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9_4
마을 입구엔 닉시와 벤자민의 파리행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마을의 젊은이들 모임인 길버트와 비티, 라울, 라울을 쫓아온 그레타.
어르신들도 있었다. 그들은 배웅보단, 마을의 골칫덩이 둘이 도시에 여행 갔다 온다 해서 걱정되어 쫓아 나온 것에 가까웠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닉시의 손엔 누르면 빽빽 소리가 나는 경보기와 호신용 망치가 쥐어져 있었다.
길버트는 닉시의 빵빵한 짐가방을 마차에 실었다.
“보름 정도 있을 거랬지?”
“아마도. 그러니까 그동안 나 없다고 쓸쓸해하지 말고 길.”
“벌써 쓸쓸한데 어떡하지?”
“참아 봐.”
닉시가 우는 척하는 길버트의 등을 두드렸다.
“조심해서 갔다 와요. 돌아올 때, 약속한 거 알죠?”
“물론이지, 비티.”
“뭐 부탁했어요, 비티?”
“도시에 간다길래, 트러플 오일이랑 밀크티 잼을 사달라 부탁했어요.”
“오. 닉시, 그럼 난 그냥 트러플로 부탁해.”
“기념품 맡겨 뒀니?”
비티, 길버트, 닉시가 시시콜콜 이야길 나누며 떠들었다.
벤자민은 짐가방치곤 조촐한 가방을 마차에 실었다. 닉시 일행과 함께 있던 라울이 그에게 다가왔다.
“잘 다녀와, 벤자민.”
단골이 잠시 떠나는 것이 아쉬운지 라울은 약간 쓸쓸한 표정이었다.
벤자민이 마차에 오르려 할 때였다.
“벤자민.”
라울이 그를 불러 세웠다.
그는 지갑을 펼쳤다. 그리고 지갑 사이에 껴 두었던 뭔갈 벤자민에게 건넸다.
신분증이었다. 라울의 흑백 사진과 프랑스라는 국명이 붙어 있는 신분증.
사진은 약간 바래서 흐릿해져 있었다. 얼핏 보면 눈앞의 화가와 비슷한가? 착각할 수 있을 정도.
“내 신분증 빌려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써. 잃어버리지 말고. 발급받기 까다롭거든.”
라울이 신분증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벤자민은 손에 쥐어진 빳빳한 종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잘 갔다가 와.”
라울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벤자민이 신분증을 주머니에 찔러 넣곤 고갤 돌렸다.
“조심해서 다녀와!”
길버트와 마을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닉시도 마차 밖으로 고갤 내밀고 손을 붕붕 흔들었다.
라울이 뒤늦게 손을 흔들었다. 마차 밖으로는 독일인의 머리칼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덜그럭거리는 마차 안.
마차로 두 시간쯤 달리면 근교로 나갈 수 있는 기차역이 있다. 거기서 기차로 갈아탄 뒤, 하루를 꼬박 달리면 파리였다.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되긴 했지만, 복원 속도가 빨라서 적당히 구경할 만큼은 됐다.
그곳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변덕이 죽 끓듯 바뀌는 기괴한 날씨, 지킬과 하이드들만 모아놓은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날씨는 맨날 이상했고, 사람들은 놀러 와서 뭐든 신기한 관광객들 아니면 원래 살고 있어서 흥미로울 거 하나 없는 현지인들뿐이니까.
“파리는 처음 가 보지? 내가 거기 뒷골목 출신이라 맛있는 식당은 죄다 꿰고 있어.”
그래도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밤거리나 새벽녘에 먹는 크루아상 맛, 몽마레트 언덕의 이해 못 할 예술가들의 들뜬 분위기는 좋았다.
“일단 거기 가면 카일네 가게 샌드위치를 먹어야 해. 내가 연구원일 때 그 집 샌드위치를 맨날 먹었거든? 근데 늘 질리지 않는 맛이야. 혹시 너도 혹시 에펠탑 보고 싶은 건 아니지? 파리에 오는 사람들은 그것만 물어보더라고. 튼튼한 무릎에 자신이 있으면 샬레 쾨르 성당의 300개 돌계단에 도전해 봐도 좋은데 말이야.”
닉시가 종알거렸다.
