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864
864화 전혀 말도 안 되는 얘기
대국공은 피식 웃으며 잔에 담긴 술을 모두 비웠다.
“똑똑하군.”
진양은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며 그가 쓰고 있는 모자를 가리켰다.
“이것만 아니었으면 널 죽이고 네 녀석의 행세를 하면서 돌아다녔을 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모자에 쓰여있는 ‘소인배’라는 글씨 덕분에 알 수 있었지. 넌 결코 네게 이득이 가지 않는 선택은 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네 법상으로 이루어진 책 속에는 수많은 공법들이 들어있었겠지. 그중에는 멀리서도 전음 같은 걸 보낼 수 있는 공법도 있었을 거야. 괴산에 눌러 앉아있는 동안 수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할 테니 말이야.
하지만 꽤 오랜 시간 정보를 주고받았음에도 정천사에서는 눈치조차 채지 못한 모습이지. 그 말은 곧 정보를 전달한 사람이 엄청난 고수고, 또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뜻이야. 하지만 그 수가 너무 적어. 이 정도로는 부족했을 테지.
이런 법상을 만들어냈다는 건 이런 식으로 정보를 얻는 게 완벽한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거야. 그러므로 너 같은 소인배가 비밀로 날 위협할 리는 없지. 특히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야.
너는 내가 너를 죽이길 바랐을 거야. 네 계획을 완벽하게 만들어주길 바랐지. 그리고 내 비밀을 들쑤시려고 했을 거고. 심지어 겁에 질린 내가 곤경에 빠져 발버둥 치도록 만들 생각이었어. 넌 죽기 직전 내가 완벽한 방법을 찾지 못해 분노에 빠진 모습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야.
너는 내가 다음 세대의 전도인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곧바로 그 사실을 알릴 수 있었을 거야. 맞지?
애초에 애매한 선택지라는 건 없었어. 결국 선택지는 단 하나. 널 죽이는 것뿐이었으니까.
내가 널 죽이지 않았다면 얼마 뒤 대영 사람들이 나타나서 널 죽였을 거야. 그럼 넌 반드시 죽었겠지. 그렇다면 결국 내가 직접 죽이는 게 낫잖아?
애초에 고민할 필요도 없는 간단한 문제였다 이 말이지.”
“하하하! 훌륭하군.”
대국공은 흡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비웠다.
“자네를 위해 건배하겠네. 뒤이어 나를 따라올 자네를 위하여 말이야. 난 먼저 가겠네. 늦지 않게 따라오시게나.”
진양은 잔을 비웠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난 죽지 않아. 나름의 방법이 다 있거든. 그리고 비밀? 이 세상에 비밀 따위가 있을 거라고 믿는 줄 알았어?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솔직히 말해 주지. 난 누군가 나의 비밀을 파헤쳐줄 사람을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심지어 때가 되면 내가 가진 비밀을 모두에게 공개할 준비도 모두 마쳤지.
그런데, 겨우 네 녀석이 내 비밀을 들쑤신다는 말 하나에 겁을 먹을 것 같아? 오히려 그렇게 해 준다면 나야 고맙지.
어쨌든 목숨은 붙어있어야 방법도 있는 법. 너처럼 이렇게 죽어버린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하하하! 이 몸이 어떻게 대처할지, 또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보지 못한다니. 내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도 모르고 죽게 되다니. 많이 아쉬운가?”
진양은 잔을 머리 위로 한번 들어 올렸다 내린 뒤 깔끔하게 비웠다.
대국공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진양이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그는 술잔을 든 채 차분하게 말했다.
“황천길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진양은 그의 잔을 대신 비워버리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말이 많군. 황천길은 무슨. 황천길에 오를 기회조차 없을 텐데. 그래도 잠시나마 날 즐겁게 해 줬으니 공짜로 성불 정도는 시켜줄게. 물론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말을 마친 진양은 곧바로 능력을 발동시켰다.
대국공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아무런 저항 없이 조용히 진양을 바라보았다.
습득 능력이 발동되며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대국공은 육신은 완전히 붕괴되어버렸다.
그리고 진양의 손에는 보라색 광구 하나와 하얀색 광구 하나가 잡혔다.
보라색 광구 안에는 예상대로 법상을 제련하는 법이 들어있었다.
마치 대국공이 법상으로 신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말이다.
상당히 쓸 만한 공법이긴 했지만 당장은 신문 때문에 살펴볼 수가 없었다.
이어서 하얀색 광구 안에는 한 폭의 그림이 들어있었다.
그림 정중앙에는 저택의 대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척 보기에는 상당히 부유한 집안의 저택이었다.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단서라고 할 만한 건 두 개뿐이었다.
문 앞에 두 개의 이수 석상이 놓여있었는데, 그것은 이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석상이었다.
대문 위에 걸려있는 편액에는 멋들어진 글씨체로 ‘백부(白府)’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꼼꼼히 그림을 살폈으나 특별한 건 없었다.
하지만 습득 능력을 통해 얻었다는 건 그만큼 대국공에겐 매우 큰 의미를 가진 그림이라는 뜻이다.
‘뭐, 언젠간 알아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진양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품속에서 검은 구체 몇 개를 꺼내 주변을 오염시켰다.
진양이 시신을 성불시킨 자리는 흠천보감에 새하얗게 나타난다.
