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915
915화 배가 불러있었다
사흘이 지나고, 강제로 연화보전에 입문한 정의는 혼자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마치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결정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결단을 내리는 순간만큼은 매우 과감했다.
충문을 제거할 때는 오히려 한시라도 빨리 떼어내지 못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마치 변태처럼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순목이 나타나며 일어난 변화였다.
하지만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가 장정의가 만일을 대비하여 남겨둔 몸뚱이를 차지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계기로 장정의가 더 이상 사고를 치지 않게 된다면, 오히려 그게 더 어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양은 수하들에게 편지를 보내 몇몇 장소를 유심히 살피도록 했다.
특히 순목이 진양을 유인하려 했던 장소는 각별히 신경 쓰도록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순목이 아무 장소나 골라서 진양을 유인하려 하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엔 수낭 동굴이 있다.
정말로 진양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던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진양의 힘을 빌려 수낭 동굴을 살펴보려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한 번 진양을 주목하기 시작한 이상 그는 앞으로도 또다시 진양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진양은 수하들에게 그곳을 각별히 신경 써서 살피도록 했다.
누구든 그곳을 살펴보려고 한다면 곧바로 자신에게 알리도록 했다.
이 외에 장정의를 잘 지켜보고 있으라는 명령도 내렸다.
모든 일을 마친 진양은 곧바로 다시 대영으로 향했다.
최근 이도의 분위기는 한층 더 시끌벅적해졌다.
이제 슬슬 결과가 나올 때가 된 것이다.
황씨 가주는 비록 기회주의자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 처리 효율도 상당했다.
그는 영제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렇게 황씨 가문이 직접 움직이며 처음에는 가희가 태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던 자들도 하나둘씩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선 안 된다.
지지하는 쪽이 있으면 반대하는 쪽도 있어야 하는 법.
가희가 단시간 내에 의아할 정도로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면 오히려 영제의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물론 최종적인 결과가 영제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건 진양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며 나선다고 해도 결국 결정권을 쥐고 있는 건 영제 한 사람뿐이었다.
진양이 한창 이도로 향하고 있을 때.
이도에선 이제 막 조회가 끝난 상태였다.
영제는 가희를 따로 궁성 화원으로 불러들였다.
이곳에선 대영 신조 각지의 꽃과 식물들을 볼 수가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꽃과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만큼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의 수도 엄청났다.
때문에, 궁성 화원은 궁성 내에서도 가장 많은 인력이 투입되는 곳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영제조차 이미 오랫동안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가희 역시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이곳에 방문한 게 언제인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어렸을 적, 그녀는 자주 이곳에 와서 놀았었다.
차가운 분위기만 흐르는 궁성 내에서 유일하게 따사로운 햇살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실에 질려버린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마침내 다시 화원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소녀가 아름답게 핀 꽃을 향해 연신 말을 걸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기분이었다.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이 하루하루가 즐거웠던 어린 시절의 그녀의 모습이었다.
이후로도 영제와 가희는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화원을 걸었다.
두 사람은 화원 중앙에 위치한 정자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서로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영제가 마침내 먼저 입을 열었다.
“영아, 정말로 태자가 되고 싶은 게냐?”
잠깐의 침묵 뒤, 가희가 입을 열었다.
“폐하, 여인의 몸으로 태자가 되는 것은 부당한 것…….”
“아니, 짐은 그저 너와 편안하게 대화를 하고 싶은 게 전부다. 단지 네 생각이 궁금할 뿐.
궁중의 예법이나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은 짐의 결정에 달려있으니까. 그러니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다. 그저 네 마음을 솔직하게 짐에게 얘기해 주었으면 한다.”
가희는 또다시 한참을 침묵했다.
이어서 기어들어 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되고 싶지 않습니다.”
가희는 다소곳하게 손을 모아 영제에게 절을 올렸다.
영제의 눈에 복잡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내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무표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영제는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최근 벌어지는 상황을 조용히 눈여겨보고 있었다.
황씨 가문 사람들은 일부러 소란을 일으키며 수많은 이들을 선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영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조용히 그들의 이런 행위를 용납해 주었을 뿐이다.
황씨 가문은 결코 대제의 자리를 노릴 만한 인물들이 아니다.
