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576
576화 직접 가서 싸워보든가
가희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천천히 입술을 뗐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죠?”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기억을 지우긴 했지만, 제겐 기억을 지우지 않고 따로 보관하는 방법이 있거든요. 직접 보여드리도록 하죠.”
진양은 가희의 미간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몽경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지금 보고 있는 건 소저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장면들이에요. 지금 본 건 나갈 때 다시 지워드리도록 할 겁니다만. 하지만 내리는 결정은 남겨드릴 수 있어요.”
잠시 뒤.
기억으로 이루어진 몽경이 펼쳐졌다.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이젠 아실 겁니다. 저와 소저 둘 다 더 이상은 물러날 수 없기 때문이죠. 시간의 파도가 멈춘다면 영제는 다시 나타나게 될 거고, 다시 외부와 연락할 방법을 찾으려 하겠죠. 그렇게 되면 저와 소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영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마 저보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전 그가 다시 외부와 연락할 방법을 찾기 전에 조대를 바꿀 겁니다. 하지만 태자나 조왕, 주왕이 이득을 보는 건 원치 않아서 말이죠. 그래서 여제가 될 생각이 없는지 물은 겁니다.”
“전 제위(帝位)에는 관심 없습니다.”
가희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잠시 뒤.
“하지만 만약 영제를 완전히 매장시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단지 이 일로 자신의 혈육을 배반했다는 비판을 받을까 봐 걱정되네요.”
“의지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도와드리도록 하죠.”
진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껏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가희의 동의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어떻게 상대의 동의도 없이 저지를 수 있겠는가?
반드시 동의를 얻어야만 할 수 있다.
“쉽진 않을 겁니다. 나의 오라버니, 영제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요. 아마 진양 당신이 얘기한 것처럼 돌아오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과 나를 베어버릴 거예요.”
가희가 마치 남 얘기를 하듯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소저의 봉호는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회복이 될 거니까요. 그리고 가장 먼저 군대를 다시 손에 넣게 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모용가악을 구해주는 대신 대연 신조의 대군을 국경 근처로 주둔시켜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일단 당장은 이태현도 없고 그렇다고 병부의 무능한 주정뱅이 놈들에게 군대를 맡길 순 없을 겁니다.
아무리 고집불통인 영제라도 대연을 막기 위해서라면 소저의 봉호를 다시 회복시킬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군대를 다시 손에 넣게 될 거고요.
전란을 다스리고 돌아온다고 해도 걱정할 건 없습니다. 다시 봉호를 지워버릴 명분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안정적으로 군대를 손에 쥐게 되는 겁니다.”
가희는 이상한 눈빛으로 진양을 쳐다보았으나 진양은 모른 척 무시하고 넘겼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도 당연하다.
모용가악을 놓아준 걸 이해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몰래 그의 마음속에 생각을 심어두었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모용가악이 살아만 있는다면 그는 계속해서 한 가지 일에만 집착하고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령 작은 것 하나라도 모두 되갚아주는 성격을 가진 그라고 하더라도 작은 은원 따위에는 신경 쓸 틈조차 없을 것이다.
그저 진양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진양 역시 멀리 타국에 있는 사람까지 신경 쓸 틈이 없다.
게다가 그와의 협상이 항상 순조롭다는 보장도 없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긴 했지만, 진양은 굳이 그녀에게 구구절절 모두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그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꽤 오랫동안 쉬긴 했지만, 그래도 군대 통솔 정도는 큰 문제 없이 가능하겠죠?”
멍한 얼굴로 있던 가희의 모습은 진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완전히 바뀌었다.
두 눈동자는 맑게 빛이 났으며, 허리는 꼿꼿하게 펴졌고, 이전과는 달리 눈빛도 상당히 날카로워졌다.
비록 치마를 입고 있긴 했으나 용맹한 무장의 모습이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동안 전장에서 살육을 벌이며 쌓아왔던 기질이 순간적으로 폭발하듯 솟구치며 진양을 수 장 밖으로 밀어냈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진양은 안심이 되었다.
다행히 과거의 기세와 의지를 잃어버리진 않은 듯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라면 군대를 통솔하는 건 물론이고 다른 이들의 신뢰 또한 충분히 얻어낼 수 있다.
심지어 영제조차 이러한 그녀의 모습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진양은 묵양을 힐끔 쳐다보았다.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묵양은 비록 아무런 힘도 뿜어내지 않고 있었고, 상고의 인형사도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를 대적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가희의 힘과 실력은 단순히 경지로 쥐어 짜낸 것이 아니라 직접 쌓은 것들이다.
진양은 이것이 바로 그녀가 묵양과 다른 점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같은 기반, 같은 경지, 그리고 같은 수단을 사용한다고 쳐도 가희는 순식간에 묵양을 제압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투 경험이 핏줄로 녹아들며 본능을 압살한 것이다.
당장 짧은 시간 내에 이러한 부족한 점을 채울 수는 없다.
