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995
995화 복장이 터질 거 같다
“인간 중에 진 은공과 같이 깊은 사려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진 대왕의 말씀이 맞습니다. 함께 싸웁시다!”
“진양 만세!”
이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양은 됐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들이 진양을 떠받드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족은 인간과는 매우 다른 개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종족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한 녀석을 구해주었는데 녀석은 감사한 마음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그건 그 종족이 태생적으로 아무런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양은 다소 유감스럽긴 해도 녀석이 정체불명의 기운에 의해 이성을 완전히 왜곡 당하기 전에 성불시켜주었다.
진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족들은 한층 더 격앙되어갔다.
“다들 잠시 제 말씀 좀 들어주십시오!”
이족들은 그제서야 조용해졌다.
“다들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여러분들은 추격수에게 제 발로 찾아갔다가 사술에 걸린 것입니다. 복수를 하는 건 좋지만 이대로 그냥 달려든다면 또다시 스스로 함정에 빠져드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우선 재정비부터 하고 다시 힘을 모아 한 번에 녀석을 쓰러뜨려야 합니다.
벌떼처럼 몰려들어 전부 죽는 것보단 확실하고 안전하게 하는 게 나은 법. 그러니 일단 다들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혹여나 일족 내에 사술에 걸린 사람이 더 있다면 제게 데려오시면 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 것이니 언제든 찾아오시지요.”
진양은 격앙된 이족들을 전부 진정시키고 진법 밖에 풀어주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족들은 모두 떠나기 전 진양에게 자신의 종족의 신물을 주었고, 진양은 그것을 잘 챙겨놓았다.
물불 가리지 않고 어디든 뛰어들겠다는 등 이족의 말은 전혀 믿지 않았다.
각 종족마다 각자의 관습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법.
별 볼 일 없는 작은 일이라면 이족들도 흔쾌히 나서서 도와주겠지만 목숨이나 일족의 운명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물론 진양 역시 괜히 그런 부탁을 하며 난처한 상황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들을 구해 준 가장 큰 목적은 추격수의 음모를 막아내기 위해서다.
추격수는 이족 강자들을 동원하여 순천사 거점을 습격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을 희생양으로 만들고, 이족과 순천사들이 은원을 맺도록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진양은 이들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을 사술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이로써 추격수의 계획을 크게 틀어버리게 되었다.
물론 살려준 이족들이 허공 궁전을 공격할 거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추격수 일족은 앞으로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골로 가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추격수를 따르던 추종자들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아마 이번 사건이 잠잠해지고 나면 한동안 순천사들은 한가로워질 것이다.
반대로 외층 공간의 이족들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진법 안으로 발을 들인 것이 느껴졌다.
진양은 곧바로 그곳으로 날아갔다.
실체화된 살기가 검은 피처럼 뿜어져나오고 있는 혈란, 그녀가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그녀의 곁에는 그녀와 함께 전투에 나섰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진양은 멀리서 혈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쪽은 모두 해결됐습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세 개의 역금자탑을 재건해야합니다. 이곳에 있던 역금자탑이 무너졌다는 건 남은 역금자탑에도 손을 써두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니까요. 한시라도 빨리 부수고 다시 짓는 게 좋을 겁니다.”
“월란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곳을 지켜주세요.”
혈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있었다.
그녀는 힘겹게 말을 꺼낸 뒤 혈해와 함께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혈란이 떠나고 나자 모두들 진양에게 몰려왔다.
“진 선생,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도록 하죠. 일단은 방어선 재건이 우선입니다.”
진양은 우선 진법을 유지하여 방어선에 생긴 구멍을 막도록 했다.
이어서 역금자탑이 모두 재건되고 나서야 진법을 거두었다.
진양이 헐어버린 역금자탑을 연구해 보고 싶다고 하니 혈란은 흔쾌히 허락해 줄 뿐만 아니라 아예 역금자탑을 통째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방어선 재건은 완료되었고 외부에선 더 이상 아무런 공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온한 날들이 이어졌다.
이족의 모습은 털끝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순찰을 나갔던 순천사는 외층 공간의 이족들이 서로를 향해 칼날을 겨누며 싸우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고 돌아왔다.
게다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날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 * *
혈란의 방.
어느새 완전히 회복된 혈란은 탁자에 앉아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이번 일로 인한 손실부터 전투가 벌어진 내부적 이유, 외부적 이유, 그리고 각종 통계까지.
모든 내용이 적힌 보고서였다.
한편, 이번 일로 큰 피해를 본 주작의 얼굴은 아직까지도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법상이 파괴되며 입은 피해는 결코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혹여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현재 그녀는 봉인된 상태다.
주작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언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죽여주세요.”
주작을 바라보는 혈란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지금까지 주작을 자신의 후계자라고 생각하며 키워왔다.
