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2_3
“식사가 아직이라면 가게에 들러 주시겠어요? 오늘 그레타 양이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를 구울 예정인데.”
어떡하지 닉시. 어떡하긴 우린 이미 틀렸어, 무덤 자리나 준비하자. 닉시와 길버트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저 선생님! 제, 제가 선생님께 하, 할 말이 있, 있어요.”
“네?”
올 게 왔단 생각에 닉시와 길버트가 짜기라도 한 듯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순식간에 길바닥엔 라울과 그레타만이 남게 되었다.
무대에 오른 한 쌍의 주인공들이었다.
아직 상황을 이해 못 한 라울이 멀뚱히 주윌 두리번거렸다.
“저. 저, 저는…….”
그레타가 어렵사리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과연 고백할 수 있을까. 길버트가 걱정 반 근심 반 어린 시선으로 둘을 바라봤다.
“차라리 잘 됐어. 원래 먼저 치는 사람이 싸움에서 이길 확률이 높다잖아.”
“사랑은 싸움이 아냐, 닉시…….”
이렇게 된 이상 먼저 고백을 갈겨 버리는 게 더 유리할지 몰랐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레타의 고백이 충격으로 끝나게 된다면 그 뒤에 이어질 강렬한 첫사랑이 라울에게 뭐라고 하든 덜 충격으로 다가올 테니까.
그 여인이 찾아온 이유가 그 얼마나 충격적인 이유인진 몰라도 말이다.
닉시가 아까 봤던 아몬드 나무 밑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밀크티색 머리칼의 남자도.
―부스럭.
“아.”
‘어라? 내가 왜…….’
영문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그 탓에 손에 쥐고 있었던 편지가 부스럭거렸다.
라울이 제게 잘못 왔다며 준 편지였다.
‘뭐지. 약 제조 의뢰선가.’
닉시가 구겨진 편지를 탈탈 털었다.
그리고 수신인에 적혀 있는 알파벳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부대에서 사용했던 비즈네르 암호로 적힌 문자. 필립이 보낸 편지였다.
닉시가 봉투를 급히 뜯었다.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내용의 마침표까지 읽은 닉시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고갤 들었다.
그 시선 끝에 라울이 있었다.
라울이 제 앞에 서 있는 그레타를 바라보았다.
늘 제 앞에 서면 얼굴을 붉혔던 소녀.
어지간히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얼굴 색과 떨리는 목소리. 수줍게 지어진 미소가 뭔지 모를 수 없었다.
‘당분간 마을 어르신들에게 엄청 혼나고 놀림 받겠구나.’
드디어 마을 사람들에게 묻히는 날이 왔다는 것을 직감한 라울이 애석한 미소를 지었다.
“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그레타 양. 저는…….”
그때, 라울의 시선에 어떤 사람의 인영이 들어왔다.
그는 멍하니 그 실루엣을 바라봤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걸음걸이. 낯익은 모자. 제 쪽을 향해 달려오는.
“……선생님?”
“서, 선생님. 저, 저는……”
라울은 홀린 듯 눈앞의 소녀를 스쳐 지나갔다.
해를 살짝 가리고 지나가는 그림자에 그레타가 고갤 들었다.
일순간 그레타의 올리브색 눈에 그늘이 졌다. 섬세하게 다듬었던 유리 같은 마음이 깨져 생기는 실금 같은 그늘이었다.
“라울!”
“선생님? 여긴 대체 어떻게…….”
라울은 제게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잘못 봤나 싶었다. 하지만 다가올수록 선명해지는 모습은 분명히 환상이 아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제…….
“너, 너……!”
―팟!
라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이 라울의 가슴팍에 뭔가를 던졌다.
구겨진 신문이었다.
“대체 뭐 하고 다녔길래, 스파이로 수배 중인 거야!?”
여인의 몸이 파르라니 떨렸다. 라울은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제가요?”
신문 1면.
그곳엔 고 적혀 있었다.
“스파이요?”
라울의 신분증 사본과 함께.
* * *
“신문에 네 이름이 걸려 있어.”
라울의 바 안. 라울의 옛 라틴어 선생이라는 여인은 테이블 위에 신문을 올려 두었다.
얼떨결에 바 안에 함께하게 된 길버트와 벤자민, 그레타가 숙연하게 신문을 바라보았다.
