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46
정신을 차린 다음에는 재빨리 다 씻어 내고 침구도 전부 말아서 다른 방에 가져다 두었지만 그 냄새가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법으로 혹시 없앨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아슬란은 왜 제 냄새를 없애야 하나며 으르렁거렸다.
‘어서 빨리 지워야 해.’
그렇게 생각하며 급히 침대 옆에 있는 향로에 불을 붙였다. 그다음 향로의 옆에 놓여 있던 향료를 한 움큼 집어 뿌리자 곧 방 안에는 기분 좋은 향이 퍼졌다. 그리고 재빨리 창문을 더욱 활짝 열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나는 옆으로 다가온 아슬란에게 부탁했다.
“일단 지금은 돌아가 주세요.”
밖에 라트반이 기다린다는 것 말고도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이벨리나가 그와 한 거래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다리 안쪽에 새겨진 자국으로 이벨리나의 성력을 빼앗아 가는 이가 누구인지도 알아내야 했다.
그렇게 창가로 아슬란을 떠밀었건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왜 돌아가야 하지? 이제 겨우 그대를 안았어. 그대의 배 속에 내 새끼가 들어설 때까지 나는 쉬지 않고 박을 거야.”
“…….”
놀랍도록 저렴한 아슬란의 단어 선택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는 사이 바깥쪽에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라트반의 걸음 소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며 입 안이 바싹 말라 왔다.
아슬란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다물렸다. 그는 내가 다른 자들을 신경 쓰며 그를 내보내려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 라트반입니다!”
라트반답지 않은 다급하고 큰 목소리였다. 그가 이곳에 다다르면 다시 신관이 와서 말을 전하리라 생각한 나는 라트반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그래서 더욱 힘을 주어 아슬란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돌아가….”
“가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는 그의 모습에 울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곧 문이 열리고 라트반과 신관들이 들어오면 나는 아슬란을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평범한 남자였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벨리나인 내가 예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침실에 다시 남자를 끌어들였다 말해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아슬란은 아니야.’
누가 봐도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 것이다. 마법사라는 것도 아주 쉽게 알아차릴 것이고 아슬란 스스로가 자신이 누군지를 말해 버릴 것 같기도 했다.
‘그건 곤란해!’
성녀가 대신전에 마력을 쓰는 마법사를 들였다는 게 알려지면 이건 골치 아픈 수준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된다.
‘거기에 새끼니 뭐니 그런 소리까지 하면….’
그때부터는 내가 수습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게 된다.
‘아슬란을 어떻게 돌려보내지?’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나는 조금 전 아슬란이 내 무릎에 제 머리를 얹고 애교를 부리듯 비벼 대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나를 제 암컷이라 불러 대었던 것도.
‘일단 이 위기를 넘기려면 어서 그를 달래서 돌려보내야 해.’
나는 잠시 생각한 다음 그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높이 있는 그의 목을 감았다. 그런 내 행동에 아슬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동요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며 나는 있는 힘껏 다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슬란.”
그러자 그는 홀린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슬란은 제 손을 들어 내 손을 덮었다. 그러고는 더 해 달라는 듯 제 얼굴을 비벼 대었다.
“아슬란, 난 성녀예요. 대신전의 사람들에게 곤란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어요. 당신의 목적을 무탈하게 이루고 싶다면 내가 좀 더 편하게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한 나는 검지손가락을 세워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이 그의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해 줘요. 알겠나요…?”
그리고 회심의 말을 덧붙였다.
“…내 수컷.”
내 입에서 그 단어가 흘러나온 순간 아슬란의 숨이 멈춘 것이 보였다. 크게 뜨였던 그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지며 부드럽게 휘었다. 그 눈매에 담긴 달콤함에 놀란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아슬란의 팔이 내 허리를 감쌌다. 무슨 일인가 생각할 틈도 없이 나를 제 품에 끌어안은 그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박았다.
곧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깨물었던 목 위를 눌러 핥는 뜨거운 혀의 느낌도.
“흐읏!”
