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577
577화 여전하구나
모용가악이 유리한 지세를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모두들 잘 알고 있다.
모용가악이 판을 뒤집지 않고 이득까지 본 것이 대해선 대연 태자 역시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어쨌든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서로의 마음이 맞다는 걸을 인정하며 모든 것을 대영 신조에 뒤집어씌웠다.
모용가악은 대연 신조의 대표자로서 대영 신조로 다녀왔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면 대연 신조는 분명 얕잡아 보일 게 뻔하다.
그렇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명령이 하달되었다.
대군을 이동시켜 국경 지대에 압박을 가하라는 명령이었다.
대영 신조 북부 국경 지대를 지키는 군관은 작은 마찰에는 익숙해져 있었으나 이와 같이 큰 반응에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자마자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곧바로 이도로 향했다.
비행이 금지된 이도의 상공 너머로 한 줄기의 붉은 빛이 지나갔다.
금공(禁空) 진법과 각종 방호 금제가 깔려있었으나 아무렇지 않은 듯 통과해버렸고, 곧장 궁성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빛이 지나간 지 반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아 모든 관리들에게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 * *
태화전(太和殿).
다급한 내용의 상주문이 모든 이들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대연의 팔십만 대군이 국경 지대에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순천사에서 사실을 확인했고 정천사에서도 이것이 사실이라고 소식을 보내왔다. 그대들 중 누가 나서서 대연 신조의 기를 꺾고 이들을 쫓아낼 수 있겠는가?”
불필요한 헛소리는 없었다.
굳이 의견에 대해 물을 필요도 없었고, 의견 조율 따위도 필요 없다.
적이 코앞까지 왔는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일단은 싸우고 보는 것이다.
문신들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군사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이었다.
물론 영제가 문신들이 군사와 관련된 일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병부 상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비록 연금 중이긴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궁성으로 소환된 것이다.
그러나 태자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병부 상서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곤 계속해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영 신조는 너무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왔다.
태자, 조왕, 그리고 주왕.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군대를 통솔해 본 경험이 없었다.
병부 상서는 사실 무신이 아닌 문신이다.
병부가 존재하는 건 병권을 쥐고 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군부의 인물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그러므로 병부보단 군부에서 쥐고 있는 병권이 훨씬 더 컸다.
남방 국경 지대의 여양후, 당시의 신전후는 군부의 사람이었다.
그가 남방 국경 지대에 머물고 있었던 목적 중 가장 큰 목적은 바로 남만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영제는 잘못을 저지른 신전후에게 기회를 주며 북방 국경 지대로 보내려고 했다.
어차피 남방 국경 지대는 오랜 시간 잠잠해 왔고, 그에 반해 북방 국경 지대는 크고 작은 충돌이 수백 년 동안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전후가 군대를 이끌고 북방 국경 지대를 지키게 된다면 상황은 크게 안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신전후는 죽었다.
이제 남방 국경 지대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건 여양후가 유일하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폐하, 소신을 보내주시옵소서! 대연 놈들을 격파하겠사옵니다.”
“폐하, 소신을 보내주시면 십 년 내에 반드시 평정시키겠사옵니다.”
몇몇 군부의 인물들이 자신들을 보내달라며 입을 열었지만 영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들의 능력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빨리 해결을 봐야 하는 상황이지만 현재 이곳에는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존재만으로도 대연 신조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군부 인물들은 서로 가겠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고, 어쩌다 보니 서로 간의 말싸움으로 이어지며 자칫 주먹다짐으로 이어질 듯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그렇게 한참의 난리 끝에 한 문신이 문득 외쳤다.
“폐하! 대제희님을 보내시는 건 어떻겠사옵니까?”
순간 태화전 내부에 정적이 흘렀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대제희님께서 나서주신다면 대연 놈들은 꼼짝도 못 할 겁니다.”
한 노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편, 모든 문신들의 시선은 심성낙에게 향해있었다.
그가 말을 꺼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소. 난 이제껏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오.”
심성낙이 차갑게 웃으며 주위의 대신들을 쳐다보았다.
“허나 나 역시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볼 시간이 있으면 더 좋은 의견이라도 내놔보시든지요.”
애초에 그런 게 있으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겠는가?
조왕은 고개를 숙인 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그도 조금은 알고 있다.
대제희와 영제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갈등으로 인해 형제간의 우애는 사라진 지 오래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감정, 할아버지와 손주 간의 감정.
영제에게 이런 감정들은 일절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영제가 대제희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대연의 사신들을 대하던 태도를 보면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병사를 이끌고 전선으로 향할 만한 사람.
지금으로선 대제희보다 더 적합한 사람을 없을 것이다.
물론 이걸 영제가 먼저 나서서 제안할 수는 없는 법.