“나도 처음엔 동명이인인지 알았단다. 근데 그 신문엔 네 옛 거주지랑 생년월일이 함께 적혀 있었어. 내가 너랑 처음 만났던 곳에, 네 생일이랑 똑같은 네 이름을 가진 사람. 이게 네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라는 거니?”
신문의 자극적인 타이틀을 바라보던 벤자민이, 옆에서 제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손길에 고갤 돌렸다.
‘잠깐, 나와 봐.’
닉시는 입 모양만 벙긋거리며 가게 밖을 가리켰다.
파리와 스파이 혐의를 받게 된 바텐더.
왠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던 화가가 도살장에 끌려가듯 닉시의 뒤를 따랐다.
바의 뒤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닉시가 벤자민에게 조용히 말했다.
“필립이 편지를 보냈어. 네가 떨어트린 라울의 신분증을 경관들이 주웠다고.”
“역시 그랬군.”
벤자민이 마른세수했다.
“하필 나치 잔당이 있다고 주시하던 곳에서 소동이 일어났었잖아.”
“그랬지. 네 눈물겨운 동창회.”
“이제 걔들이랑은 절교했거든. 아무튼!”
닉시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의심하던 곳에서 그런 소동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나치 잔당의 소행이라 여겼겠지. 근데 거기 떨어져 있는 신분증이면 당연히 의심을 살 거 아냐.”
“반대로 함정이라 의심하지 않나? 스파이라는 녀석들이 제 꼬리가 밟힐 만한 걸 그렇게 허술하게 잃어버릴 리 없잖아.”
“그래. 어디 사는 화가처럼 허술하게 잃어버릴 리 없지.”
말 한마디 했다가 괜히 처맞은 벤자민이 입을 벙긋거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억울하긴 했지만 잃어버린 건 사실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었다.
“근데 거기 내 절연한 동창 놈이 붙잡혔나 봐.”
닉시는 방금 펼쳐본 필립의 편지를 떠올렸다.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증거로 신분증을 들이밀고 있으니, 아무리 필립이나 제키라고 해도 일을 덮진 못할 것이다.
신분증이 오래된 거라 사진이 낡아서 잘 보이지 않고, 거주지가 라울이 오베르에 살기 전 거주지로 기재돼 있던 건 다행이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라울이 스파이 혐의로 몰려서 감옥에 가게 될 거야.”
직접 군대에 몸담았던 닉시는 잘 알고 있었다. 오베르에 탱크가 들이닥치는 건 시간 문제라는 것을.
물론 그렇게 붙잡혀 간다 해도 라울은 금방 풀려날 것이다. 그저 바를 운영했을 뿐인 선량한 시민이니까. 게다가 파리에는 얼씬도 하지 않은, 그야말로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올 사람.
그러나 이 사건에 그녀가 속했던 부대가 끼어 있다면 말이 다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명 높은 23사단. 악마들의 집합소.
그러니까 털면 피와 치아 몇 개는 나올 수도 있었다는 말이었다.
닉시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난 일단 필립한테 상황을 전달하러 갈게. 파리에 갔을 때, 걔한테 직통으로 회신할 수 있는 비밀 연락처를 받아줬거든. 넌 라울한테 이 상황을 말해 줘. 최대한……”
“네가 군인이라는 건 빼고?”
“정답.”
가장 급한 것은 이 사건이 지금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알아보는 일이었다.
필립이 보낸 우편이 도시에서 가장 빨리 오는 우편이라면, 눈 때문에 편지가 늦게 도착한 것을 감안해도 벌써 한 달.
한 달쯤이면 이미 파리에서는 검문이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오베르 근처에 가장 가까운 전화기가 있는 곳은 옆 마을의 우체국.
닉시는 옆 마을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마을 광장으로 달려갔다.
―달칵.
벤자민이 닉시와 말을 끝냈을 땐, 바텐더 일행의 분위기가 많이 진정되고 난 다음이었다.
벤자민은 길버트 옆의 빈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작게 자른 치즈를 먹던 길버트가 아는 체했다.
“오셨어요, 벤자민? 닉시는요?”
“화장실.”
“어…… 집에 가야 할 정도래요?”
길버트의 말에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중요한 건 농부의 행방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어떻게 말을 꺼내는가’ 하는 것.
