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997
997화 살아있다는 뜻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지요. 제 첩신호위가 지금쯤이면 강풍층을 뚫고 대영에 도착했을 겁니다. 물건을 보내면 제게 신호를 준다고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진양은 사력을 다해 순천사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는 묵양의 실력을 믿었다.
묵양은 결코 강풍층에서 허무하게 죽을 만한 녀석이 아니다.
하지만 황작은 아니다.
그의 실력을 코앞에서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뜻밖의 행운을 만나는 게 아닌 이상 그는 열이면 열 무조건 강풍층에서 죽게 될 것이다.
강풍층은 단순히 잠깐 견딜 수 있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묵양처럼 오랜 시간을 버텨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결국 죽게 되고 만다.
강풍층에서 대황까지의 직선거리는 수십만 리.
그러나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피해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족히 수백만 리는 건너야 한다.
강풍층에서 죽음을 맞이한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단순히 능력이 부족해서 죽은 게 아니다.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하는 바람에 버티지 못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보였다면 굳이 말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뻔히 알고 있는데 가만히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아무 의미 없이 목숨을 던지느니 차라리 힘을 아껴두었다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방비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렇게 사력을 다해 순천사들을 설득하고 있을 때.
진양의 머릿속으로 분신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진양의 표정이 굳어졌다.
묵양이 분신을 때려죽인 것이다!
‘이런 미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분신을 함께 보낸 건 외층 공간 거점에서도 소식을 받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묵양은 아무 말 없이 분신을 그냥 죽인 것이다.
‘설마 소식을 전달해달라는 걸 이런 뜻으로 알아들은 건가?’
당장 화가 치밀어올랐으니 별다른 수가 없었다.
지금은 화를 내는 것보다 모두를 말리는 게 우선이었다.
“다들 진정하세요. 방금 막 물건을 전달했다는 소식을 받았어요.”
진양은 끝까지 강풍층으로 가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황작의 입을 탁- 막아버렸다.
“황작, 경지 돌파를 하고 싶으면 조용히 폐관이나 하세요. 연체 수도사에게 돌파의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죠? 이대로 개죽음당하는 것보단 법신 연체 수도사가 되어 순천사에 보탬이 되는 게 훨씬 더 이득일 겁니다.”
“정말로 전달한 건가요?”
혈란이 물었다.
“물론이죠. 물건은 무사히 전달했고 이미 이도 근처에 있는 저택에 도착해 편히 쉬고 있다고 하네요.”
진양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얼른 수련하러 가라며 황작을 쫓아내 버렸다.
황작이 떠나고 난 뒤.
진양이 혈란에게 물었다.
“소저,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이 방법만 있으면 앞으로 귀찮게 직접 살생계를 펼치실 필요도 없고, 순천사 역시 대응하느라 쩔쩔맬 필요 없을 겁니다.
아마 순천사 전체의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 아닐까 싶네요.”
“뭘 하려는 거죠? 설마 밖으로 나가겠다는 건 아니죠?
이족이 얼마나 타종족에게 배타적인지는 잘 알 겁니다. 그러니 이족을 포섭하려는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을 겁니다.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니까요.”
“포섭할 수 없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호적인 관계 정도는 맺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정도는 노력해 볼 만하잖아요.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요.
최근 외층 전장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추격수와 관련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녀석이 이 사건들을 이용해 음모를 꾸미는 것보단 제가 이제 막 쌓아둔 우호 관계를 이용하여 오히려 일을 꾸미는 게 훨씬 더 순조롭고 쉬울 겁니다. 적어도 몰래 움직일 필요 없이 당당하게 일을 꾸밀 수 있다 이거죠.”
혈란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진양이 막아섰다.
진양이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전 소저가 상당히 존경스럽습니다. 제게 이런 형편 없는 곳에서 지내라고 한다면 아마 며칠도 못 버티고 도망쳤을지도 모르거든요. 무엇보다 소저께서 거점 사수에 대한 책임을 다하시는 모습을 보고도 제가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잖아요.
오해하진 마세요.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전부 저 스스로를 위해서 그런 겁니다. 그동안 파란 하늘을 못 본 지 너무 오래돼서 말이죠. 가끔 일광욕도 그립고요.
전 그저 한시라도 빨리 추격수 녀석을 끝장내버리고 마음 놓고 돌아가서 늘 그렇듯 편안한 삶을 즐기고 싶을 뿐입니다.”
따뜻한 햇살도 없고, 푸른 하늘도 없고, 하얀 구름도 없고, 따사로운 바람조차 불어오지 않는 삭막한 외층 공간.
이젠 보고만 있어도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심지어 대다수의 장소에는 공기조차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시각각 진원을 운용하여 몸을 보호해야만 했다.
물론 도궁 수도사들에게 이 정도의 기력 소모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진양은 한시라도 빨리 모든 일의 원흉인 추격수를 처치하고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일단 다행인 점은 묵양이 무사히 이도에 도착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소식을 제대로 전하지도 않고 분신을 죽이는 바람에 언제 다시 통로가 열리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저 막막하게 통로가 열리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조치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당분간은 더 기다려야만 한다.
