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792
792화 진정한 미식
이제 상황은 바뀌었다.
본래는 영제의 본존이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나, 이제는 영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되면 영제는 무조건 진양의 계획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태자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태자에게 훨씬 더 나은 선택지를 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영제에게 완벽한 선택지를 제공한 것이다.
그는 애초에 전조에 큰 원한을 가지고 있으니 별안간 칼을 들이댄다고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다.
그가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대영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영제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현재의 국면은 여러 사람이 한곳에 모여 싸움을 벌이는 형국으로 발전했다.
영제, 전조 세력, 중간에 끼어있는 충신들, 그리고 겉보기엔 충신 같지만 사실은 반란을 꾀하고 있는 자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좇는 방랑자들.
여기에 충신을 가장하고 있는 밀정 진양까지.
승기를 잡기 위해선 수면 아래에서 국면을 조종해야 했다.
그 누구의 세력도 커지지 않게 해야 하며, 그 누구도 열세에 빠지지 않도록 적절하게 조절이 필요했다.
가장 좋은 건 서로의 힘이 균형을 이루고, 서로 피가 터지도록 소모전을 벌이는 것.
그렇게 싸움이 극에 달했을 때 진양이 나서서 단숨에 양쪽 모두를 쓸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충신들에게 발각돼선 안 된다.
발각되면 곧바로 패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선 진양이 밀정이라는 사실이 절대 밝혀져선 안 된다.
만약 발각된다면 영제 전조 할 것 없이 전부 진양을 최우선 순위로 죽이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제를 죽이면서도 대영 신조가 수백 년에 달하는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시간이 얼마 없다.
대영이 과도한 혼란에 빠지게 방관해선 안 된다.
적어도 가희가 완벽하게 국면을 휘어잡을 수 있을 때까진 말이다.
가희가 제위에 올라야만 영제와 대영 신조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릴 기회가 주어진다.
즉, 지금으로서 영제가 가장 믿고 있는 큰 산을 무너뜨려 버리는 것이다.
이 큰 산이 무너지게 된다면 지금껏 영제에게 굴복하던 강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들고 일어나며 오히려 영제를 향해 칼을 들이밀게 될 것이다.
* * *
동궁.
태자는 여전히 초상화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다 죽어가던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달리 빛이 나고 있었다.
선택지가 없을 때는 영제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수단이 자신의 죽음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었었다.
큰 깨달음을 얻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은 전부 사실이다.
자신이 모든 걸 잃었다는 걸 알았기에 자신이 원하는 건 절대 이러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물은 목마른 사람이 파는 법.
목이 마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우물을 파지 않는다.
자신의 어머니가 살았던 곳에 가고 싶다고 했던 건 전부 사실이다.
단지 지금까지는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모든 것을 잃고 죽을 때가 되니 이는 오히려 큰 후회로 남게 되었다.
만약 그에게 선택지가 있었다면 아무 쓸모 없는 태자 신분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위해 마지막 여정을 떠났을 것이다.
물론 이것 외에도 가장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진양의 말에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누군가에 의해 오래전부터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되뇔 때마다 마음속에 커다란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괴로웠다.
* * *
황궁.
영제는 높은 누각에 홀로 선 채 번화한 이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선 한 내시가 진양과 태자가 나누었던 대화를 전부 털어놓고 있었다.
한참 설명을 마친 뒤, 내시는 조용히 물러갔다.
영제는 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이었으나 마음속은 상당히 복잡했다.
현재 어떤 국면이 펼쳐지고 있는지 영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본존은 이미 실종된 지 오래다.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마치 처음부터 본존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념의 바다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최대한 안정적으로 가능한 오랫동안 시간을 끄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태자의 죽음 앞에 영제는 심하게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도 본존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의 신변안전은 더 이상 보장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진양이 훌륭한 명분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진양이 했던 말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한낱 수도사 따위에 마음 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의 시선은 오직 눈앞의 대국과 진정으로 쓰러뜨려야 할 상대에게 향해있었다.
한참 뒤.
영제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 경.”
그러자 한 태감이 영제의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신 여기 있사옵니다.”
“혹시 태자가 동궁에서 기르고 있는 우두머리 괴수들을 움직이진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궁을 나섰을 겁니다. 황천마종의 진양이라는 자에게 보낸다고 했었습니다.”
“천뇌(天牢) 천자호에 가둬둔 대요들도 함께 보내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 * *
저택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황궁에서 보낸 물건이 도착했다.
“진 선생, 집에 계십니까? 명을 받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진양은 곧바로 묵양과 함께 대문으로 향했다.
느껴지는 살기로 보아 태자가 진양에게 수고비 명목으로 몇 마리를 더 보낸 듯했다.
그런데, 문을 여니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물건을 가져온 건 다름 아닌 법상 강자였던 것이었다.
‘뭐야? 겨우 괴수 하나 배달하는데 무슨 법상 강자까지 보내?’
게다가 낯이 꽤 익은 얼굴이었다.
궁에 들어갔을 때 보았던 순찰사들 중 한 사람이었다.
비록 기운을 최대한 숨기고 있긴 했지만, 은연 듯 빠져나오는 살기까지 완전히 감추진 못한 듯했다.
태평살전을 익힌 자가 분명했다.