영제가 건재하는 이상 황씨 가문은 결코 영제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대영 황실에 남아있는 인물 중, 유일하게 미래를 걸어볼 수 있는 사람은 대제희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대제희는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태자가 될 마음이 없다는 대답.
그것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었다.
당장 급하게 태자를 임명해야 할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현재 상황에서 태자로 임명할 만한 인물은 대제희가 유일했다.
대제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영제가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면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대답이기도 했다.
잔잔하던 영제의 마음에 누군가 돌을 던진 것처럼 물결이 일어났다.
현재 대제희가 갖춘 조건을 고려해 본다면 태자로 책봉하는 것도 크게 어려울 건 없다.
이 외에 크게 문제가 될 만한 것도 없다.
이제 얼마 뒤면 그는 직접 만년제에 참여하기 위해 이도를 떠나야 한다.
전조의 위협까지 모두 제거된 상황인 만큼 굳이 태자가 남아 이도를 지켜야 할 이유도 없었다.
대영 신조 최대의 위협 거리가 사라진 만큼 태자를 물색할 시간도 충분히 주어졌다.
사실 누가 태자가 되든 영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다음에 태자가 될 사람도 평생 태자로 남게 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영제가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는 이미 모든 걸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제희는 다르다.
아무것도 쥔 게 없는 상황에서 그녀에겐 태자의 자리에 오를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영제와 같이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 자리를 거부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영제는 모든 것을 쥐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다른 이들이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빼앗아갈까 봐 잔뜩 경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대제희를 태자의 자리에 앉혀놓는 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남매의 짧은 대화는 이렇게 끝이 났다.
몇 마디 나눴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짧은 대화였다.
영제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떠나기 전, 가희가 언제든 원할 때마다 화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 * *
진양이 다시 이도로 돌아온 순간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 대제희부에 도착하기도 전에 수많은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이 중 가장 먼저 날아온 것은 전씨 가문과 황씨 가문으로부터 날아온 초청장이었다.
그러나 진양은 초청창은 우선 내버려둔 채 대제희부로 향했다.
우선 가희와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대제희부 뒤편에 자리한 화원에 도착했다.
가희는 그곳에 쓸쓸하게 홀로 앉아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진양은 발걸음을 늦추었다.
겨우 며칠 못 만났을 뿐인데 그녀는 더욱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저 조용히 앉아있는 게 전부였으나 평온함 속에 녹아있는 무시무시한 위엄이 느껴졌다.
그녀는 천재다.
과거의 일로 발목을 잡히지만 않았더라면 아마도 도군에 가까운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한때 영제가 아무 이유 없이 그녀를 경계했던 게 아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영제의 본존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가희가 도군이 될 확률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경지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영제의 본존이 부재중인 상황 속에서 황실에 엄청난 고수가 탄생하다니.
여기까지 생각한 진양은 돌연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영제의 법신이 겁을 먹었단 뜻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그렇게 즐거워하는 거죠?”
어느새 가희가 진양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느긋한 말투, 달콤한 목소리.
전장에서 보여주었던 용맹하고 위엄 넘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냥 웃긴 일이 생각나서요.”
진양은 그녀가 앉아있는 정자로 올라가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았다.
“영제가 저를 불러서 묻더군요. 태자가 될 생각이 있느냐고요. 그래서 그럴 생각 없다고 대답했어요.”
가희는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듯,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며 말을 꺼냈다.
“정말 생각이 없다면 이만 물러나셔도 무방합니다.”
진양의 말에 가희가 고개를 들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말은 전혀 당신답지 않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별일 없었어요. 그냥 정의가 어느 순간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망설임 없이 해내는 걸 보고 나니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또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다시 이도로 돌아오는 내내 곰곰이 생각해 봤죠. 그리고 스스로 너무 배가 불러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전 제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저 모든 것을 스스로 정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게 전부였죠. 하지만 누군가 제 자유를 억압하기 시작한 순간,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어 상대를 짓밟고 다시 자유를 되찾아오는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 문득 소저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태자의 자리에 오르고, 종국엔 대제가 되는 것.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속박이나 다름없죠. 소저가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사실 소저 역시 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겁니다.”
진양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참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진양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가희는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눈썹이 올라가고,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배가 불러있었다니. 정말 적절한 표현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