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919
919화 윤제 본존과 영제 법신
진양은 조용히 사람들 틈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운을 다른 사람의 기운 사이로 완전히 감춰버렸다.
묘지로 들어온 녀석은 곰과 사자를 조금씩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은 채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예전에 현경사 비밀창고에서 봤던 바로 그 괴물 녀석이었다.
당시 진양은 실수로 녀석을 건드린 적이 있었는데, 맷집이 어찌나 좋은지 아무리 때려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무지막지한 녀석이었다.
다시 만나게 된 녀석의 몸집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은연중에 느껴지는 기운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그는 사방을 압도하는 힘을 아무렇지 않게 견뎌내고 있었다.
이건 보통의 존재가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진양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런 시기에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녀석을 보았던 곳은 현경사의 비밀창고다.
녀석은 도대체 전조 세력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속으로는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으나 겉으로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저 녀석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녀석이 아직까지도 예전의 원한을 기억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녀석이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건 분명 안에 중요한 볼일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냥 들어가게 놔두는 게 낫다.
괜히 녀석과 엮여봤자 좋을 게 없다.
다행히 녀석은 진양이 있는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도 않고, 조용히 묘지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묘지 내부.
좌시랑은 구름 위에 지어진 거대한 대전 앞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 엄숙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자신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삼배구고두를 한 뒤 조심스럽게 대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전의 대문이 스스로 열렸다.
그곳에는 위패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어서 거대한 두루마리가 펼쳐지며 지금과는 다른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좌시랑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곳에 들어온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를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본래 두루마리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에는 한 장의 산하도가 겹쳐져 있었으나, 이러한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산하도 표면에 새겨져 있던 봉인이 서서히 사라졌고, 은은한 빛이 피어올랐다.
이것은 진양이 새로 배운 공법이었는데, 허공진경 내에 들어있던 회피 신통력 중 가장 실용적이면서도 실용적이지 못한 것이었다.
어떤 물건이든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허공진경을 익힌 사람은 자신을 물건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숨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느끼기엔 그저 물건 그 자체가 전부다.
만약 물건의 크기가 충분히 크다면 위급한 순간에 신통력을 사용하여 치명적인 일격을 피할 수 있다.
마치 허공진경 전수자가 훼멸구가 폭발하는 순간 유일하게 훼멸구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 자신의 몸과 묵양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과 겹쳐 위기를 모면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강력한 곳일수록 겹쳐 들어가는 건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그렇다고 약한 곳에 숨어 들어가는 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재 진양의 실력으로는 묵양의 육신과 같이 강력한 곳으로는 숨어들 수가 없다.
하지만 봉인된 산하도를 또 다른 물건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숨기는 건 가능하다.
그렇게 묘지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건 성공했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봉인을 푼 뒤 전조 대제의 무덤으로 향하는 출입구가 열리고 힘이 방출되기 전까진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전까지는 이러한 변화를 숨길 만한 장소가 필요하다.
이에 가장 적합한 장소가 바로 멀리 보이는 대전이다.
만 년에 걸쳐 쌓여온 여러 기록들이 황실 묘지로 흘러들며 대영 신조의 기억으로 바뀌어 가는 순간이야말로 산하도가 모습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순간이다.
물론 산하도를 해안에 숨긴 채 직접 가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진양이 직접 간다면 온갖 영향이 모여드는 곳에 달려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갑자기 무슨 변고가 일어날지는 아무것도 예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진양은 이 자리를 좌시랑에게 양보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비록 이태현에 비해선 한참 부족한 수준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예부에 있었던 만큼 여러 방면으로 예부를 이끌어가기엔 적합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목표가 될 가능성이 낮은 곳인 만큼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진양이 직접 갔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산하도가 열리고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게 될 수 있게 되는 순간, 이들은 진양을 발견하자마자 그 어떠한 희생도 감내하며 우선적으로 진양의 목을 노릴 것이다.
결국 진양이 직접 나서는 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안을 선택한 것.
성공한다면 다행이겠지만, 실패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이 일은 그저 전조 세력의 음모로 치부될 것이고, 진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게 되니까.
두루마리가 펼쳐지자 대전 내의 힘이 움직였고, 두루마리는 대전 안으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첩된 공간에 숨겨진 산하도도 조금씩 일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진양은 곧바로 산하도에 걸려있는 봉인을 대다수 풀어버렸다.
바로 그 순간.
대전 내에 있던 두루마리가 파괴되며,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산하도가 두루마리 안에서 튀어나왔다.
정지되어있던 산하도가 다시 살아나며 멈춰있던 구름과 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운 세계의 대문이 열린 듯한 모습이었다.
이어서 대문이 열리며 산하도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짙은 죽음의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대전 앞에 엎드려 찾아올 기연을 기대하고 있던 좌시랑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느껴진 죽음의 기운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대전이 심하게 뒤흔들리며, 대전 내의 창문이 깨져나갔다.
그리고 새까만 구름처럼 짙은 죽음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하늘로 솟구쳤다.
