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946
946화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만법지서만 있다면 혈맥의 각성을 이루지 않은 자들도 충분히 이어나갈 전승이 생기게 된다.
이런 식으로 분파를 이어 내려가다 보면 운 좋게 강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
상황이 좋지 않으면 환해를 봉쇄하고 그곳에서 수천 년 동안 잠수를 타는 방법도 있다.
지금으로선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환해 일족이 환해를 믿고 대담한 일을 벌이는 건 이미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어디서부턴가 윤제에 대한 소문도 돌기 시작했다.
윤제의 법신이 뜬금없이 대영 신조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영제에게 참살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가 죽게 된 가장 큰 원인이 환해 일족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윤제는 환해 대장로와 함께 손을 잡고 움직이고 있었다.
때문에,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대영 내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모두 사실로 통하고 있었다.
환해 일족의 명성은 이미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을 정도로 바닥을 쳤다.
윤제의 법신을 속여 죽게 만든 일, 대영의 신임 대제 등극 대전에서 윤제와 손을 잡고 대제를 암살하려 했던 일, 그리고 대연 태자의 만법지서를 들고 도망친 일까지.
연달아 세 개나 되는 신조를 배신한 것이다.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중간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환해 일족은 대황 내에 발조차 들이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죽고 싶어도 그렇지, 이 정도로 일을 벌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쨌든 환해 일족은 대황 내에서는 배신의 대명사로 굳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진양은 동해로 떠날 채비를 했다.
더 이상 진양이 전쟁터에 남아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니, 애초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
후방에선 가희가 전술 전략을 세우고 있었고, 전방에서 싸우는 장수들은 등극 대전을 통해 대연 신조의 장수들보다 한 단계나 더 강화된 상태다.
아무리 오합지졸을 이끌고 싸운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패배하는 게 더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 * *
어느덧 보름이 흘렀다.
진양은 흑피와 돼지를 데리고 동해로 향했다.
그리고 해구 부근에서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연나 일족과 합류했다.
연나 일족에선 꽤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우선 무리를 이끌 두 사람으로 지난번 만났던 백발의 노인과 나송이 보였다.
나송은 실질적인 가주였기 때문에 위험한 곳에 모험을 나갈 수는 없다.
현재 연나 일족은 단시간 내에 또다시 가주를 잃는 위험을 감당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양은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노인에게 먼저 포권을 취했다.
“가주님,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번 나백과 함께 만났을 때도 만나긴 했으나 당시 그는 외모를 바꾸고 있었다.
때문에, 일부러 상대의 신분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그저 모르는 척하며 넘어갔다.
잠시 서로 안부를 주고받고 있을 때.
갑자기 검은 배 한 척이 해수면 위로 떠올랐다.
진양이 유령호를 부른 것이었다.
수낭 동굴 탐험에 흑피와 돼지를 모두 데리고 갈 순 없다.
데리고 가봤자 짐만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을 유령호에 맡겨두기로 한 것.
예전에 장해에게 얻은 첨탑 하층부는 현재 유령호에 보관되어있다.
그곳에선 수많은 영식(靈植)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양이 너무 많아 처치 곤란할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흑피가 배불리 먹으며 편하게 지내기엔 충분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선수에 누군가 있었다.
파란색 곱슬머리, 아직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빵빵한 얼굴.
한 소녀가 그곳에 선 채 신나게 진양을 향해 손을 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양 아저씨!”
백리칠은 멀리 진양을 발견하기 무섭게 팔을 벌리며 달려들었다.
진양도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날아온 그녀를 받아주었다.
“너, 또 몰래 빠져나온 거지?”
“몰래라뇨! 이번에는 할머니한테도 얘기했다고요. 교황 삼촌도 허락해 주셨는걸요.”
백리칠은 진양의 목에 매달린 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저씨, 점점 더 맛있는 냄새를 풍기시네요.”
백리칠은 진양이 잠시 주의를 판 사이에 재빨리 머리를 깨물었다.
다만, 세게 깨물지는 않았다.
한 번 깨물어 본 뒤, 그녀는 팔짱을 끼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도 갈수록 단단해지는 것 같아요.”
연나 가주는 자상한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송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가주가 막아섰다.
진양과 백리칠의 대화가 모두 끝나고 나서야 가주가 다가와 포권을 취했다.
“소공주님을 뵙습니다.”
백리칠도 그들이 포권을 취하는 것을 따라 하며 인사했다.
이어서 연나 가주의 시선이 진양에게 향했다.
“진 선생, 수낭 동굴이 열리기까진 아직 시간이 조금 더 남았으니 먼저 이걸 살펴보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건 그동안 저희가 수집했던 자료이니 아마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겁니다.”
진양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백리칠과 함께 유령호로 갔다.
진양이 먼저 자리를 뜨자 연나 가주와 나송은 다시 자신의 비주로 돌아왔다.
그 모습에 연나 가주는 감탄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교인 황족의 소공주가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되어 진양에게 구출되었다는 말은 진작 소문으로 들었지만, 꽤 오랜 시간을 같이해서 그런지 두 사람 사이가 꽤 깊어 보이는군.
게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 명의 고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네. 과연, 소공주는 교황의 총애를 받는 사람답게 가볍게 볼 사람이 아닌 듯하군.