벤자민은 자신의 등장에 본능적으로 저를 주목하게 된 네 쌍의 눈들을 애써 무시했다.
‘깊게 고민해 봐야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면 한시라도 빨리 말하는 게 낫겠지.’
그는 옅은 심호흡 하듯 길게 숨을 들이켜곤 입을 열었다.
“라울.”
“응?”
“이 사건.”
―톡톡.
벤자민이 테이블 위 신문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네 쌍의 눈이 절로 신문으로 향했다.
“내가 파리에서 네 신분증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생긴 문제…… 같더군.”
“어?”
잠시 엄청난 침묵이 몰아닥쳤다. 이제야 ‘다 괜찮을 거예요!’라고 분위기를 끌어올렸던 마을 이장의 노력이 처참히 무너졌다.
점심을 먹으러 왔던 매튜 할아버지조차 분위기를 파악하고 다음에 오겠다며 나가버렸다.
긴 침묵 끝에 라울이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벤자민 네가?”
“응. 이 사건. 나 때문이라고.”
길버트는 어디선가 뭔가 부서지는 소릴 들었다.
그곳에는 유리컵 하나를 부서져라 쥐고 있는 그레타가 있었다.
길버트는 재빨리 그레타의 손에서 컵을 빼앗아 감자 하나를 쥐여 주었다.
그것은 곧장 메쉬 포테이토처럼 되었다.
“아하…….”
“아하가 아니잖아 라울. 대체 어떡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여인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반박했다.
보통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파리에서 신분증 하나 떨어트렸다고 하루아침에 스파이가 되어 있다는 것.
하지만 길버트와 라울은 슬프게도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독일인이었으니.
“하아…… 벤자민, 혹시 나를 네 동료로 밀고한 건 아니지?”
“아냐.”
“그럼, 네 상관이었다고 밀고했다거나……?”
“밀고 같은 거 안 했어.”
“그럼 설명해 줄래? 왜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
라울의 말에 벤자민이 그날 기억을 되짚듯 미간을 좁혔다.
* * *
닉시는 곧장 우편배달부 대니스의 자전거를 뺏어 마을 근처의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피, 필요한 게 있으시나요?”
“허억, 헉……. 후……. 전화 좀 쓸게요.”
전속력으로 달려와 후들거리는 다리를 하곤 닉시는 안내원의 손짓을 따라 전화가 있는 곳으로 갔다.
편지에 적힌 암호 같은 숫자를 누르길 잠시. 보통의 전화 발신음관 다른 묵음 처리된 신호 대기음이 울렸고, 상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장 전화를 받았다.
―닉.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스파이라니……! 닉시가 이를 꽉 깨물곤 조용히 읊조렸다.
―그거야말로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현장에 신분증을 떨어뜨렸다는 말은 없었잖아.
“내가 분실물센터야?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게?”
수화기 너머로 필립의 골치가 아프다는 숨소리가 들렸다.
―일단 여긴 신분증의 범인이 파리에 없다고 결론 내렸어. 곧 신분증에 적힌 거주지를 뒤지러 갈 거야.
필립이 차분하게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설명했다.
라울의 신분증에 거주지로 적힌 곳은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맞닿아 있는 남동쪽이었다.
오베르부터 말을 타고 꼬박 하루를 이동해서 기차로 갈아타, 네 시간은 더 가야 하는 거리.
멀긴 했지만, 그곳에 라울이 오베르에 살고 있단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끝장나는 것이었다.
도저히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필립, 네가 라울의 신원을 보증해 주면 안 되는 거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되잖아.”
―그럼 혐의는 풀릴지 몰라도, 닉시 네가 어디 있는지 대령이 알게 될 텐데. 그분의 신원을 보장한다는 건 즉, 너랑 내가 만났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말이니까.
그거야말로 오베르로 탱크가 들어오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닉시는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고뇌를 눈치챈 건지 필립이 입을 열었다.
―……상황을 무마시킬 방법이 아예 없진 않아.
“뭔데.”
―근데 네가 좋아하는 방법은 아냐.
“지금 좋은 거 싫은 거 가릴 처지가 아니잖아.”
수화기 너머로 서류들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파리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건 불법 마약이야. 라텐 지구에서 암암리에 유통되던 약이 수면 위로 드러나 버렸으니까. 나치 잔당이 도시의 혼란을 위해 그 약을 풀었다고 의심받아서 수사에 더 열을 올리는 상황이고.