꼭 본인의 집 구석 구석을 소개하는 꼬맹이 같았다. 말론 지겹다 지겹다 했지만, 오랜만의 고향행에 들뜬 것 같은 모습이.
벤자민은 쉴 새 없는 종알거림에 고개만 끄덕이거나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몸은 파리로 가도 정신은 오베르에 남겨 둔 건가 싶은 모습이었다.
왠지 모르게 긴장한 듯, 넋이 나간 듯한 그런 모습.
이른 아침에 출발해서 점심 무렵에 마차는 기차역에 도착했다. 닉시와 벤자민은 파리행 야간기차에 몸을 실었다.
부대의 고위 관계자 필립의 은혜를 받아 그들은 일등석을 안내받았다.
객실에 도착한 닉시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뉘었다.
“엉덩이 박살 나는 줄 알았어.”
벤자민이 자신과 그녀의 짐을 바닥에 내려놨다.
“출출하지 않아? 참, 아까 길버트가 간식들을 싸줬지!”
닉시가 가방을 헤집었다.
길버트의 간식 보따리에서 나온 건 잘 구운 머핀과 브로콜리 주스였다.
그녀가 머핀을 크게 베어 물었다. 단 두 입 만에 커다랬던 머핀이 사라졌다.
벤자민은 창가 자리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먹을래?” 닉시가 마지막 남은 머핀을 내밀었지만, 그는 고갤 저었다.
결국 벤자민 몫의 머핀도 그녀의 배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이대로 한참 더 가야 하니까 편하게 있어. 아니면 한숨 자든가.”
닉시는 브로콜리 주스까지 야무지게 비웠다. 그녀가 감자밭을 누비는 멧돼지처럼 음식을 해치울 때도 벤자민은 좀처럼 창밖에서 고갤 떼지 않았다.
뭐 재밌는 거 있나. 닉시가 그의 시선 따라 고갤 쭉 내밀었지만, 창밖의 풍경은 그다지 흥미로울 것 하나 없었다.
‘왠지 긴장한 거 같기도 하고.’
하긴 촌뜨기가 대도시를 간다고 하면 어버버하기 마련이긴 하다만.
앞으로 반나절 이상은 심심한 기차 안에 있어야 하는데, 하필 기나긴 여행길에 함께 오른 동료가 촌뜨기 인어공주라니.
좀처럼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는 화가의 옆모습을 보며 닉시는 입술을 삐죽였다.
꾸벅꾸벅 졸던 닉시가 기차 덜컹거리는 소리에 깜짝 고갤 들었다.
창밖은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으어……. 잠깐 눈 좀 붙인다는 게, 아주 숙면해버렸네.”
닉시는 기지개 켜며 졸린 눈을 비볐다.
“어라 화가?”
그녀는 그제야 제 옆자리가 텅 비어 있단 걸 깨달았다.
짐가방은 그대로 있었고, 외투도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잠깐 나간 건가.’
닉시는 객실 문을 열고 고갤 빼곰 내밀었다. 복도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저만치 멀리 있는 문을 응시했다.
“설마 기차에서 길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
―끼릭. 끽.
벤자민이 걸음을 멈췄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기차의 꼬리 칸이었다. 그곳엔 배꼽까지 오는 높이의 난간과 두 사람쯤 서 있을 수 있을 만한 좁은 테라스 공간이 있었다.
벤자민은 잠시 왔던 길을 되돌아갈까 고갤 돌렸다.
기차의 후미는 작은 휴게실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한 승객들이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화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차피 돌아가 봐야 그 녀석은 자고 있을 테고.’
차멀미는 아닌 게, 이상하게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결국 벤자민은 기차의 끝 칸 문을 열었다.
바람을 쐬러 나갔지만 유감스럽게도 열차의 매연으로 매캐했다. 들어온 지 1초 만에 여기 있게 된 걸 후회할 정도였으니.
‘후회……라.’
난 여기 있는 걸 후회하나.
그는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은 지평선 위로 어둠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하늘은 어느 곳에서 바라봐도 비슷비슷했다.
‘만약에 그 그림을 보면, 그 뒤로는 어떡할까.’