게다가 온전한 태평살전을 익힌 듯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진양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며 묵양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묵양은 곧장 다가가 상대가 가져온 물건을 저택 안으로 옮겨놓았다.
이 중 다섯 마리는 그물에 담겨 배달되었는데, 어차피 기이 덩굴에게 먹일 녀석들이었기 때문에 크게 살펴보진 않았다.
그런데, 여섯 번째 괴수는 조금 달랐다.
그물에 담겨온 게 아니라 금제가 걸린 검은 자루에 담겨왔던 것이었다.
그냥 자루에 담은 것도 아니고 금제까지 걸어서 보내다니.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녀석을 보낸 듯했다.
“묵양, 한번 열어봐.”
자루에 묶여있는 밧줄을 푸니 분홍빛의 돼지가 쏙하고 머리를 내밀었다.
새끼 돼지였다.
돼지의 머리에는 옅은 금색으로 문신이 새겨져 있었는데, 육안으로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고 작은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돼지는 머리만 내민 채 주위를 살폈다.
벽옥빛의 눈에선 오만함이 흘렀다.
녀석은 킁킁거리며 주위의 냄새를 맡더니 이내 불쾌하다는 듯 한마디 했다.
“겨우 이런 곳에 데려다 놓는다고 본좌를 놀라게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비겁하게 굴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덤비거라! 본좌가 박살을 내주마!”
묵양은 무표정으로 녀석의 뒷목을 잡고 자루에서 완전히 빼냈다.
진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왠지 모르게 녀석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묵양, 녀석 좀 적당히 기절시켜줘. 육질 상하지 않게 조심하고. 아무리 그래도 식재료가 말을 하면 기분이 이상하잖아.”
묵양은 곧바로 손바닥으로 돼지머리를 내려쳤다.
빡-!
꽤 큰 소리가 울려 퍼지며 돼지는 그대로 눈을 뒤집으며 온몸을 부들거렸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기절하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묵양은 한 번 더 손바닥으로 녀석을 내려쳤다.
퍽-!
돼지는 그제서야 꽥-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축 늘어졌다.
진양은 흥미롭다는 듯 돼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끌끌 혀를 찼다.
아무리 못해도 법상의 경지를 가진 대요다.
‘태자 녀석, 생각보다 꽤 굵직한 녀석을 보냈군.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훌륭한 괴수를 그냥 잡아먹기엔 너무 아깝잖아.’
수고비로 특별히 보내줬는데 사양할 수는 없으니 일단은 받기로 했다.
가까이 다가가 살을 만져보니 상당히 튼실했다.
겉보기에는 덩치가 작아 보기인 했지만, 그건 아마도 몸에 걸려있는 봉인 때문일 것이다.
녀석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혈과 힘만 해도 지금까지 본 괴수 중엔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만약 기이 덩굴에게 먹인다면 극상품의 기이과 다섯 개는 족히 얻고도 남을 수준이었고, 탕을 끓인다면 용혈보탕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탕이 나올 수준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처리해도 처치 곤란이었다.
당장은 기이과가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미리 따놓는다면 금방 썩어 문드러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계속해서 덩굴에 매달아두는 수밖에 없는데, 공교롭게도 지금은 덩굴에 자리가 없다.
탕을 끓이는 것도 문제다.
지금 진양의 실력으로 녀석을 탕으로 만든다면 분명 재료만 낭비하고 말 것이다.
물론 녀석을 이대로 살려두는 것도 문제다.
언제 갑자기 봉인을 해제하고 원래의 힘을 되찾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만약 봉인이 해제된다면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척 보기에도 녀석은 범상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최양평에게 가져가자니 가는 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그것 또한 큰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죽여서 가자니 가는 도중에 기혈이 전부 다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귀한 재료에 손상을 입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한담…….’
한참의 고민 끝에 진양은 큰 솥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용혈보탕에 물을 조금 섞고 불을 올렸다.
물이 조금 데워졌을 무렵 진양은 기절한 녀석을 솥에 던져넣었다.
던져진 돼지가 물에 빠지려는 순간.
놈이 눈을 번쩍 뜨며 솥 벽을 향해 네 다리를 뻗었다.
녀석은 힘겹게 버티며 쉴 새 없이 눈알을 굴렸다.
이어서 묵양이 한 손으로 녀석을 건져내자 녀석이 말했다.
“어허, 사나이끼리 이런 방법은 점잖지 못하잖아. 풀어야 할 게 있으면 대화로 풀자고. 그리고 이 몸의 살에는 독이 있다고. 먹으면 곧바로 골로 갈걸!”
“독이 있다고?”
진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잘됐네. 혹시나 싱거울까 봐 조미료를 더 쳐야 하나 싶었는데. 자고로 아찔한 맛이 나는 음식이야말로 진정한 미식 아니겠어?”
“…….”
돼지는 초조한 듯 눈알을 굴리며 귀를 펄럭였다.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만난 듯했다.
무엇보다 상대는 지금 허풍을 떠는 게 아니다.
솥에 가득 들어있는 국물에선 지금껏 만났던 용의 후예 중 가장 강한 녀석에게 느껴졌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용의 기운이 느껴졌다.
용의 후예조차 잡아먹는 녀석이라니.
아니, 어쨌든 한시라도 빨리 상대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