콰과광-!
굉음과 함께 대전은 박살이 나버렸고, 새까만 죽음의 기운에 묻혀 완전히 모습을 감춰버렸다.
나무로 만들어진 산하도는 점점 더 몸집이 커져만 갔다.
대전이 부서지고 나니 죽음의 기운은 점점 더 많아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산하도는 본연의 위력을 완전히 뿜어낼 수 있게 되었다.
수천 리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이 펼쳐졌다.
그림에 나타난 건 더 이상 죽은 듯 멈춰있던 적막한 세계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거대한 입구의 중앙에 윤제의 무덤이 나타났다.
모든 죽음의 기운은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것은 비단 영제뿐만이 아니었다.
죽음의 세계에 있던 윤제 역시 엄청난 변화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제가 황금 갑옷을 두른 교룡을 타고 다가오자, 무덤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던 윤제의 본존도 더 이상은 잠들어있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관이 무덤에서 튀어 올랐다.
이어서 관뚜껑이 열리며 봉황이 새겨진 검푸른 장포를 입고, 얼굴엔 까만 복면을 쓴 윤제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몸에선 끊임없이 죽음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윤제의 복면이 바람에 의해 날아가며 얼굴이 드러났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모습이었으나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복면이 사라지며 그의 주위에선 다시 한번 강력한 죽음의 기운이 폭발을 일으켰다.
농후한 살기는 한곳으로 몰려들며 거대한 흑사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것은 영제를 태운 채 천천히 황실 묘지 쪽으로 다가왔다.
경계선을 넘어 대영 신조의 황실 묘지로 들어서려는 순간.
한 줄기의 황금빛이 날아왔다.
거대한 흑사는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렸고, 영제는 어느덧 맞은편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윤제의 본존은 영제의 법신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고, 이내 광소로 이어졌다.
“신조 대제에게 만년제 만큼 중요한 건 없지. 허나, 내가 명백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도 제군법신만 보내오다니. 보아하니 정말로 목숨을 잃은 모양이구나.
참으로 잘 되었구나. 다만, 네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구나.”
어쩌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궁금한 건 윤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순간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누가 자신을 불러내어 영제를 상대하게 만들었는지, 이를 통해 누가 이득을 보게 될지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이는 그에겐 둘도 없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누가 이런 기회를 주었고, 또 무슨 목적으로 기회를 주었는지는 상관없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영제의 법신을 죽일 생각뿐이었다.
영제가 손을 뻗자 천자검이 잡혔다.
그는 윤제의 본존을 마주하고도 평온한 모습이었다.
“본존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넌 이미 죽은 목숨이다. 직접 목을 바치러 왔으니 사양하진 않도록 하마.”
영제가 왼손에 옥새를 든 채 교룡을 박차 오르며 무언가 하려는 순간.
갑자기 곰과 사자의 형상을 닮은 이수가 나타나 교룡의 발을 물었다.
교룡은 결코 평범한 생명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수는 교룡의 발을 뜯어내 버렸다.
그리고 마치 일생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교룡의 몸을 미친 듯이 물어뜯었다.
영제가 눈을 부릅뜨니 황금빛이 번쩍였다.
빛은 무려 수십 리나 이어졌고, 빛이 지나간 자리에 있던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수는 멀쩡했다.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몸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녀석은 멀쩡한 모습으로 계속해서 교룡의 몸을 마구 물어뜯고 있었다.
“칙령!”
영제는 칙령을 사용하여 이수를 살펴보았다.
그의 표정이 천천히 찌푸려졌다.
“국운을 일개 외역의 이수 따위에게 맡기다니. 명을 재촉하는구나.”
“녀석은 불멸의 존재다. 게다가 모든 영력에 면역을 가지고 있지. 국운을 맡기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지. 녀석이 살아있는 한 대윤에 남아있는 국운의 씨앗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윤제는 큰소리로 웃었다.
그는 이 기회를 틈타 죽음의 세계를 벗어났고, 곧장 황실 묘지로 넘어왔다.
황실 묘지로 들어서는 순간 대영 신조의 강력한 힘이 온몸을 압도했다.
지금으로서 당장 윤제를 막을 수 있는 건 대영 신조의 국운으로 만들어진 교룡뿐.
그러나 녀석은 윤제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교룡은 연신 분노로 가득 섞인 포효를 내뱉어댔다.
그러나 거대한 덩치로는 빠르게 오가는 이수를 제압할 수가 없었다.
영력과 신력(神力) 모두 먹히지 않았다.
유일하게 먹히는 건 순수한 힘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수를 쓰러뜨리는 건 상당히 역부족이었다.
영제는 윤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또다시 칙령이 발동되며 필중의 검이 윤제를 향해 휘둘러졌다.
거대한 초승달이 날아와 윤제를 밀어내는 바람에 윤제는 다시 죽음의 세계로 밀려나고 말았다.
초승달이 사라지기도 전에 천자검이 두 세계의 경계선을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윤제의 심장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