그 생각은 파리행이 결정 났을 때부터 쭉 이어져 오던 것이었다. 그림을 본 뒤에, 자신은 어떡할 건지.
그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농부가 그와 비슷하다며 놀려대는 동화 속 소년처럼 그림 앞에서 감격해 죽어도 좋게 될까. 아니면 생각보다 덤덤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잘 갔다가 와.]갔다가, 와.
사람을 많이 만나 본 바텐더는 쓸데없이 눈치가 빨랐다. 라울은 벤자민이 ‘그림을 본 이후’를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듯했다.
그러니까 일부러 신분증을 쥐여주고 잃어버리지 말고 제게 돌려 달라 말한 것일 터다.
‘뭐든 됐어. 그 그림을 볼 수만 있다면.’
사라진 줄만 알았던 그림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의 목표는 그것 단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그 이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죽든, 살든.
벤자민은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끼익.
“여기 있었네? 난 또 길 잃어버린 줄 알았잖아!”
때마침 쇠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닉시였다.
“여기서 뭐 해?”
어후, 매연 봐. 닉시가 콜록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 따라 이리저리 나부꼈다.
어느새 해는 저물어 있었고, 이제 하늘은 푸른 빛이었다.
“저기요. 안 들리시나요? 아까부터 되게 조용하네. 혹시 긴장했어?”
“딱히.”
딱히이. 닉시가 벤자민의 딱딱한 말투를 흉내 냈다.
저가 언제 그렇게 얼굴을 구겼다고. 벤자민이 눈썹을 모았다.
“좀 더 기뻐해야 하는 거 아냐? 네가 보고 싶어 했던 그림을 보러 가는 길이잖아.”
닉시는 벤자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본인이 정말 보고 싶은 것이 있고, 그걸 보러 가는 길이라면 아마 심장이 쾅쾅 뛰어서 한시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긴장은 물론 되겠지만, 기대가 더 커서 종일 싱글벙글 웃고 있었을 테고.
그런데 그의 얼굴은 보고 싶은 뭔갈 만나러 가는 사람보단,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지금 가는 곳이 사형대도 아닌데 대체 왜 저렇게 침울하게 있는 건지.
“맞다. 내가 처음 네 집에 갔을 때 그리고 있던 그림이 지금 보러 가는 작품 모작이라 했던가? 따라 그릴 정도로 보고 싶었던 거지! 맞지?”
―덜컹, 덜컹.
“헤이, 네로 소년. 우리가 드디어 로부스 박물관에 간다구! 너무 기뻐서 보면 죽을 것 같아서 그런 거야?”
―덜컹, 덜컹.
“네가 너무 좋아서 찬 바닥에 기절할 것 같아도 걱정하지 마. 내가 이불을 덮어 줄게. 그럼 얼어 죽진 않을 거야. 어 잠깐만. 네가 네로 소년이면 파트라슈는 난가?”
“…….”
“……나야? 정말?”
그녀의 종알거림을 듣고 있자니 꽉 조이던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기분이었다.
뭐든 별거 아닌 것 같아지는 그녀의 태연함 때문이었다.
“그 그림을 따라 그린 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야.”
“응?”
닉시가 고갤 돌렸다. 그 바람에 숱 많은 머리칼이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닉시가 입에 들어간 머리칼을 퉷 뱉어냈다. 벤자민이 닉시의 머리카락 끝을 살포시 잡았다.
“그때, 그 일을 잊지 않기 위해서.”
―덜컹, 덜컹.
그는 손에 가볍게 쥐고 있는 금빛 머리카락을 끌어와, 그 손에 제 머리를 묻었다.
잠시 살며시 벌어진 채 말꼬리를 흐리던 벤자민이 고갤 들었다.
그의 손안에서 흐드러진 닉시의 머리칼이 다시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 * *
“오랜만, 달링.”
닉시와 벤자민이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그들을 맞이한 건 빨간 포니테일 머리의 여성. 제키 마티아스였다.
그들이 노골적으로 질렸단 표정을 짓자 제키가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알아. 우리가 영원히 안녕할 거처럼 헤어져 놓고 생각보다 너무 빨리 만났다는 걸! 하지만 말이야 나도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거든!?”
“뭐 그래……. 필립은?”
“서류 더미 속에서 썩고 있지. 걘 늘 그랬잖아?”