필립의 말에 닉시는 파리에서 만났던 제 소꿉친구의 몰골을 떠올렸다.
어떤 싸구려 약인지 몰라도, 부작용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달고 다니면서 제게 약의 제조법을 알려 달라고 굽실거렸었지. 저는 거절했고.
―근데 그 약. 16년 전쯤인가. 라텐 지구에서 한번 유행했던 약과 유사한 복제품이라고 하더군. 그때도 국가적으로 문제가 돼서, 아버지가 라텐 지구를 단속했던 게 기억나.
필립이 말했다.
16년 전. 닉시, 그녀가 시궁창의 쥐새끼로 살 무렵이었다.
한순간에 그녀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내가 만들었던 약의 모조품이 다시 돌아다닌다고?’
“……그래서?”
여러모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특히나 약이랑 관련된 일이라면 닉시에게 더더욱.
―네가 그 약의 치료제를 만들어. 그럼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거야. 치안은 안정될 거고, 그 약을 유통하거나 만든 놈들은 차차 색출해 내면 되니까.
“…….”
―너라면 할 수 있잖아.
필립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듣고 있어, 닉시?
할 수 있냐고? 할 수 있고말고.
화학 천재인 닉시에게 그런 일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거기다 제가 고작 열한 살에 만들었던 약을 본뜬 조잡한 합성품에 불과한 약이라면 더더욱 쉬웠다. 이미 분자 구조는 알고 있는 셈과 다를 바 없으니.
하지만.
[이걸 네게 넘겨주는 일도 없을 거야.]노엘 휴거.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닉시가 목숨줄인 것처럼 소중하게 쥐고 있던 약통을 가져가면서 그렇게 말했다.
닉시는 흙과 기름때 범벅인 지저분한 몰골로 씩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좆 까.]“알겠어. 만들게 치료제.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니까.”
―철컥.
닉시는 대답을 듣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놨다.
* * *
다시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 오베르로 돌아왔을 땐, 화가가 바텐더에게 상황 설명을 끝낸 뒤였다.
닉시가 소매치기를 당했는데, 하필 거기에 신분증이 들어 있었고, 하필 그 소매치기 범인들이 나치 잔당과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는 저렴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결과가 이렇게 되어 버린 상황에서는 믿기 힘들어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나라에 약을 판 파렴치한 매국노가 된 상황. 라울은 슬픈 눈으로 컵을 닦았다.
“마을 밖에선 저를 잡으려고 안달이라니. 저의 죄는 외상값을 갚으라고 독촉한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라울의 스승님이란 여인이 그를 위로했다.
“괜찮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겠지.”
“그렇겠죠. 파리 경관들이 한가한 사람들도 아니고.”
라울의 눈빛에서 강한 신뢰의 빛이 느껴졌다. 오랜 스승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했다.
라울과 스승이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돈독한 사이를 과시할수록, 카운터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그레타가 점점 작아졌다.
길버트는 잔뜩 주눅 들어 있는 그레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레타의 고백 때문에 마을이 망하나 싶었는데, 그것보다 더 큰 일이 벌어질 줄이야…….’
마을 이장이 마을의 안전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있을 때, 라울이 길버트를 불렀다.
“길버트, 닉시랑 벤자민은?”
“네? 아. 뭐 급하게 구할 게 있다고 마을을 들쑤시고 있어요.”
“구할 거?”
“네. 급한 불을 꺼야 한다던데……. 석회라도 구하려는 거 아닐까요?”
* * *
문제아였던 닉시는 고아가 된 이후, 보육원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결국 열 살 겨울 무렵 시궁창 인생을 살게 됐다.
그곳엔 닉시와 비슷하게 흘러들어온 고아들이 제법 많았다.
닉시는 죽지 않고 가장 빨리 시궁창에 적응했다.
어릴 때부터 비정상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란 게 도움을 준 셈이었다.
겁이 없고, 도덕성이 결여됐으며, 타인의 감정에 둔감한 것.
평범함 속에서는 이질적이었던 것이, 시궁창 인생에선 큰 재능이 됐다.
“이게 뭐라고 사람들이 미쳐 있는 거야? 그냥 아스피린 같은 거 아냐? 기분 좀 좋게 만드는 아스피린.”