조왕이 한참 생각에 빠져있을 때, 태자가 병부 상서에게 눈짓을 보내는 걸 발견했다.
잠시 고민하던 조왕은 마침내 결심을 내린 듯 한걸음 나서며 큰소리로 말했다.
“부황 전하, 소자 역시 같은 생각이옵니다. 황고님을 전선으로 보내시지요.”
몸을 굽히며 슬쩍 태자를 살피니 표정이 다소 바뀌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일전에 헌국공 사건의 죄를 대제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시도했었다.
이 일로 인해 대제희에게 노여움을 샀다.
태자는 아마도 이 순간 변해버린 영제의 태도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대제희와의 관계를 조금이나마 개선하려고 한 것이다.
인심을 써도 태자가 득을 보도록 놔둘 순 없다.
조왕은 고개를 숙인 채 영제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영제가 말했다.
“네 생각을 말해보거라.”
조왕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영제도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부황 전하, 황고님께선 과거 삼위를 통솔하실 때 오랜 시간 동안 한 번의 패배 없이 대연 신조를 완벽히 견제하셨었습니다. 북부 국경 지대에 주둔하고 있는 대연의 장사들 중 대제희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자는 없을 정도이지요. 심지어 그 이름만 들어도 사기가 한풀 꺾일 수준입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대연 신조를 견제할 수 있는 건 황고님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황고님을 전선으로 보내시지요.”
조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자도 한마디 했다.
“소자 역시 같은 생각이옵니다.”
이쯤 되자 다른 이들도 더 이상 눈치 볼 것 없이 동의의 의사를 내비쳤다.
모두들 동의하는 듯하다 영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만 모두 물러가고 대제희를 입궁하라 하거라.”
한 시진 뒤.
가희가 궁성에 도착했다.
그녀는 궁성 정문 앞에 선 채 한참을 바라보다가 마중 나온 내시들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향했다.
영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양심전(養心殿)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영아, 아마 이곳까지 오는 길에 사정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들었을 게다. 네가 직접 전선으로 나서서 대연 놈들을 상대하는 건 어떻겠느냐?”
“폐하의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을 하긴 했으나 명확한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넌 여전하구나…….”
영제는 한숨을 쉬며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의 일은 짐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네가 원하는 바가 있다면 짐은 더 이상 등을 떠밀진 않겠다. 허나 이번 일에 적합한 사람은 너 한 사람뿐이라는 걸 알아주었으면 한다.”
가희는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영제가 팔을 휘두르자 황금색 두루마리가 가희의 손에 위로 떨어졌다.
“네 봉호를 회복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니 결정이 선다면 곧바로 전선으로 가면 된다. 이 외에 오랜 기간 상처를 방치하여 수명에도 큰 영향이 끼쳤을 터. 사람을 보내 궁 내의 창고를 열어 네게 도움이 될 만한 보물을 가져오라고 일렀느니라. 그리고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으니 스스로 결정하여 데려가도록 하거라.”
“존명.”
다시 저택으로 돌아와보니 영제가 보낸 보물들이 도착해있었다.
수명을 연장시키는 보물 외에도 각종 요상약들과 영약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전부 최상급으로만 말이다.
가희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단순한 미소가 아닌 비웃음이었다.
‘날 필요로 할 때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여전하구나.’
* * *
가희의 봉호가 회복되었다는 소문과 그녀가 전선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소문은 금세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양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확실히 현재의 영제로선 이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다.
현재 이도에 남아있는 건 영제의 제군법상이다.
본체와의 연락이 끊어진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가 내릴 수 있는 최상의 선택지는 일단 최대한 조용히 현 상황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지금 당장 코앞까지 몰려온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대제희가 유일했다.
가희의 봉호를 회복시키고 통수권자로 앉히는 것쯤은 별거 아니다.
적어도 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걸 보고만 있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다음 날.
가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진양은 곧바로 대제희부로 향했다.
“그러니까 저를 전선으로 데리고 가고 싶으시단 말인가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지?’
“맞아요. 영제가 누구든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마음대로 데려가라고 했거든요. 과거의 비난삼위를 모두 데려가고 싶지만 그럴 순 없고, 순천사 역시 임무가 몰린 상황이라 지금으로선 청란과 자란을 데려가는 게 최선이거든요. 이 외에는 마땅히 데려갈 사람이 없기도 하고요.
이대로 제가 떠나버린다면 모두들 당신을 견제하려고 들 거예요. 당신과 제가 가까운 사이란 건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요. 중상 때문에 아무런 힘도 못 쓰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당한다면 아마 버티지 못 할지도 몰라요.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양만큼 적합한 사람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북부 국경 지대의 상황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상당히 진지하게 얘기하는 걸로 보아 꽤 오랜 시간 고민을 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