“하긴. 그건 그래.”
“나도 썩어갈 뻔했는데, 때마침 네가 파리에 온단 소리를 듣고 도망쳤어.”
제키가 닉시의 짐을 들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난 ‘언제 간다.’ 이야기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았어?”
“필립이 그러던데? ‘닉시가 나한테 구조 요청 편지를 보냈으니, 조만간 파리에 올 거다.’라고. 오베르 근교에서 파리로 오는 기차 편이 있으면 한 번 가 보랬어.”
그럼 그 빌빌거린 편지만 보고도 곧 파리에 올 거라는 걸 알아차렸단 말인가.
“하여간 귀신같은 놈.”
닉시가 중얼거렸다.
원래 파리 태생인 닉시와 제키는 목적지를 정하지도 않고도 막힘없이 걸어갔다. 파리가 처음인 벤자민만 그런 그들의 뒤를 묵묵히 쫓아갈 뿐이었다.
벤자민이 고갤 들어 주윌 바라봤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의 파리는 무척이나 고요하고 서늘했다.
어슴푸레한 하늘과 칙칙한 안개 때문에 탁한 색의 건물들. 꼭 다 타고 남은 잿더미 같은 불 꺼진 도시.
그는 그 잿빛 광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화가! 거기서 넋 놓고 뭐해!”
조용한 거리에 닉시의 높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꿈에서 깬 듯 고갤 돌렸다.
이윽고 저를 향해 손 흔들고 있는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제키 마티아스가 데려간 곳은 도심 한가운데 있는 고급 호텔이었다.
사방이 금색과 붉은색으로 장식되어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고, 아르데코풍 벽지는 사치스러운 분위기를 냈다.
벨벳의 카펫은 시속 오십 킬로미터로 날아와 넘어져도 타박상 하나 없을 만큼 푹신했을뿐더러, 호텔 로비의 문패마저 백금으로 만들어진 건지 번쩍거렸다.
“우와아.”
닉시가 마차보다 큰 샹들리에를 보며 감탄했다.
호텔리어는 벤자민이 준 종이를 확인했다. 필립이 파리에 올 때 쓰라고 줬던 소개장이었다.
“객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을 확인한 호텔리어는 본인이 직접 객실까지 안내하겠다며 앞장서 갔다.
“달링. 짐 풀고 놀러 가는 거지?”
“우리 쉬지도 못하고 달려왔거든? 일단 잘 거야.”
닉시와 제키는 익숙하게 호텔리어의 뒤를 쫓아갔다.
‘보통 객실 열쇠만 주고 말 텐데. 이런 직접 안내까지 해 준다고.’
농부의 직장 동료가 얼마나 높은 계급에 있는 건지 벤자민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까 소개받은 객실엔 호실 번호도 없었다. 평범한 손님을 위한 객실은 아니란 말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방에 도착했다.
열댓 명쯤의 사람이 한꺼번에 모여 회의를 하고도 남을 법한 커다란 거실.
금색과 붉은빛으로 이뤄진 커튼과 카펫.
소파는 닉시의 집에 있는 침대보다 크고, 정면으론 호텔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발코니가 있었다.
창문 너머 우뚝 솟아 있는 에펠탑이 보였다.
“그래, 저 지겨운 탑이 보여야 파리라고 할 수 있지.”
야호! 닉시는 짐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긴 소파에 다이빙했다.
사치스럽군. 벤자민은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근데 필립은 죽어 나가고 있는데, 너는 돌아가 보지 않아도 괜찮아?”
“급한 일들은 처리하고 와서 괜찮아. 오히려 나보고 넌 일을 만드니까, 제발 어디 가서 쉬고 오라던데.”
“하긴. 넌 없는 게 도와주는 거긴 해.”
“달링. 나 감정 상한다?”
벤자민은 자신과 관계없는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방으로 걸어갔다.
방도 호화로운 거실과 마찬가지로 보통 사이즈가 아니었다.
그는 눈을 번쩍이게 해서 피곤한 금빛 협탁을 지나, 가지런히 정돈된 하얀 침대 위에 몸을 묻었다.
“그래서 얼마나 있으려고?”
“글쎄다.”
