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952
952화 신용은 지켜야 하는 법
장정의는 베틀이 놓인 부유섬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한구석에 착지했다.
붉은 핏자국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옷감과 함께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었다.
베틀에서 멀어진 운하경사는 다시 노을과 하얀 구름으로 바뀌었고, 희미하던 핏자국도 찢겨나간 순목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다만, 순목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베틀이 있는 곳이 아닌 또 다른 새로운 세계였다.
고요한 세계 가운데 갈기갈기 찢긴 살점이 나타났고, 그것은 곧장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잠시 후.
살점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목의 머리가 만들어졌다.
머리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부터는 살점이 모여드는 속도가 훨씬 더 빨라졌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살점이 모여들며 하나로 합쳐졌고, 완전한 순목의 모습을 이루었다.
순목은 눈을 뜨고 주위의 환경을 살폈다.
그리곤 배를 잡고 세상이 떠나갈 듯이 큰소리로 웃었다.
“진양, 네 녀석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보았던 베틀이 곧장 종점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베틀이 종점으로 향하는 지름길인 건 사실이다.
다만, 그것은 시녀가 주인을 위해 남겨둔 지름길인 만큼 완벽하게 베틀을 다뤄야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일 뿐.
물론 이건 살아서 종점에 도달하고 싶을 때의 얘기다.
순목처럼 죽어서 도착해도 상관이 없다면 그냥 베틀 안으로 뛰어들어도 무방하다.
옷을 주워입은 순목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 정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원형 나무 문이 설치되어있었는데, 문 앞에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장미석수(長尾石獸) 두 마리가 있었다.
문에 그려진 그림을 본 순목은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둔세향 하나를 꺼내 들며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것은 진양이 만들었던 둔세향과는 다소 다른 색을 가진 둔세향이었다.
“힘들게 연나 일족까지 숨어들어가서 둔세향을 훔쳐온 보람이 있군.”
정상에 올라 둔세향을 피우는 순간.
순목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현재 서 있는 산 너머로 수많은 봉우리들이 대지에 펼쳐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각 봉우리에 똑같이 생긴 나무 문이 세워져 있었다.
대충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천 개는 될 듯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뒤로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의 나무 문이 펼쳐져 있었던 것.
당황한 순목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 * *
같은 시각.
장정의는 정상적인 노선을 따라 두 번째 부유섬에 도착했다.
숲 근처로 다가온 장정의는 최근에 입수한 정보를 꺼내 들어 살폈다.
그리곤 숲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상한 힘이 느껴졌다.
분명 앞으로 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던 것이었다.
길을 걷는 도중 영이 깃든 옷들이 걸어 다니는 것을 발견했으나 그들은 장정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반대로 장정의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훈향을 포함한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하얀 바탕에 수많은 대나무와 문자가 수놓아진 장삼을 발견했을 때.
장정의는 사력을 다해 외쳤다.
“잠깐만! 내가 고쳐줄게!”
이어서 장정의의 몸에서 진양에게 받은 바늘과 실이 떠올랐다.
그러자 나무 뒤로 사라졌던 장삼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조심스럽게 장정의를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장삼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장삼에 새겨진 수많은 대나무 중 가지가 하나 새겨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내가 고쳐줄게! 이것 봐. 이건 수낭께서 사용하던 바늘과 실이거든. 분명 고칠 수 있을 거야!”
장정의는 최선을 다해 녀석을 설득하려고 했다.
이건 어렵게 잡은 기회다.
절대 놓칠 순 없다.
장정의는 그동안 진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적과 비경을 탐험했다.
때문에, 이런 곳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은 진법 같지 않은 진법이 깔려 있는 숲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진법 실력으로는 진법의 정체를 알아내거나 돌파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지 않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곳의 규칙만 찾아내면 충분히 통과가 가능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각자 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옷들은 사실 진법을 이루고 있는 진안들이었다.
옷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곧 진법이 끊임없이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장정의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장정의는 금세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진안을 사용하여 이곳을 통과하는 방법이다.
이곳의 진안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 말은 곧 진안이 자신을 돕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홀로 함정을 헤쳐나가던 것에 능숙한 장정의에겐 다소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운 좋게 옷 하나를 붙잡을 수 있게 되었다.
어렵게 낚아 올린 고기를 순순히 놓아줄 순 없었다.
마침 진양에게 받은 바늘과 실은 전부 수낭 동굴에 있던 물건이다.
게다가 이것을 무기처럼 다룰 수 있는 보전까지 익혔다.
기예가 다소 모자르더라도 충분히 희망은 있었다.
장삼은 흥미가 생겼는지 장정의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나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은색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장정의는 실과 바늘을 이용하여 옷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미완성된 자수를 빠르게 복원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어려울 것도 없다.
그냥 원래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비슷하게 완성시키면 그만이니까.
잠시 뒤.
복원 작업을 마친 장정의는 한숨 돌리며, 장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리곤 흡족스럽다는 듯 큰소리로 웃음소리를 냈다.