막힌 통로를 다시 뚫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한편, 외층 전장의 이족들은 박이 터지도록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싸움의 구도는 세뇌에서 벗어난 이족과 추격수의 앞잡이 이족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사이 벌써 각 진영마다 하나의 종족이 멸족을 당했다.
하지만 정확히 누가 어떤 식으로 벌인 일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정황상 추격수가 벌인 일은 건 확실했다.
단지 그가 어떤 방법으로,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었을 뿐.
진양은 직감적으로 이번 일이 여기서 이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고 나니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을 쉽게 무시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모른 척하고 조용히 넘기고 싶어도 그동안 수많은 일들을 통해 직감이 틀린 적이 없다는 게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실증을 느끼고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것도 어쩌면 직감이 보내는 신호일 수도 있다.
위험을 감지하고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진양은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고, 이곳에 가만히 앉아 불안에 떠는 것보단 차라리 나가서 뭐라도 하는 게 마음이 놓일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진양은 폐관하는 척하며 분신을 남기고 혈란 외에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채 조용히 거점을 빠져나왔다.
진군으로 이루어진 방어선을 지날 때.
사방에 검은색으로 채워진 허공이 진양을 맞이했다.
앞뒤조차 구분되지 않는 이곳은 순천사 거점보다 훨씬 더 기분 나쁜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불안함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렇다면 직감적으로 느껴지던 불안함과 위기는 전부 순천사 거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째서 가장 안전해야 할 거점에서 그런 기운이 느껴진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 * *
비주를 타고 한참 허공을 가른 끝에 지난번에 방문했던 섬에 도착했다.
그러나 수만 장이나 뻗어있던 거대한 대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남아있는 건 크고 작은 운석 비슷한 조각들이 전부였다.
작은 건 손톱보다도 훨씬 더 작았고, 큰 건 백여 리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부서진 조각은 한곳에 모여 마치 강처럼 고요한 허공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한때 수많은 이족과 거대 괴수, 그리고 소수의 마두와 천마왕이 살고 있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 그 어디에서도 생명체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애초부터 생명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진양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뻗어 자신의 앞으로 지나가는 큼직한 돌덩이를 집어 들었다
돌덩이를 살펴보니 이곳에서 대략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얼마 전에 이곳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던 듯했다.
게다가 꽤 많은 인원이 참여한 듯했다.
그러나 대부분 실력이 강한 자들은 아니었다.
만약 황작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괴력에 의해 파괴된 것이라면 이렇게 큰 조각이 나올 리는 없다.
다만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는 크게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진양은 들고 있던 돌에 진원을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능력을 발동하여 그것을 습득했다.
그다음 흑옥 신문을 열어 돌을 던져넣었다.
진양은 계속해서 비주를 움직이며 눈앞에 보이는 돌이란 돌은 전부 주워 흑옥 신문에 던져넣었다.
마치 쓰레기를 수거하듯 말이다.
어디서 비롯된 대지의 조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허공에서도 완벽히 보존되는 것으로 보아 예사로운 물건은 아닌 듯했다.
이미 쓸 만한 자원은 모두 털리고 없었지만 진양에겐 대지 조각 자체가 귀한 자원이었다.
얼마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처럼 수만 리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를 이루고 있었다면 연화시킨다고 하더라도 가져가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잘한 조각으로 나뉘어진 상태라면 전부 가져가는 것도 어려울 건 없다.
대신 조금 고생을 해야겠지만.
도궁이 스스로 변화를 일으키며 흑옥 신문으로 들어온 돌조각을 재료로 삼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흑옥 신문에 던져넣은 대지의 조각들을 하나로 조합하여 폐허 도궁의 지반으로 삼아도 되기 때문이다.
지반 없이 건물만 홀로 둥둥 떠있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어색했다.
물론 핵심 지역에는 약간의 폐허가 남아있긴 했지만.
* * *
진양은 눈에 보이는 돌이란 돌은 죄다 연화시키고 쓸어 담았다.
작업이 거의 다 끝나갈 즘.
마침내 진원으로 뒤덮고도 연화가 되지 않는 돌이 발견되었다.
대략 일 장 정도 되는 크기의 돌이었는데 다른 돌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운석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진양은 우선 진원을 세밀한 그물의 형상으로 펼친 뒤 검 한 자루를 꺼내 돌을 쪼개기 시작했다.
이렇게 쪼개낸 돌은 진원으로 감싼 뒤 곧바로 습득을 시도했고, 아무 문제 없이 연화가 되면 흑옥 신문에 던져넣고 계속해서 돌을 쪼갰다.
그렇게 마지막에 주먹만 한 작은 돌 하나가 남게 되었다.
습득할 수 없는 돌이었다.
조심스럽게 돌을 깎아나가다 보니 비늘무늬가 가득한 달걀 모양의 돌이 남게 되었다.
영화를 일으켜 잡다한 것들을 모두 태워버리고 나니 비늘무늬가 한층 더 선명해졌다.
진양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그것을 살폈다.
비늘무늬는 마치 비늘이 겹겹이 쌓이며 만들어진 것 같은 형상이었다.
습득이 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주인이 있는 물건이거나, 혹은 생기를 지닌 물건이라는 뜻이다.
깊고 드넓은 대지 속에 오랜 시간을 박혀있었던 만큼 주인이 있는 물건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돌이 살아있다는 뜻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