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578
578화 혈성살도(血腥殺道)
‘북방 국경 지대라…….’
기껏해야 작은 마찰이 전부일 것.
아무리 심각하다 해도 결코 전쟁으로 발전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저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려는 것뿐이다.
이건 대연 신조의 사람들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기전으로 이어지거나 큰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비록 대영도 대연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이유에 대해 눈치를 채곤 있었으나, 그렇다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을 순 없는 법.
국경 지대에 대군을 주둔시키는 것.
서로를 염탐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두 국가는 오랜 시간 동안 평화 속에 공존해왔고, 영제 역시 오래전에 정벌을 그만두었기에 수많은 의도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진양이 생각하기에 기껏해야 서로를 염탐하는 정도가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희의 능력이라면 쉽게 해결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진양을 북방 국경 지대로 데리고 가겠다니.
‘도대체 왜?’
잠시 고민하던 진양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가희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도 함께 가도록 하죠. 마침 해야 할 일도 있으니.”
어차피 가희가 이도를 떠나면 진양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아진다.
가는 김에 낯도 익히고, 현재 가희가 어떤 힘을 쥐고 있는지도 살펴보기로 했다.
‘그녀를 그 자리에 앉히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미리 파악하고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군 내에 참모 자리를 하나 만들어주도록 할게요. 비록 정식으로 임명되는 관직은 아니긴 하지만 불필요한 모험을 할 필요도 없고 매번 지휘관 막사에서 대기하고 있을 필요도 없어요.”
“편한 대로 하세요. 그럼 전 먼저 북방 국경 지대로 떠나도록 할게요. 나중에 도착하면 주둔지로 돌아가도록 할게요.”
가희의 제안을 받아들인 진양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떠날 채비를 하다 보니 어딘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그러다 문득 묵양을 해안 속에 집어넣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황급히 이성 체내로 보내 해안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가장 먼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묵양과 검둥이의 모습이 보였다.
“영지(靈智)조차 불온전한 네 녀석과는 말도 섞기 싫다!”
검둥이의 목소리에서 불쾌함이 느껴졌다.
“육신도 없이 이런 곳에 봉인 당해 꼼짝도 못 하는 주제에. 네가 그렇게 강하면 말로만 하지 말고 직접 덤벼 보라니깐? 상고 시대의 인형사까진 아니어도 현재의 나로도 네 녀석은 상대도 안 될 거다!”
묵양 역시 가소롭다는 검둥이를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인형사는 무슨. 그딴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상고 천정이나 지부 시대도 경험해 보지 못한 녀석이 스스로를 인족 십이사 중 한 사람이라고 칭하다니. 그 시대에 진정한 강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냐?
잘 들어. 전성기 때였으면 네 녀석은 한 손으로 눌러 죽이고도 남았을 거라고. 퉤!”
“흥! 육신도 없이 이런 곳에 봉인 당해 꼼짝도 못 하는 주제에.”
묵양은 피식 웃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 자식! 진정한 상고의 강자가 뭔지 보여주마!”
“덤벼! 육신도 없이 봉인 당한 주제에!”
검둥이는 화가 잔뜩 났는지 온몸의 구멍에서 검은 기운을 마구 내뿜고 있었다.
“영지조차 온전하지 않은 놈이!”
“뭐? 이런 개자식이! 당장 나와! 어디 한번 제대로 붙어보자!”
묵양이 씩씩거리며 마수를 마구 쳐댔다.
진양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의외였다.
말싸움으로 검둥이가 묵양한테 밀리다니.
‘이쯤이면 충분해.’
진양은 묵양을 해안 밖으로 끌고 나왔다.
“진양, 뭐 하는 거야? 난 아직 그 녀석이랑 끝장을 보지 않았다고.”
“시끄러. 이만 일할 시간이야. 싸움은 나중에 한가할 때나 하라고.”
* * *
진양은 곧바로 이도를 떠나 북방 국경 지대로 향했다.
묵양의 비주를 타고 장장 한 달 동안 이동한 끝에 마침내 북방 국경 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은 과거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는 곳곳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고, 어느새 자라난 풀들이 대지를 푸른 빛으로 물들인 상태였다.
물론 전장의 흔적은 여전히 이곳저곳에 남아있었다.
아직 풀이 자라지 않은 곳도 있었고, 무언가에 의해 검게 그을린 땅도 있었다.
번개가 내려치며 남겨진 흔적이었다.
일전에 반면을 묻었던 구덩이를 찾아냈다.
이전이랑 똑같은 모습이었다.
대연 놈들, 시신조차 거두러 오지 않은 듯했다.
“성불시키지 않은 시신을 챙겨갔다간 추적이라도 당할까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묻어놨는데 문득 관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은 게 생각이 나서 말이야. 무려 수십만 리나 떨어진 곳까지 찾아와서 성불할 수 있도록 관을 준비해 주다니. 묵양, 너 이렇게 착한 사람 본 적 있어?”
“있지. 다 죽긴 했지만.”
“…….”
진양은 그를 무시한 채 땅을 파 내려갔다.
전투의 여파로 온전하지 못한 모습이긴 했으나 당시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유지가 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죽기 직전 이루지 못했던 염원과 집념이 아직까지도 서려 있었다.
분명 혈성살기를 모두 회수했으나 집념은 여전했다.
이대로라면 어느 순간 사기를 원천 삼아 다시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충성심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인데. 참 아쉽단 말이지.”
진양은 관을 꺼내 반면의 시신을 수습한 뒤 잘려 나간 부분을 정성스럽게 봉합해 주었다.