눈에 너무 띄기 때문에 적당히 오염시켜주는 게 안전하다.
싸움을 벌인 건 묵양과 대국공이므로 누군가 이곳의 과거를 돌이켜보아도 크게 상관은 없다.
하지만 만일이라는 게 존재하는 법.
어떤 상황이든 안전한 게 가장 좋은 법이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온 진양이 의자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멀리 이도에서 불빛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대국공은 이미 소문을 퍼뜨렸을 것이다.
소문의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이 소식을 들고 자신을 공격해 올 사람 한 사람을 꼽는다면 주왕 한 사람뿐일 것이다.
대국공은 자신을 희생시켜가며 모든 판을 짜냈다.
주왕은 이로써 완전한 신분 세탁을 하게 되었다.
생각만 해도 열이 오르긴 했으나 당장은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주왕이 비밀을 가지고 자신을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해야 했다.
다만, 그가 이 비밀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아직 모른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을 때.
하늘에서 몇 줄기의 빛이 떨어져 내려왔다.
진양은 입을 삐쭉거렸다.
‘하여간, 빠져가지고들. 이도라면 코앞인데 반응이 이렇게 느려서야 되겠어? 영제가 충분히 강하지 않았다면 이 나라는 진즉 뿌리 채 뽑혀 나갔을 거야.’
이도에선 뒤늦게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분명 진양을 귀찮게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상대하기 귀찮았던 진양은 자리를 피하기로 결정했다.
“녀석들이 찾아오면 적들을 상대하느라 입은 상처를 회복 중이라고 전해줘.”
묵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누가 찾아오든 상관 없다.
설령 대영 녀석들과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그는 죽을 일도 없었고, 여차하면 진양을 데리고 탈출해버리면 그만이다.
진양이 자리를 피하기 무섭게 이도의 강자들이 저택 밖에 도착했다.
저택을 중심으로 방원 백 리 내는 안전히 초토화가 되어있었다.
유일하게 멀쩡한 건 진양의 저택뿐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진양의 저택이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소문이 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방금 이곳에서 두 고수가 싸움을 벌이던 중 한 사람이 죽은 것을 모두가 똑똑히 느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태자 운구 행렬에 참여했던 이들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죽은 건 전조의 대국공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어째서 진양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건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진양의 첩신호위가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대국공까지 죽일 정도일 줄이야.
무엇보다 법상 강자가 싸움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초토화된 범위는 고작 백여 리 남짓이었다.
멀리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는 묵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무런 피해조차 입지 않은 듯했다.
너무나도 멀쩡한 묵양의 모습에 이도에서 온 사람들은 오히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굳어있을 때.
정천사의 서정강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엔 마찬가지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묵양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떤 때도 지금처럼 엄청난 위압을 느끼지 못했었다.
“서정강이라고 합니다. 진 선생을 만나러 왔습니다. 혹시 대신 좀 전해주시면…….”
진양을 불러달라고 부탁을 하려던 그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일개 정천사 외후 주제에 대국공을 죽인 고수에게 심부름을 시키려 하다니.
이 얼마나 당치도 않은 일이란 말인가!
묵양은 서정강을 알아보곤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진양은 지금 상처를 입고 요양 중이오. 허나 잠시만 기다리시오.”
묵양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서정강은 한숨을 푹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구체에 의해 오염된 흔적이 뚜렷했다.
그러나 감히 묵양을 추궁할 순 없었다.
진양이 상처를 입었다고?
전혀 말도 안 되는 얘기였으나 겉으로는 티를 낼 수 없었다.
잠시 뒤.
멀리서 묵양이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저택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의자에 반쯤 누워 평화롭게 햇볕을 쬐고 있는 진양을 발견했다.
얼굴에 혈기가 돌고 있는 게 누가 봐도 상처를 입은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진 선생,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신 겁니까?”
일단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보단 안부부터 묻기로 했다.
“괜찮습니다. 그저 내상을 조금 입은 것에 불과하거든요.”
진양의 얼굴엔 귀찮음이 잔뜩 묻어났다.
아직 기능서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사실 서정강은 진양이 다쳤다는 말 자체를 믿지 않고 있었다.
저택이 박살 나지 않은 이상 진양이 밖으로 나와 대국공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묵양이라는 강력한 아군이 있는데 굳이 진양이 나설 이유도 없었다.
다쳤다는 건 그 누구도 상대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핑계를 댄 게 분명했다.
서정강은 그제서야 본론을 꺼냈다.
“진 선생, 괜찮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혹여나 지금 말씀하시기 불편하시다면 다음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진양은 한숨을 푹 쉬며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긴요. 대국공과 허공진경 전수자 사이에 일어난 의견 충돌로 내분이 일어난 거죠. 다만, 그 정신 나간 녀석이 갑자기 여기까지 찾아온 것뿐입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저도 잘 모르고요. 그리고 뒤이어 중상을 입은 허공진경 강자가 나타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쓰러지더군요.
대국공 녀석은 경지가 도궁까지 추락해버렸고, 머리에는 ‘소인배’라고 적힌 커다란 모자까지 쓰고 있더군요. 그래서 제 첩신호위가 간단하게 처치해버렸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더 이상 물으실 것도 없고, 물으신다고 하셔도 대답할 게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혹여나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사람을 보내 말씀해 주시지요. 그럼 곧바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더 깊게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왜 그런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는지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