하루 사이에 그에게 익숙해진 몸이 멋대로 신음 소리를 뱉었다. 그 소리를 황홀하다는 듯한 얼굴로 듣던 아슬란이 곧바로 창틀을 밟고 올라섰다.
“다음 주에 다시 오겠다. 그동안 나를 받을 준비를 더 하고 있기를 바라.”
아슬란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그가 사라진 순간, 문이 열렸다.
***
“두 분께 심려를 끼쳐 미안하군요.”
“…….”
“…….”
필사적으로 웃으면서 말을 건넸는데도 라트반과 레온의 표정은 한겨울의 들판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역시… 알아차린 거겠지?’
억지로 웃음을 짓느라 얼굴이 욱신거릴 정도이다.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던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식은땀이 흘렀다.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얼마 전, 그와 보냈던 밤이 생각났다.
‘아슬란하고 비교해 보면 확실히 부드럽고 잘 대해 줬….’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비교하고 있었던 거지?
순간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내가 멋대로 이용한 사람을 마음속에서 비교까지 하고 있다니.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레온 황태자를 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미안해요.”
그 말에 황태자의 얼굴이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내 중얼거림을 듣고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기를 반복했다.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워 보였다. 잠시 후, 겨우 평정을 찾은 얼굴이 된 황태자는 옆에 있던 라트반을 보더니 말했다.
“오늘은 라트반 경과 선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약속하지 않고 이렇게 불쑥 찾아온 제가 물러나는 것이 맞겠지요.”
생각보다 쉽게 나온 물러나겠다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황태자는 그다지 좋지 못한 기분일 것이다.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떠나고 싶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슬란이 자국을 남기고 간 목덜미를 다시 손으로 쓸었다.
아슬란은 문밖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남자인 것을 알고 일부러 이것을 보란 듯이 남긴 게 분명했다. 황태자를 바라보자 역시나 그의 시선이 내 목덜미를 향해 있었다.
‘경멸하겠지.’
관계를 맺고 난 후에 그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매일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꽃 같은 간단한 선물을 보내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황태자에게 나는 아무런 거부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날의 일을 사과하고 그를 멀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황태자와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연결된 끈을 남겨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 언젠가 닥쳐올 미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끝났네.’
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한 것을 알고서도 황태자가 나에게 계속해서 접근할 것 같진 않았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필이면 최악의 방법으로 관계가 끊길 줄이야….’
이제 황태자는 대신전을 떠날 테고 1년 후, 이리스가 나타나면 그녀에게 갈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게 책의 내용대로 다시 흘러가는구나,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태자가 허리를 숙였다.
“대신에 성녀님께서 편하신 날에 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네? 대화?”
그가 경멸의 말 한마디를 던지고 곧바로 방을 나설 거라 생각했던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꼭 약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유난히 약속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는 황태자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습게도, 황태자가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이 기뻤다. 레온이 나를, 경멸하지 않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기쁠 수 있다니.
황태자는 그런 나를 보더니 어느새, 평소와 같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럼 성녀님의 편지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후 빠르게 방을 나갔다. 나는 그가 나간 문을 보면서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아닌데….’
황태자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책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그가 나와 잔 사실을 어떻게든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이라 믿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은 마치 그와 나의 관계가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무척이나 싫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내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라트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네? 아, 네.”
그가 무엇이 괜찮냐고 묻는 건지를 깨닫고 나는 슬쩍 목을 가렸다. 황태자도 황태자였지만 라트반 역시 이상했다. 그 역시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무척이나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 중에 혐오와 경멸은 없었다.
‘…차라리 욕을 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하겠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두 사람의 반응에 나는 더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
다행히 라트반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
“검술은 배우고 싶다고 바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호신술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지요. 오늘은 기본적인 것들만 설명해 드릴 생각입니다.”
내 처소 안쪽의 넓은 방으로 간 다음, 그는 자신이 들고 온 길쭉한 것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천으로 감싼 형태를 보자마자 무엇인지 짐작이 되었다. 역시나 천을 풀자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목검이 있었다.
“목검이군요.”
검술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진검을 가져올 거라 기대했었던 탓일까. 내 입에서는 나도 알아차릴 정도로 실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