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528
528화 살았다
청란의 말을 듣고 나니, 이도에서 큰일이 벌어지는 동안 각 부처의 수장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예부 상서 이태현은 물론이고 병부 상서, 그리고 순천사들까지 모두 전선의 전투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던 것이었다.
물론, 호부와 공부같이 여유가 있었던 부처도 있긴 했으나 괜히 황자 간의 투쟁에 끼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시비가 가려진 상황이 아닌 이상 웬만해선 피하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었다.
남은 이부의 경우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는 부처인 만큼 더더욱 이러한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저 상황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대제의 명이 떨어지면 그제서야 뒤처리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양 역시 이번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괜히 진양의 신분으로는 이런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사실 진양은 오행산 쪽의 상황에 대해서는 별로 묻고 싶지 않았다.
비록 산겸의 관문 제자가 문하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죽는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움을 벌일 리는 없었다.
흘누는 직접 사망 의식을 거행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이번 일은 진양이 나서서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었다.
어디까지 알아내야하고 어디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는지 알아서 잘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 말로 해야 하고, 어디까지 손을 써야 할지.
오래 산 사람인 만큼 사리분별은 확실히 할 것이다.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구는 자들이 오래 살 확률은 매우 낮았다.
그러나 지금은 청란이 인마와 계무도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이 이상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계무도가 죽고 난 이후로 오행산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나요?”
“아직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청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산겸 어르신께서는 꽤 화가 많이 나신 듯합니다만. 원래는 이 대인께서 직접 가시려고 했으나 이 대인께서 자리를 비우시면서 적절한 사람이 없어서요. 대신 대제께서 친서를 오행산으로 보내셨습니다.”
다소 의외였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흘누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산겸이 무언가 강한 한 수를 쓰려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적당히 기회를 봐가며 이득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싸우도록 놔둘 순 없었다.
진짜 죽은 것도 아니니 말이다.
“청란 소저, 아니면 일단 제가 오행산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하셔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고, 저도 이 녀석을 계속 데리고 다니기엔 불편할 것 같아서요. 다른 곳은 몰라도 오행산이라면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계무도의 성을 이어받은 아이니까 오행산의 사람인 셈이잖아요.”
“그렇게 하시죠.”
청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천행은 애초부터 그녀의 말을 따르거나 그녀를 따라갈 생각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푸른 빛이 진양과 계천행, 그리고 늑대 요괴를 감쌌다.
이어서 세 사람 모두 한 줄기의 빛이 되어 하늘로 솟구쳐올랐다.
세 사람은 빛을 타고 단숨에 오행산까지 날아왔다.
장추우가 이들을 직접 마중 나왔다.
그리고 산겸이 전심 수련을 하고 있는 곳까지도 친히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일전에 왔을 때 봤던 호수는 사라지고 없었다.
게다가 호수를 둘러싸고 있던 산봉우리 중 하나도 사라지고 없었다.
자세히 보니 사라진 부분에 손바닥 자국이 남아있었다.
꽤 멋진 풍경이 펼쳐져있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큰 재앙을 당한 것처럼 폐허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호수가 있던 자리에는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진흙이 가득했다.
“스승님께선 계 사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우셨던 모양일세. 최근에도 상당히 거칠어지신 듯한 모습인데. 그나마 자네들이 와서 다행일세. 스승님께서도 천행이를 보고 나시면 분명 기뻐하실 걸세.”
장추우는 말을 하면서도 계천행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경계심 많은 계천행은 웬일인지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끔뻑이며 장추우를 바라봤을 뿐이다.
마치 장추우의 마음을 헤아린 듯한 모습이었다.
이어서 그의 시선이 진양 쪽으로 향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분명 살아있는데…….’
그러나 진양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폐허를 돌아 어느 지점에 도착했을 쯤.
장추우가 말했다.
“청 대인, 대인께서는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상황이 이런 만큼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전 괜찮으니 다녀오세요. 그럼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죠.”
청란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녀도 괜히 산겸이 분노한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녀는 신조의 사람이었다.
괜히 불안정한 상태의 산겸과 만났다가 무슨 일을 당했다간 본인만 손해였다.
상황이 이런 만큼 따질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진양도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산겸은 현재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대로 그의 앞에 나타나 뭐라고 설명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직접 산겸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니 자신의 걱정이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 옆에 위치한 정자.
산겸은 그곳에서 반쯤 누운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조촐한 술상이 차려져있었다.
꽤 기분 좋은 듯한 모습으로 혼자 술까지 즐기고 있는 모습이라니.
누군가 찾아온 모습에 산겸이 손을 들어 손짓을 했다.