그리고 아직 감지 못한 눈을 손으로 감겨주었다.
하는 김에 습득 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라색 광구가 하나가 나왔다.
그것을 곧바로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모용가악은 이미 무사히 돌아갔을 텐데. 도대체 무슨 집념이 아직도 남아있는 건지 모르겠군.”
관 뚜껑을 덮은 뒤 양지바른 곳을 찾아 다시 그를 정성스럽게 묻어주었다.
이어서 눈을 감고 새로 얻은 기능서를 살펴보았다.
혈성살도(血腥殺道)라는 공법과 함께 유래가 기록되어있었다.
과거 대연 신조 북부에 있는 빙원(氷原)에서 한 고수의 무덤이 발견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적이 있다.
하지만 무덤을 여는 순간 남아있던 살기와 살의가 이들을 덮쳤고, 절반 이상이 살육밖에 모르는 미치광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한바탕 살육의 폭풍이 휩쓸며 지나간 뒤, 소문을 들은 강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몰려든 강자는 상황을 정리한 뒤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무덤 안에는 한눈에 봐도 굉장히 오래전에 죽은 누군가의 시신이 누워있었다.
놀랍게도 수만 년이 흘렀음에도 꽤 온전한 모습이었다.
무덤 안에 있던 보물이란 보물은 전부 살기와 살의에 의해 녹슬거나 썩어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유일하게 무덤 중앙에 있는 비석만 멀쩡하게 남아있었다.
세월의 흔적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흐릿해져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일곱 개의 ‘살(殺)’이라는 글씨만이 뚜렷하게 남아 무시무시한 살기와 살의를 풍겨내고 있었다.
이어서 고수들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졌고, 살인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기 무섭게 자신도 모르게 칠살비(七殺碑)의 영향을 받아 서로 동귀어진하고 말았다.
결국 살아남은 극북 율종의 한 대승려가 간신히 살의를 억제하며 칠살비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
남은 강자들은 박살 낸 비석을 공평하게 나눈 뒤 그것을 챙겨 각자의 길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을 전승으로 삼았다.
대영 신조의 태평살전은 바로 ‘살’이 적힌 비석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대연 신조의 칠살악전은 사실 별것 아니다.
칠살은커녕, 분배를 받을 때 대연 신조의 유리한 상황을 이용해 한 조각을 더 챙겨간 것이 전부다.
혈성살도는 바로 이 중의 하나인 ‘살’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양은 혈성살도의 내용을 느껴보았다.
놀라웠다.
단순히 내용만 느꼈을 뿐인데 온몸을 곤두서게 만들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한 혈성살의가 느껴졌다.
마도보다 훨씬 더 마도 같은 기운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마도 공법을 보았지만 이보다 더 살성(殺性)이 강한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니 당시 반면이 복면을 쓰고 있었던 건 어쩌면 자기 스스로도 제어를 할 수 없을까 봐 살기와 살의를 억제하기 위함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일전에 대연 신조의 칠살악전이 수련하기 어려운 공법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낮은 확률로 수련에 성공할 수 있긴 하지만, 실패하면 미쳐버리거나 죽음에 이른다.
보아하니 난데없는 소리는 아닌 듯했다.
고민하던 진양은 일단은 배우지 않기로 했다.
이런 공법은 그저 존재가 있다는 것만 인지하면 그만.
굳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안 배우고 넘어가는 게 이득이다.
당시 칠살비에 남아있던 ‘살’자는 총 일곱 개.
그렇다면 여기서 파생된 공법 역시 총 일곱 개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경전의 이름을 떠올려보아도 일곱 개가 채 되지 않았다.
이 중 일부는 사람이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든가 아예 익힐 수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누군가 비석 조각을 봉인된 상태로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대영 신조의 태평살전은 아무래도 이 중에선 가장 온순한 축에 속하는 공법인 듯했다.
위험부담이 가장 적은 연체 공법일 뿐만 아니라 살도를 수련하는 공법치곤 최대한 태평함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있다.
전형적인 마신불심(魔身佛心)의 공법으로 위험부담은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모두 이전에 들었던 것들이다.
이제 와서 보니 태평함이란 마음속의 태평함을 지키킨다는 뜻이 아니라 모두 죽여서 태평하게 만든다는 뜻인 듯했다.
그나마 이제껏 태평살전을 얻지 않은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익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칠살비에서 파생된 만큼 사악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진양은 천천히 혈성살도에 대해 연구했다.
비록 공법 자체를 익힐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배울 만한 것은 꽤 있었다.
예를 들어, 혈성살기를 이용하는 공법이 하나 있었는데 진양은 이것에 꽤 관심이 있었다.
“묵양, 일전에 수집했던 혈성살기 혹시 따로 쓸 곳은 있는 거야?”
“아직은 없어. 나중에 무기로 만들면 좋을 것 같긴 한데.”
“훼멸구를 만들듯이 혈성살기를 재료로 써서 만들어 봐.”
“왜? 어차피 누군가를 죽이지도 못할 텐데.”
묵양은 하기 싫다는 듯한 눈치였다.
재료 낭비였기 때문이다.
“한번 해 봐. 두 개만 만들어줘.”
“어쩔 수 없지…….”
진양은 묵양에게 괜히 나쁜 짓을 하도록 시키진 않기로 했다.
사람을 죽일 때 언제 굳이 직접 자신이 손을 썼던 적이 있단 말인가?
이들이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줄기의 빛이 허공을 가르는 것이 보였다.
진양과 묵양은 기운을 숨기며 땅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상대가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땅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