닉시는 행인에게서 뺏은 작은 알약을 집어 들었다. 하수도 틈 사이 빛으로 흰색 코팅된 알약이 반짝였다.
닉시의 중얼거림을 들은 맥스가 말했다.
“나, 나도 몰라. 근데 듣자 하니, 한번 먹어 보면 끊을 수가 없다더라고. 계속, 계속 그 약을 먹고 싶게 된다나 봐.”
“그래?”
“너, 넌 관심 없어 닉시?”
“딱히. 넌 관심 있어? 이거 너 줄까?”
닉시가 약을 맥스에게 내밀었다. 맥스는 기겁하며 거절했다.
“시, 싫어. 저걸 먹은 사람들은 저, 전부 벼락 맞은 사람처럼 이상해진단 말야. 나, 난 무서워.”
시시하긴. 닉시가 내밀었던 손을 물렸다.
“아, 아무튼. 한번 먹으면 계속 먹고 싶어져서……. 뻐드렁니 톰도 그 약을 사러 돈을 모으고 있다 들었어.”
“왜? 이게 비싼 거야?”
“그렇지 않을까? 일단 샌드위치보다 비싼 건 확실해.”
맥스의 말에 닉시는 지난번 행인에게 갈취했던 신선한 샌드위치를 떠올렸다.
맛있었지. 포장지까지 먹어 버릴 정도로.
“비싸다, 라.”
닉시는 손가락 사이의 둥근 알약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어린 닉시는 한 달 만에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다는 약과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하수도의 폐수에선 마셨을 때 환각 같은 것을 보게하는 성분이 있었다.
시궁창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희고 큰 나팔꽃은 그 폐수를 마시고 피어났다.
하지만 약 대신 폐수를 먹는 사람은 없었다. 먹으면 바로 즉사였으니.
꽃 자체도 독을 지니고 있었기에 먹으면 심장 마비로 죽었다.
닉시는 꽃의 독과 폐수 성분을 해독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았다.
독은 희석하고, 정신 나가게 하는 성분만 남기자 그 어느 약들보다 강력하고 중독성도 강한 약물이 탄생했다.
효과도 좋으면서 가격도 저렴한 약.
그 약을 팔자, 마침내 곰팡이 피지 않은 빵을 먹을 수 있었다.
샌드위치 포장지는 먹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뛰어다니며 도둑질을 하지 않아도 돈을 준다는 멍청이들이 굴러들어왔다.
시궁창에 온 이래로, 하루 먹고 하루 사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삶’을 알게 됐다.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다.
닉시는 굴러다니는 약통을 하나 주워다 그곳에 자신이 만든 약을 가득 채워놓았다.
“살래? 내가 만든 거야.”
닉시에게 그 약통은 제가 먹고살 수단이자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밥줄인 동시에 먹이사슬 바닥에 있던 꼬맹이가 쌓아 올린 인생의 업적.
어깨를 으쓱할 고고한 자존심 뭉치.
때론 약에 중독된 사람이나, 돈이 없지만 약은 먹어 보고 싶은 사람들이 닉시에게 위협을 가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약삭빠르고 발이 빠른 꼬맹이는 그것을 절대 빼앗기지 않았다.
닉시가 만든 약은 곧장 시궁창 전체에 유행처럼 퍼져 나갔다.
그녀는 시궁창에 아주 커다란 역병을 불러왔다.
닉시가 시궁창의 쥐라고 불리게 된 때.
그것은 라텐 지구에 온 지 1년쯤 되던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해가 넘어가기 전, 닉시는 자신이 누군지 얼굴을 보러왔다는 ‘휴거’라는 성의 군인을 만났다.
* * *
닉시는 야생 양귀비를 뽑아 들었다.
“좋아. 이제 남은 건 ‘탄라나’뿐인데.”
그걸 대체 어떻게 구하느냐가 문제였다.
붉은빛의 꽃을 틔우는 유독한 독초 중 하나. 몸을 굳게 하는 마비 성질을 갖고 있어 고대 로마 시절부터 암살에 자주 쓰던 식물이었다.
그러나 독 있는 것들이 그러하듯, 가열하여 양귀비의 파파베린, 모르핀 성분과 결합하면 강력한 환각작용을 일으켰다.