“어때? 꽤 괜찮은 솜씨지? 무엇보다 이건 수낭께서 사용하던 실과 바늘이라고. 원래 새겨진 자수보다 훨씬 더 좋은 재료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좋을 수밖에. 게다가 원래 새겨져 있던 자수와도 전부 이어놨지.
앞으로는 실이 삭아버릴까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설령 삭아버린다고 해도 자동으로 회복될 테니까.
어때? 만족하지? 그럼 이제 날 다음 공간으로 데려다줄래?”
장삼은 아무 말 없이 장정의의 손에 들린 실과 바늘을 바라보았다.
장정의의 말이 맞다.
그가 들고 있는 실을 원래 새겨져 있던 자수와 이어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동화(同化)되며, 그의 말대로 삭아버린 실들도 자동으로 복원이 된다.
그런데, 자수를 다 새겼는데도 불구하고 실 끝은 여전히 녀석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리고 옷에 새겨진 자수는 이미 녀석이 들고 있는 실과 동화가 시작되었다.
장삼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젠 도망가고 싶어도 너무 늦고 말았다는 사실을.
만약 여기서 도망을 쳤다간 장정의가 곧바로 실을 뽑아버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껏 새겨놓은 자수는 전부 사라져버릴 것이다.
심지어 원래 옷에 새겨져 있던 자수도 전부 순식간에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살아왔지만, 이토록 황당한 방법으로 옷을 위협하는 인간은 장정의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은 훈향 등을 이용하여 옷을 달래는 쪽이었다.
심지어 옷들은 그것이 마음에 들어버리지 않으면 마음대로 발로 차버리기까지 했다.
예전 같았으면 분한 마음에 자수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눈앞에 있는 녀석을 죽이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며칠 전에는 눈앞에 있는 녀석보다 훨씬 더 심한 녀석이 나타났었다.
살기로 가득 찬 갑옷을 불러낸 것도 모자라 그것을 굴복시키고 데려가기까지 한 것이다.
자신보다 강한 자도 고개를 숙였으니, 자신이라고 숙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뚱땡이 녀석의 손재주는 확실히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재료가 좋았다.
생각을 마친 옷은 양쪽으로 열리며 장정의가 자신을 입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제서야 장정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어떻게든 해결이 됐으니 다행이군.’
장삼을 입은 장정의는 장삼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며 숲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마침내 나무 문 앞에 도착했다.
장삼은 계속해서 나무 문을 향해 걸어갔다.
늘 하던 대로 자신을 입고 있는 사람을 다음 공간으로 보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장정의가 갑자기 실을 확 잡아당기는 게 아닌가?
“뭐 하는 거야? 누구 이마에 혹 만들 일 있어?”
장삼은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해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요망한 녀석이네. 기껏 아까운 재료까지 써가며 고쳐줬더니 감히 날 해하려고 들어? 좋게 말할 때 문 여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험악한 꼴을 보게 될 테니까.”
장삼은 장정의의 몸에서 떨어져나왔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마치 살아있는 사람이 하듯 문 앞에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잠시 뒤.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장정의는 그제서야 잡고 있던 실을 끊으며 장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수고했어. 아무리 상대가 정괴라곤 하지만 그래도 신용은 지켜야 하는 법이지. 망할 우리 사형은 때려죽여도 모르는 게 신용인데,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지 의문……. 크흠, 뭐. 이런 얘기는 네게 해도 못 알아듣겠지.”
장정의는 손을 흔들며 나무 문 너머로 사라졌다.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장정의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대한 옷감들이 줄지어 걸려있는 모습, 그리고 그 아래 드러난 새까만 대지.
자세히 보니 이따금 한 번씩 반짝이는 빛을 뿜어내는 곳도 있었다.
장정의는 지면으로 내려와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일단 거대한 옷감에서는 매우 위험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이런 걸 여기 걸어둔 거지? 빨래를 말리는 곳인 건가?’
다만, 확실한 건 이곳에 걸려있는 옷감들이 전부 수낭 동굴 안에 있는 옷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쯤 되니 장정의는 손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장정의는 조심스럽게 천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결인을 맺으며 그것을 걷어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어쩔 수 없이 온갖 방어 공법을 모두 펼친 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손을 내밀기 무섭게 그의 손이 무서운 속도로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방어 공법도 멀쩡했고, 진원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엄청난 위력을 지닌 맹독이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덮쳐온 것이다.
맹독은 피를 타고 빠르게 온몸을 타고 퍼져나갔고 그의 팔은 어느새 새까맣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곧이어 장정의는 지면 위로 털썩 쓰러졌고 곧바로 숨이 끊어졌다.
한참 뒤.
장정의의 몸에서 보랏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장정의는 훅- 하며 숨을 내쉬며 다시 정신을 차렸다.
장정의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허공에 걸려있는 옷감들을 바라보았다.
“아쉽군. 눈앞에 좋은 보물을 두고도 포기해야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