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527
527화 ‘이모’가 아닌 ‘누나’
천천소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죽은 놈이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하지만 차마 더 이상 읽어내려갈 순 없었다.
그랬다간 진짜 치사한 인간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편지를 구덩이 안으로 던져넣은 뒤 가볍게 손으로 허공을 휩쓸었다.
그러자 옆에 쌓여있던 흙이 스스로 구덩이를 채웠다.
며칠 뒤, 무덤 내부.
심하게 부패된 시신에서 하얀 꽃이 한 송이 피어올랐다.
이어서 꽃은 검게 물들어가는 듯싶더니 이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처럼 깨져버리며 시신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더 많은 하얀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꽃은 점점 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시들고 피고를 여러 번 반복한 끝에 마침내 피어난 꽃은 더 이상 검게 물들지 않았다.
이어서 시신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의 색깔부터 몸매, 얼굴의 형상까지.
완전히 처음 보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두근-
오랜 시간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어서 깊은 곳에 묻혀있던 생기가 빠르게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그녀를 되살렸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관뚜껑을 연 뒤 흙더미를 해치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 위로 새하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그녀는 한참 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수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생전의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바스락-
발아래 한 장의 종이가 밟혔다.
그것을 주워 펼쳐 들자 무언가 적혀있었다.
‘부활 축하합니다. 이제 새로운 삶과 함께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니 과거의 원한은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세요.’
그녀는 바로 앞에 물이 고여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낯선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지 기억해내기 위해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계무도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었다.
심지어 그의 해맑던 웃음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오의 태양이 눈부시게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이름은……. 장하(長夏)라고 하자.’
따사로운 여름이 오랜 시간 지속되기를 바라며 지은 이름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반지가 하나 끼워져있었다.
주머니였다.
안에는 검은 긴 치마가 들어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곧장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곧바로 불이 붙으며 그것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이어서 푸른 빛이 감도는 새하얀 치마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마음에 들었는지 그것을 입었다.
옷을 입은 그녀는 조용히 자신이 기어 나온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파헤쳐진 곳을 흙으로 다시 메꿔놓았다.
무덤 옆에는 ‘여심’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낯선 이름이었다.
정리를 마친 그녀는 숲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멀리 한 채의 집이 나왔다.
똑똑-
다가가 문을 두드리는 순간, 누군가 갑자기 그녀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소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허, 그 말이 진짜일 줄이야.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게 사실…….”
“됐소. 당신이 누군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소. 난 그저 부탁받은 대로 당신을 이도 밖으로 보내주는 것까지만 할 게요. 그 이후로는 뭘 하든 마음대로 하시오.”
천천소는 그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성문을 향해 달렸다.
* * *
이도 성문.
천천소가 황급히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경비병들은 모른 척 가만히 놔두었다.
잠시 뒤.
성문에서 꽤 먼 곳까지 오고 나서야 천천소는 그녀의 손을 놔주었다.
그리고 다시 이도로 돌아가려는 듯 돌아섰다.
그러자 그녀가 그를 붙잡았다.
“혹시 계무도는…….”
“죽었소.”
매정하게 한 마디를 남긴 뒤 그는 미련 없이 다시 이도로 돌아가 버렸다.
장하는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 이도를 바라보았다.
* * *
흑림해.
진양은 모닥불 옆에 앉아 방금 막 잡은 늑대 괴수를 공들여가며 굽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늑대처럼 생긴 괴수가 엎드려 앉아 노릇노릇 익어가는 괴수 고기를 바라보며 ‘이걸 먹어도 되나?’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옆에는 인마가 힘을 질질 흘리며 눈빛을 반짝이며 고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 오늘은 완전히 집념에서 벗어나게 된 기념으로 특별히 만들어주는 거니까 마음껏 먹도록 해.”
진양은 기특하다는 듯 인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한안명의 일 처리는 확실했다.
헌국공이 죽자마자 인마에게 남아있던 가장 큰 집념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남아있던 작은 집념들도 한안명이 잔당을 소탕할 때마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마침내 인마의 발목을 족쇄처럼 붙잡고 있던 집념은 완전히 사라졌다.
“완전한 생명체가 되었으니 이젠 이름이 필요하겠지? 이렇게 하자. 널 위해 계무도가 죽었으니 너도 계씨를 이어받는 거야. 나름의 기념도 할 겸 말이야.”
“네? 하지만 아저씨는 멀쩡히 살아있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인마가 물었다.
“진유덕은 계무도지만 계무도는 진유덕이 아니야. 뭐, 일일이 설명하자면 복잡하니까 하나만 알고 있으면 돼. 계무도는 계무도고, 진유덕은 진유덕이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사람이다. 알겠지?”
“네, 알았어요.”
“그래. 누가 물어보면 항상 그렇게 대답해야 한다.”
진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어쨌든 이름을 지어보자면……. 행도(行道)는 어떨까? 아니면 천행(天行)? 넌 어떤 게 더 좋아?”
“아저씨가 정해주세요.”