하지만 키우기 까다로워 특정 지방에서만 자랐고, 그마저도 1,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뒤 거의 멸종 위기에 처하다시피 했다.
여기가 파리에 있는 연구소였으면 연구 목적으로 구할 수 있겠다만, 안타깝게도 연구소에선 탈출한 지 오래.
맹독성 식물을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진 둘째치고, 이 독초를 구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프랑스에서는 자라지 않는 식물이기 때문이었다.
‘이걸 구하려 이탈리아까지 날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골치 아프네.’
닉시는 오늘 채집한 수확물들을 들고 산에서 내려갔다. 빨갛게 얼어붙은 손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탄라나를 대신할 만한 것.
오래된 기억 속. 묻어 두고 영원히 꺼내 보지 않으려 했던 기억을 집어 들었다.
천재적인 두뇌가 탄라나를 대신할 몇 가지 가장 효율적인 것들을 내놓았다. 독일산 바이아독 펩티드, AFTX706, 메토크렉셀트.
‘아냐. 그걸 첨가하면 치료제가 아니고 필로폰 업그레이드 버전이 되는 거잖아.’
열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머리는 최소 물질로 최다 이익을 낼 수 있는 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닉시가 머리카락을 북북 헝클였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는데 사라지지 않았다.
고작 열 살 무렵, 살기 위해 축적해 놓은 기억.
시궁창의 쥐새끼로 살면서, 마약을 팔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던 정신 나간 닉시로서의 기억.
남의 머리가 녹든지, 정신이 아예 나가 버리든지 상관하지 않고 일순간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 무엇이든 했던. 고작 그때의 자신.
“으왓!”
멍하니 걷던 닉시의 발이 바위에서 미끄러졌다.
꼬리뼈가 박살 나겠다 싶어 닉시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누군가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아까부터 계속 정신 팔고 뭐 하는 거야?”
벤자민이 바위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한 닉시를 번쩍 잡아끌었다.
훌쩍 끌어당겨진 닉시의 발이 평평한 지면에 닿았다.
벤자민은 닉시가 흘린 양귀비들을 주워 들곤 흙을 털어냈다.
“어…… 잠깐 추억에 젖었다고 해야 하나.”
닉시가 말했다. 평소완 달리 약간 맹한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닉시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한참을 붉은 눈동자에 머물다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그는 손을 들어 닉시의 손끝을 잡았다. 손끝엔 작은 생채기들이 나 있었다.
무식하게 언 땅을 맨손으로 헤집을 때부터 신경 쓰이던 것이었다.
“옛날 생각은 계속해 봐야 좋을 거 없어.”
벤자민이 엄지로 그녀의 손끝에 묻어 있는 흙들을 조심스레 문질러 닦았다.
그들은 산을 내려갔다.
“그래서 찾는 건 다 구한 건가?”
“음, 그게 말이야. 일단 치료제를 만들려면 그때 만들었던 마약 종류를 먼저 조합해 봐야 하거든? 그렇게 만든 약의 조합식을 분해해서 성분 하나하나를 해독해야 한단 말야. 우선 신경을 마비시키는 데 필요한 재료들은 다 구했어. 근데 이것들은 맹독들이기만 하지 환각 쪽엔 영향이 없는 것들이라…….”
“……뭔 소린지 모르겠으니까 간단하게 말해.”
“딱 하나가 부족해.”
하필 대체재를 구하기 힘든 것이었다.
필립에게 연락해 봐야 하나. 닉시가 마땅한 해결 방안을 찾으려 머리를 굴렸다.
멀리 마을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던 벤자민이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마을 사람들한테 물어보지 그래?”
“엥, 뭘.”
“네가 찾는 걸 갖고 있냐고.”
“대마나 양귀비 같은 거 있냐고 물어보라고?”
닉시가 손에 쥐고 있는 양귀비를 들곤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냥 약쟁이냐고 묻는 게 더 빠르겠다.”
“……혹시 모르지. 네가 찾는 걸 누가 갖고 있을지도. 약 같은 거 없인 살 수 없는 시기를 지났잖아.”
얼토당토않은 말이긴 했으나, 듣고 보니 말이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설마 탄라나 같은 맹독을 가진 사람이 있을 리가. 아니, 그걸 파는 곳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그런 걸 파는 곳이라면 알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