부터라고 한 건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이래서 내일부터 은원을 털어버리자고 한 것이다.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누가 봐도 진양은 인마를 대신하여 시간을 벌고 시선을 끌어주기 위해서 일부러 술상을 꺼내 들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진양은 그저 이곳에 진법을 설치해둔 것밖에는 잘못한 게 없었다.
게다가 경고 팻말까지 큼직하게 세워두지 않았던가?
진법 안으로 잘못 발을 들인 건 이들의 잘못이었다.
게다가 진양은 은원을 풀자며 술을 한잔한 게 전부였다.
직접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고, 기껏 따져봐야 한안명의 시선을 잡아두고 인마가 일을 벌일 수 있도록 도운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 다시 진양을 불러다가 심문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랬다간 또 순천사들을 불러 정천사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생각할수록 분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다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에휴, 이젠 나도 모르겠다……. 죽으면 죽는 거지. 주목도 죽고, 군수도 죽고, 남은 녀석들도 그다지 중요한 녀석들도 아니고 말이야. 그냥 인과응보인 셈인 게지.”
* * *
한편, 진양은 멀리 떨어진 어느 산 정상에서 멀어져가는 비주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아저씨, 뭐 하는 거예요?”
“계획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순조롭게 풀렸어. 한안명의 부하들이 한안명의 실력을 너무 믿고 방심해준 덕분이지. 물론 그렇긴 해도 한안명에게 감사 인사 정돈해야지. 이쯤 되면 전부 눈치챘을 텐데도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그냥 떠나고 있잖아.”
“그러니까 왜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
여전히 모르겠다는 인마의 눈치에 진양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 게 있어. 애들은 모르는 어른들 사이의 예의라고나 할까.”
다시 계무도의 모습으로 돌아온 진양은 인마를 데리고 남쪽으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번 일만 끝내고 그를 황천마종이나 여족 마을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별로 안전한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완전하게 성장한 것도 아니고 집념도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몰린 곳에 풀어놓았다가 시비라도 붙게 된다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잘 참다가도 쌓이고 쌓이다 보면 폭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양은 인마를 데리고 흑림해로 향했다.
이곳은 태생적으로 인마의 생존에 유리한 환경이 펼쳐진 곳이었다.
특히 그가 성장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요소들이 가득한 장소이기도 했다.
대영 신조의 땅을 빠져나오기 전.
진양은 마지막으로 들린 수도사들의 집결지에서 비난령을 해안 안으로 숨겨보았다.
해안이 비난령의 힘을 완전히 가릴 수 있는지 실험을 해본 것이다.
잠시 뒤.
국경지대 너머 허공에서 한 줄기의 빛이 남쪽으로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신조 내에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반대로 신조를 벗어나면 어디서 사라졌는지 정도는 느낄 수 있는 듯했다.
지금은 절대로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어선 안 된다.
가희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진짜 모습은 되도록 보이지 않는 편이 좋을 듯했다.
진양은 남아있던 차를 모두 마신 뒤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진양이 신조를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쪽으로 가면 진양을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진양은 아직도 신조 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양은 인마와 함께 유유히 국경지대를 빠져나와 흑림해로 들어갔다.
그리고 음기가 강하면서도 각종 흉악한 귀신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 이곳에 인마를 풀어주었다.
“앞으로 여기서 조용히 수련하도록 해. 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집념도 꽤 많이 사라졌을 테니 한동안 수련하기엔 부족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뭐든 괜찮은데 웬만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거야. 물론 이런 곳에서 누군가를 만날 확률은 극히 희박하긴 하겠지만. 어쨌든 여기서 얌전히 지내고 있어. 몇 사람만 더 처리하고 다시 데리러 올 테니까.”
“알았어요.”
집념이 꽤 많이 사라진 그는 한층 더 착해진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이어서 진양이 곁에 있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녀석 좀 잘 돌봐 줘. 만약 돌아왔는데 머리 한 올이라도 상해있다면 그땐 네 녀석을 푹 삶아서 먹어버릴 테니까. 알겠냐?”
꽤 무시무시한 협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늑대는 뭐가 좋은지 연신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렇게 신신당부한 진양은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갔다.
딱히 걱정이 되진 않았다.
이 세상에 인마를 꺾어버릴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사람은 널리고 널렸지만, 흑림해에서 그런 존재는 손에 꼽는 것조차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그 정도 실력을 지닌 사람들이 흑림해에 나타날 이유는 없었다.
일단 다시 대영 신조로 돌아온 진양은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들을 우선적으로 정리했다.
그렇게 정리가 끝나고 난 뒤 동경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다시 서쪽에 있는 이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도, 정천사 본부.
한안명은 마침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는 어느 내실 안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의 앞에는 백발의 노인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서류를 살펴보며 한안명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스승님, 여기까지가 제가 알아낸 것들입니다. 다 제 불찰로 빚어진 일들입니다. 스승님 앞에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한안명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괜찮으니 고개를 들거라. 이미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노인은 그런 건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한안명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조용히 노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노인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보고 있던 서책을 탁- 하고 덮으며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한안명을 바라보았다.
“안명아, 사실 이번 일은 네가 아주 훌륭하게 잘 처리해 주었단다. 우리 정천사는 사건의 진상에 대해 밝히는 일을 하는 곳이지, 범인을 붙잡는 건 그다음의 일이란다. 그래도 이번 일로 우린 적지 않은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단다.
남은 죄인들은 죽이든 말든 더 이상 큰 의미는 없다. 설령 살아서 이곳까지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규칙에 따라 전부 교수형에 처했을 테니.”
“스승님, 그래도 잘못은 잘못 아닙니까? 벌을 내려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얘야, 넌 일 처리는 참 잘하는데 가끔 보면 답답할 정도로 꽉 막힌 것 같구나.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우선이지 규칙이 먼저겠느냐? 우린 그저 정천사에 속한 자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만 지켜내고, 폐하께 충성을 다하고, 조정의 정국에 함부로 관여하지만 않으면 된다. 어떻게 사람이 모든 규칙을 칼같이 지키며 살 수 있겠느냐?”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아니, 네 녀석은 여전히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하구나.”
노인이 한안명의 손을 잡아서 몸을 일으켜주었다.
“너는 네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네가 잘못을 저지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었던 게다.
인태주 주목이 죽기 전에 모든 사실을 불어버릴 줄은 헌국공 역시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게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려던 것으로 보아 폐하께 죄송한 마음은 있었던 것 같구나.”
하지만 한안명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손무는 그저 혼자 가는 것이 억울해 헌국공에게 물귀신 작전을 쓴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정천사의 사장이자 자신의 스승인 노인의 깊은 눈빛을 보고 있자니 문득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