“뭐, 그럼 그냥 천행이라고 하자. 하늘의 뜻을 집행하는 아이라는 뜻에서 말이야.”
이름이 정해지자 진양은 잘 구워진 괴수의 뒷다리를 뜯어 계천행에게 건네주었다.
“먹어.”
이어서 남은 뒷다리도 뜯어 늑대 요괴에게 건네주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너도 마음껏 먹으렴.”
늑대 요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무리 불로 바싹 구웠다곤 하지만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어쩌면 동족이라고 할 수 있는 녀석을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냄새가 너무 향기로웠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의 눈에 맛있게 고기를 먹어 치우고 있는 계천행의 모습이 들어왔다.
늑대 요괴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비록 생긴 건 비슷해도 각자의 조상은 다를 테니, 결국은 동족이라고 할 순 없지 않겠는가?
사실이야 어떻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충분히 먹고 휴식을 취한 진양은 슬슬 떠날 채비를 했다.
원래대로라면 계천행을 황천마종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는 김에 장정의 녀석이 잘 살아 있는지도 보고 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양이 곧바로 황천마종을 떠나야 한다는 말을 들은 계천행은 곧 죽어도 진양과 떨어지기 싫다는 듯 진양에게 매달렸다.
설득한다고 해서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진양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려가기로 했다.
먼저 진양은 남경과 동경의 경계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쉬는 동안 입수하지 못 한 새로운 정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별도의 신분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영 신조의 땅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곧장 한 줄기의 빛이 날아들었다.
날아든 빛줄기에서 손이 쑥 뻗어져 나오며 곧바로 진양의 뒷목을 붙잡았다.
우드득-
뼈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며 진양의 발목은 그대로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박혀버렸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란 계천행이 날아든 사람을 공격하려 했으나 그는 가볍게 계천행의 머리를 붙잡으며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이야, 못 본 사이에 애까지 달고 나타나셨군요.”
“크흠……. 청란 소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신 걸 보니 제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나 봅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저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숨어있었던 것뿐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피해 잠시 몸을 숨겼던 것뿐이죠. 그러다 헌국공이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곧장 달려온 겁니다.”
이어서 진양이 계천행을 향해 손짓했다.
“천행아, 뭐 하고 있어? 어서 청란 누나에게 인사드려야지. 앞으로 누가 널 괴롭히면 청란 누나에게 말하도록 해. 알겠지?”
마음 같아선 ‘이모’라고 부르라고 하고 싶었지만, 괜히 까불었다간 진짜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누나’로 타협을 보았다.
“누나, 안녕하세요. 계천행이라고 해요.”
청란은 그제서야 그의 머리 위에 얹어두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녀는 다소 묘한 눈빛으로 계천행을 바라보았다.
“계천행이라……. 이 아이가 그 아인가요?”
“그렇습니다. 잘 아시네요.”
“대단하군요. 인마로 태어나 집념에서 벗어나긴 쉽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기초적인 재능도 상당하군요. 앞으로 크게 될 아이예요.”
그녀가 진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히 당신이 데리고 갔다간 이상한 것만 배울 테니 제가 데려가서 가르치도록 하죠. 어때요?”
청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천행은 늑대 요괴의 뒤로 숨어버렸다.
그리곤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녀석, 꽤 낯을 가리는구나.”
“소저, 일단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죠. 바쁜 일도 많을 텐데. 설마 하루 종일 여기서 저만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죠?”
“뭐, 사실 기다리고 있었던 건 맞아요. 헌국공이 죽었으니 곧 돌아올 것 같았거든요. 전해줄 소식이 있어요. 대제희님의 소식이에요.”
“네? 어떤 소식인데요?”
“이제 막 남해에서 돌아오셨는데 그 이후로는 어디로 갔는진 모르겠네요. 일단 지금까지는 요국에 계셨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오룡(蜈龍) 일족의 대사제를 죽이고 그들의 신전을 박살 내신 모양이더군요. 그러다 대붕 족장과 오룡 족장에게 쫓겨 신조 국경까지 오셨고, 때마침 예부 상서 이 대인께서 나타나 주신 덕분에 무사하실 수 있었죠.
하지만 이 대인께서는 본인이 마무리할 테니 저희에게 괜히 끼어들지 말라고 하셨죠. 그런데, 갑자기 역외(域外)의 사마(邪魔)들이 대거 신조로 침범해오기 시작하더군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청난 수가 몰려오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신조의 천병(天屏)조차 뚫을 정도로 강력한 실력을 지닌 녀석들도 섞여 있더군요. 덕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긴 했지만요.
그래도 얼마 전에 놈들을 모두 몰아내는 데 성공하긴 했습니다만. 어찌 된 일인지 대제희님과 이 대인 모두 종적을 감추셨답니다.”
진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소저를 도와 대제희님을 좀 찾아달라 이 부탁을 하러 오신 거군요.”
“맞아요. 당신은 비난령을 가지고 있잖아요. 게다가 그건 당신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고요. 그러니 싫어도 어떻게든 데리고 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