설령 이번 일이 주작의 본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미 일어난 결과가 있기 때문에 조용히 덮고 지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 일로 진법사와 적란이 희생되었다.
출전 사장 한 사람과 방어선을 관리하는 핵심 사장 한 사람이 죽었다.
이로써 팔 대 사장 중 둘이나 되는 공석이 생긴 것이다.
여기에 주작까지 희생시킨다면 공석은 셋으로 늘어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진양이 극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사술에 의해 이성이 왜곡된 이족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이 서로 싸우도록 만들었다.
만약 진양이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현재 순천사의 힘으로 몰려오는 이족을 막아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기까진 모든 것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주작에 대한 처분뿐이었다.
아무 처벌도 내리지 않을 순 없다.
규칙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눈앞에 벌어진 결과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대로 주작을 죽이자니 난처한 건 마찬가지였다.
“언니, 저를 죽여주세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주작은 다시 한번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진한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때,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양이 달려들어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당장 고개 들어요!”
주작은 따귀를 맞고도 가만히 있었다.
또다시 따귀가 날아올 수도 있었지만 전혀 피하려는 생각이 없는 듯 무릎을 꿇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고개 들라니깐요! 그리고 직접 봐보세요.”
진양은 씩씩거리며 또다시 따귀를 날렸다.
“죽은 진법사와 적란이 당신만 바라보고 있는 거 안 보이나요? 이미 상황은 다 해결되었는데 언제까지 혼자 빠져나오지 않고 있을 생각이죠?
이대로 죽으면 모든 게 끝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입니다. 똑똑히 기억하세요. 진법사와 적란은 당신 때문에 죽은 겁니다.
죽여달라고요?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죽이는 걸로 간단히 해결된다면 이 세상에 남아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죽긴 뭘 죽어요. 끝까지 살아야죠. 억울하게 희생된 두 사람의 몫까지 착실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이루지 못 한 일들을 대신 이뤄주고, 원통함을 풀어줘야죠. 죽을 땐 죽더라도 우선 해야 할 일부터 마쳐야죠.
이게 무슨 꼴입니까? 잔뜩 겁먹은 메추리 새끼처럼 추하기 짝이 없군요.
불패의 신화를 이뤄낸 제일 사장이 겨우 이런 일로 죽음을 바라다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똑똑히 기억하세요. 이 일은 결코 끝난 게 아닙니다. 당신은 결코 죽을 자격이 없어요. 당신의 목숨은 당신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진양은 계속해서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조금씩 주작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고, 이내 그녀는 바닥에 엎드린 채 대성통곡을 했다.
수십 년간 생사를 함께 해온 동료와 자매가 죽었다.
낯선 이 하나 없는 거점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동고동락했다.
불패의 신화를 이뤄낸 주작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속으로 밀려드는 고통을 도무지 견뎌낼 수가 없었다.
진양은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계속해서 보고 있으면 복장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 *
며칠 뒤.
황작이 술 단지 하나를 들고 씁쓸한 표정으로 찾아왔다.
“진 선생, 주작 누님께서 축출되셨습니다. 앞으로 평생 거점으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하더군요. 아마 다시 대황으로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
“잘 됐군요. 근데 왜 그런 표정입니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일 아닙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말로 할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져서 말입니다. 물론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지만요.”
“그만 술 한잔 마시고 잊도록 하시죠. 이러나저러나 마음이 불편한 건 매한가지. 어쨌든 잘 풀렸으니 그걸로 된 겁니다. 자, 마십시다!”
* * *
대황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여전히 수리 중이었다.
그동안 적들도 보이지 않았고 순천사들도 모두 각자 수련에 전념하고 있었다.
진양은 무료함에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습관적으로 이어오던 수련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경지가 이미 힘의 양과는 아무 상관 없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필요한 건 양적인 부분보다는 질적인 부분을 개선해야 한다.
현재 수련의 최우선 목표는 백옥 신문에 대해 깨닫는 것이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
지름길을 찾아갈 수도 없었고, 사자결을 발동한다고 하더라도 단축되는 시간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게다가 깨달음이 어느 정도 경계를 벗어나면 오히려 백옥 신문을 강화시킬 때도 있었다.
백을 내어주고 팔십을 가져오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사자결을 발동하면 생각하는 속도뿐만 아니라 반응도 빨라진다.
순식간에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만큼 더욱 많은 걸 깨닫게 된다.
사자결을 오랜 시간 발동하면 많은 양의 기혈을 소모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한동안 멍해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때문에 사자결을 사용하여 백옥 신문을 깨달은 생각은 진작 포기한 지 오래다.
사실 급할 건 없다.
이제 겨우 백 살에 불과한데 벌써 도궁 경지에 올랐다.
이 정도면 대황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다.
어차피 남는 건 시간이니 천천히 깨달아가도 나쁠 건 없다.
생각 정리를 마친 진양은 곧바로 순천사 기록 보관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기록과 서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