한 줄기의 빛이 날아들며 거대한 산의 형상을 이루었고, 진양의 머리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계천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가 네 사공(師公)이란다. 어서 이리로 오거라.”
진양은 두 손으로 자신을 짓누르는 산을 받치며 그것을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계천행에게 말했다.
“천행아, 어서 사공님께 인사드려야지.”
비록 지금까지의 상황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계천행이었으나, 눈앞에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강자들이 나긋나긋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걸 보니 그는 순순히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사공님을 뵙습니다.!”
산겸은 계천행의 뼈대를 만져보고는 흡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골도 훌륭하고 마음도 매우 순수하구나. 앞으로 이곳에서 열심히 수련하도록 하거라. 그 누구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이 사공이 지켜주마.”
계천행은 고개를 돌려 진양의 눈치를 살폈다.
진양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자 계천행도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산겸은 낑낑거리며 거대한 산봉우리를 짊어지고 있는 진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볼을 잡아당겼다.
“흘누 그 망할 늙은이가 보낸 만큼 범상치 않은 녀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무래도 널 너무 과소평가한 듯하구나. 대제의 정곡을 정확하게 찌르고 두 거물을 보낸 것도 모자라 스스로 죽은 척하다니. 하마터면 나조차도 정말로 속아 넘어갈 뻔했다.”
“크흠, 그건…….”
계무도는 정말로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순간.
이 얘기를 꺼냈다간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님, 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 저도 생각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그저 천행이를 위해선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요.”
“흥, 그 더러운 놈들이 죽던 말건 상관 없다. 죽었으면 오히려 잘 된 게지.”
산겸이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이제 막 남만에서 돌아온 게냐?”
질문을 듣는 순간 진양의 머릿속이 번쩍였다.
이 질문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여기서 잘못 대답했다간 진짜 골로 갈 수도 있다.
“그럴 리가요. 이도의 일을 마치고 곧장 천행을 데리고 오행산으로 온 겁니다. 원래는 미리 말씀을 드리고 싶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을 마치자마자 곧장 천행이를 데리고 스승님께 온 겁니다.”
과연, 진양의 말을 들은 산겸의 안색은 이전보다는 좋아진 모습이었다.
진양은 재빨리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 역시 천행이를 다른 곳에 보냈다면 불안했겠지만 그래도 오행산으로 데려온다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스승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진 몰라서 말입니다.”
“그래도 아주 양심이 없진 않구나.”
산겸은 그제서야 흡족스럽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흘누 그 녀석에게 못된 것만 배운 줄 알았는데. 그래도 머리는 똑똑한 녀석이로구나. 천행이는 확실히 오행산에 머무는 게 가장 안전하지. 절대 흘누 그 녀석에게 넘겨선 안 돼.”
“스승님, 그건 그렇고 일단 이것부터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저 아직 상처도 회복이 안 됐는데…….”
산겸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진양을 짓누르던 산봉우리가 사라졌다.
진양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뻐근해진 목과 팔의 근육을 풀었다.
‘살았다.’
다들 산겸을 보고 겉만 늙었지, 속은 어린아이나 다름없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만약 계천행을 정말로 남만으로 데려가 버렸다면 그는 산겸을 만나자마자 반죽음 상태가 되었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천진난만한 얼굴의 계천행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목숨을 부지하는 법부터 배우도록 하렴.’
연체 수도사가 되는 것도 사실 나쁜 건 아니었다.
질긴 생명력을 갖게 된다면 그만큼 쉽게 죽지 않게 되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연체 수도사는 연기 수도사에 비해 생존률이 높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천행이 연기 수도사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계천행 덕분에 진양은 찬밥 신세가 되었다.
대체 뭘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산겸은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일단 연체 수도사로 만들어놓을 생각인 듯했다.
그렇게 진양은 장추우와 둘만 남게 되었다.
사실 겉으로는 사제지간이라곤 하지만 별로 친근한 느낌은 없었다.
장추우는 무슨 말을 하던, 무슨 일을 하던 항상 점잖은 선비의 모습이었다.
물론 진양도 점잖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특유의 분위기나 기질이라는 것은 그림처럼 마음대로 그려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양,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신조의 일에 너무 깊게 관여하진 말게나. 최근 들어 대영 신조에는 수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이만 자중하게.”
한참 말없이 걷던 장추우가 돌연 입을 열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명심하고 살겠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저 알고만 있으면 된다. 결국은 목숨이 붙어있는 게 중요한 거니까.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보면 알게 될 게다. 한 시대를 휩쓸었던 강자들은 결국 흘러가는 세월 속에 잊혀질 거고, 살아남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강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