그래서 진양은 이제까지 일단 목숨을 부지하는 걸 최우선 목표로 했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반격을 가한 것이다.
단숨에 휘몰아쳐야 상대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약점을 찾을 수 있다면 약점일 이용하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면 단순히 경지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쌓아온 기반과 육신의 힘, 그리고 진원과 신통력을 통해 얻은 우세로 상대를 눌러 죽인다.
그러나 피 튀기는 전장을 경험하고, 수도 없이 죽을 위기와 선택의 기로를 겪은 고수는 적과 정면으로 부딪쳤을 때도 약한 힘으로도 강자를 쓰러뜨릴 수 있다.
마치 가희처럼 말이다.
상태가 회복된 후, 일념의 바다로 들어가기 전.
그녀는 요국까지 달려가 오룡 일족의 대사제를 도륙하였을 뿐만 아니라 둘이나 되는 대요 족장을 추격하여 죽이기까지 했다.
이 정도만 봐도 결코 만만하게 볼 실력은 아니다.
거기에 일념의 바다에서 삼켰던 원기까지 더해져 기반은 더욱 탄탄해졌다.
지금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을지는 진양도 잘 모른다.
하지만 요국에 갔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점은 확실했다.
이러한 생각이 들수록 진양은 더욱 안심이 되었다.
황위를 계승 받으려면 스스로도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춰야만 한다.
그래야 실권을 잡고도 아랫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제를 두려워하던 건 그가 단순히 대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대영 신조의 모든 이들이 공인하는 제일의 강자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영 신조 안에서는 국운까지 더해져 실력이 수십 배는 증가한다.
때문에 설령 봉호도군이 온다고 하더라도 대제의 상대가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설령 신조의 영토를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봉호도군 정도의 실력을 가진 강자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 한 번도 신조 외의 땅에서 동급의 강자와 싸움을 벌여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진양조차 일념의 바다에서 그가 강하다는 것만 느꼈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으로 강한지는 가늠조차 불가능했었다.
가희가 여제가 되기 위해선 그 누구보다 강한 실력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만 중요한 순간에 모든 이들을 말만으로도 압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실력은 필수였다.
“나름 자신이 있는 것 같으니 더 이상 얘기하진 않을게요. 군대 통솔이라면 전문가이시니까요. 하지만 영제가 봉호를 회복시켜주고 전선으로 가라고 한다고 해도 한 가지는 기억하셔야 합니다. 절대 자발적으로 임무 부여를 간청해선 안 되고, 비난삼위를 회복시켜달라는 간청도 해선 안 됩니다.”
“그건 잘 알고 있어요. 과거에도 절 두려워했었던 만큼 지금은 훨씬 더 두려워할 테니까요.”
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계신다면 다행이고요. 그럼 새로 소식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진양은 다시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한참 책을 읽던 진양이 문득 옆에 있던 묵양에게 물었다.
“가희가 네 공격을 몇 초(招)나 받아줄 수 있을 거 같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언제든 원한다면 내가 오히려 그녀를 제압할 수 있을걸?”
“허허…….”
진양이 기가 찬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래, 네 똥 굵다. 근데 난 너보다 훨씬 더 강한 친구를 하나 알고 있거든. 상고 시대에 적에 의해 온몸이 토막 나고도 지금까지 살아있는 녀석인데. 당시 녀석의 육신은 너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했다고 하더라고. 나중에 시간 나면 따로 소개해 줄게.”
“물론 지금의 나보다는 강하겠지만, 상고 시대의 나였다면 어떨지 모르겠군.”
묵양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불필요한 언쟁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던 진양은 순순히 인정하는 척해 주고 말았다.
하지만 묵양은 이대로 굽히긴 억울했는지 끝까지 중얼거리며 자신이 훨씬 더 강한 이유를 늘어놓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진양은 마침내 인내심의 한계가 왔는지 그를 해안 안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렇게 못마땅하면 저기 안에 있으니까 직접 가서 싸워보든가.”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고, 진양은 계속해서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대연에서도 소식이 들려왔다.
대제희를 대연으로 데려오기 위해 사신으로 나섰던 모용가악이 아무 이유 없이 대영 신조에서 모욕을 당했고, 심지어 함께 나섰던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심지어 요국의 대요까지 불러들여 몰살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영 신조의 땅까지 들어온 대요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던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당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건 순천사의 수장.
이런 무시무시한 존재가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도망칠 수 있었단 말인가?
심지어 정천사의 위흥조까지 직접 나서서 모용가악을 마중 나온 자를 막아섰다.
어쨌든 이 모든 상황은 대영 신조가 뒤집어쓰게 되었다.
모용가악은 사전에 협의했던 내용을 모두 지켰다.
그에게도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연 태자는 완전히 척을 질 생각으로 규칙을 어겼다.
이대로 그가 살아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대연 태자는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선 인정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디든 뒤집어씌울 곳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대영 신조인 것이다.
어차피 놈들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저지른 전과가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