“할 일 없으면 나랑 입대하자!”
“꺼져.”
문밖에서 몇 마디 대화가 더 들려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투닥거리면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 새벽 중에 피곤하지도 않나.’
그는 가물가물 흐려지는 눈을 감았다.
파리였다.
과거에 몸담았던 부대에서 적들의 수도를 함락했다며 기뻐했던 그곳.
온통 신경이 곤두서는 낯선 공기, 낯선 풍경.
제 출신을 들키면 돌팔매를 맞을지도 모르는 곳.
근데 이 와중에도 잠은 왔다. 몸이 피곤한 걸 느꼈다.
파리라고, 그 그림을 목전에 둔 앞이라고 평소와 다를 건 없었다.
그게 그는 조금 우스워졌다.
이윽고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시끌벅적 이야기하던 닉시와 제키가 뒤늦게 화가의 부재를 눈치챘다.
그들은 문틈 사이로 고갤 빼곰 내밀었다.
“……저 녀석 자?”
방에 들어간 뒤 감감무소식이라 들여다봤는데, 화가는 이미 자고 있었다. 피곤했던 건지 겉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엎드려서.
“엉. 기차 안에서 한숨도 안 잤거든. 설레서 잠이 안 왔나 봐.”
“엥, 뭐야. 귀여운 구석이 있네.”
“그치? 쟤가 유치한 구석이 있어.”
닉시가 자는 화가 옆에 가 쭈그리고 앉았다.
“그나저나 저렇게 애처럼 자는 모습을 보니까…….”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 건지 화가는 자면서도 약간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닉시가 검지로 화가의 코끝을 툭 건드렸다.
“깨우고 싶다. 코를 한번 막아 볼까?”
“그거 살인미수거든? 아 참, 마침 할 말 있었는데.”
“뭔데?”
“네가 찾는 그림 말야.”
웁! 닉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키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곤 황급히 침대 위를 바라봤다.
화가는 아직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쉿. 따라 나와……! 닉시는 재키의 입을 틀어막은 채, 거실로 향했다.
―달칵.
닉시는 화가가 잠든 방문을 닫았다.
“후우. 이제 말해 봐. 그 그림이 뭐?”
“아직 파리로 운반하는 중이래.”
“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져서 닉시는 괜스레 헛기침했다.
“아직 파리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응.”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듣자 하니, 무게가 꽤 나가서 옮기는 것만 해도 한세월이라던데. 그거 때문이 아닐까?”
그림이 무거워 봐야 얼마나 무겁다고! 닉시는 구겨진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그럼 언제 도착한다는데?”
“듣기로는 일주일쯤 걸린다더라고.”
“일주일…….”
일주일이면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화가의 인내심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정도.
‘어차피 파리에서 오베르로 향하는 열차는 열흘에 한대뿐이니, 열흘은 머무르려 했었고……. 그럼 그동안 독일인의 여행 가이드 노릇을 해 주면……?’
제법 나쁘지 않았다. 마땅히 둘러댈 핑계도 있고, 명분도 있고.
“괜찮네. 겸사겸사 정겨운 고향의 정취를 즐겨 보고!”
화가에겐 아직 그림이 전시되지 않는 시기라 변명하면 될 법했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유니까.
“좋아. 그림이 오기 전까지 끝내주는 파리 관광을 즐겨 보지 뭐.”
“그래. 그럼 난 슬슬 필립이 잡으러 오기 전에 가 봐야겠다.”
제키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득하니 붙어 있을 기세였는데 순순히 일어나는 건 의외였다.
“웬일이래? 아까까지만 해도 오베르로 돌아가는 날까지 놀자고 쫓아다닐 기세였잖아.”
“나도 참 그러고 싶은데, 일이 끝나야 말이지…….”
“뭐 중요한 일이라도 있어?”
끙. 제키는 잠시 앓는 소릴 냈다.
“……어차피 너도 장기 휴가 낸 것뿐이니까 말해도 되겠지.”
“장기 휴가가 아니고 완전히 퇴임이라니까?”
“요즘 파리의 치안이 꽤 숭숭해. 며칠 전엔 라텐 지구 근처에서 큰 소동도 있었고.”
“라텐 지구?”
닉시가 아는 체하며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