자네, 앞으로 진양과 최대한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게나. 진양과 신임 대제가 버티고 있는 한 대영은 족히 수만 년 동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확실히 우리 연나 일족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대영으로 이주하는 게 훨씬 더 이득일 듯하구만.”
나송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 사람이요?”
“그래, 세 사람. 어쩌면 내가 눈치채지 못한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네.”
가주는 무덤덤하게 대답하며 나송을 힐끔 쳐다보았다.
‘역시, 가주 후보로 올리기엔 부족하단 말이지…….’
* * *
유령호 선원들은 못 본 사이에 살이 잔뜩 올라있었다.
기운까지 넘치는 걸 보니 그동안 꽤 잘 지내고 있었던 듯했다.
그런데, 유령호에 오르기 무섭게 또다시 돼지가 발작을 했다.
멀지 않은 곳에 퍼질러져 있는 잔뜩 살이 찐 검은 강아지를 보곤 입맛을 다시기 시작한 것이다.
녀석의 몸에선 자신도 모르게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흑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곁눈질로 돼지를 한 번 쳐다보며 가소롭다는 듯 피식 콧방귀를 뀐 것이 전부였고, 진양을 바라보며 인사를 하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녀석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잠들어버렸다.
돼지 녀석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말이다.
“또 사고 치려고!”
진양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돼지를 발로 뻥 차버렸다.
사나운 소리를 내며 으르렁거리던 돼지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흑구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진양은 흑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조심해야겠다. 그나저나 어쩌다 살이 이렇게 찐 거야? 이대로 계속 찌다간 제대로 걷지도 못하겠어. 세상에, 살이 얼마나 쪘는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잖아! 이러다간 단명할 거라고…….”
진양은 돼지와 흑피를 데리고 선실 안으로 들어왔다.
흑피는 익숙하게 길을 찾아 먹을 것이 있는 선실로 가버렸다.
홀로 남은 돼지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대인, 보아하니 이상한 동물을 키우는 취미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진룡의 혈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당나귀의 혈맥도 가지고 있고, 또 당나귀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기괴한 녀석도 그렇고, 거기에 개인지 돼지인지 정체를 모를 덩어리도 그렇고.
게다가 그 녀석, 대인을 보고 아는 척도 않더군요. 보아하니 제대로 길들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 그냥 삶아서 먹어버리는 건 어떨까요?”
“응?”
진양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그러니까 흑구 녀석을 솥에 넣고 삶아버리라는 거야?”
돼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괜한 소리를 했구나!’
“주인도 못 알아보는 개는 당장 삶아 먹어야죠.”
“주인도 못 알아보는 돼지 녀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진양은 한마디로 녀석의 말문을 틀어막아 버렸다.
‘이 녀석도 슬슬 흑화해가고 있군. 뭐든 보면 전부 다 솥에 집어넣자고 하다니 말이야.’
진양은 한동안 유령호에 머물며 백리칠과 시간을 보냈고, 선원들과도 그동안 미뤄두었던 여러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약속했던 날이 되었다.
진양은 슬슬 떠날 준비를 했다.
사실 묵양은 처음부터 별로 가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수낭 동굴 내부에 향사와 관련된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그곳은 자신에겐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고 한참을 떠들어댔다.
하지만 진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을 해안 안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곳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묵양을 두고 갈 리는 없다.
* * *
진양은 연나 일족의 사람들과 함께 곧바로 해구 안으로 향했다.
대략 해저 만 장 깊이까지 들어왔을 때.
연나 일족의 한 사람이 절벽을 향해 붉은 향을 꺼내 피웠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던 절벽에 상당히 오래된 듯한 나무 문이 나타났다.
피어오른 향은 나무 문 근처를 맴돌았고,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연나 일족의 사람들은 안으로 향했다.
진양도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진양의 뒤통수에서 무언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건 잔뜩 작아진 백리칠이었다.
백리칠은 진양의 머리카락 사이로 머리를 빼꼼히 내밀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백리칠과 놀아줄 때, 진양은 그녀를 해안 안으로 들여보내 닭과 검둥이와도 만나도록 해 주었다.
물론 녀석들과 단독으로는 만나지 못하도록 엄격히 감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검둥이와 닭 두 녀석은 이미 전과가 있는 녀석들이다.
사실 백리칠이 먼저 원하지 않았다면 진양은 절대 먼저 녀석들을 만나게 해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현재 검둥이는 조용히 해안에 퍼져있던 자신의 힘을 숨긴 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숨어있었다.
그리고 진양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왔다.
“난 그냥 그 아이가 혹여나 또다시 위험한 상황에 처할까 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공법 몇 개를 알려준 게 전부인데. 그 녀석이 그걸 전부 다 익혀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이게 내 탓이냐고!”
“당연히 네 탓이지.”
닭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세상에 천재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모르고 있던 네가 멍청한 거지.”
검둥이는 순간 발끈하긴 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 녀석에 비하면 우린 전부 바보나 다름없어. 나만 해도 그래.
가신(假身) 징표를 익히는 데만 해도 팔십 년이나 걸렸었다고, 난 무려 팔십 년이나 수련하고 나서야 간신히 남의 몸에 몰래 징표를 남길 수 있게 되었었는데, 그 녀석은 설명만 듣더니 곧바로 익혀버렸잖아.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