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34)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34화 >
“가장 사랑하는 음악가라?”
궁금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 가장 많은 도움과 영감을 줬던 바이올리니스트 현이죠.”
장피에르의 머릿속에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선율은 과거 파가니니가 그랬던 것처럼 듣는 이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으니.
인터뷰를 나선 기자가 마른 입술을 매만졌다.
“장피에르 감독의 이번 영화 파가니니는 개봉 전부터 입소문이 파다한데요. 허나 전작이었던 라비안로제를 뛰어넘는 음악 영화는 되지 못할 것이라는 평단의 평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스스로 어떻게 작품에 순위를 매길 수가 있을까요. 하지만 영화 파가니니를 촬영하면서 느꼈던 저는 과거의 자신보다 분명 발전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영화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생각을 확신합니다.”
장피에르의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기자가 침을 꼴깍 삼켜보였다.
“감독님, 그만큼 이번 영화가 자신 있으시다는 말씀이시겠죠?”
“정확히 말하면 연주 장면 하나하나가 마치 파가니니가 되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과거 이탈리아와 독일을 넘나들던 파가니니의 선율이 또다시 울려 퍼졌으니까요. 오죽하면 제가 편집한 영상을 보면서 정신을 못 차렸겠습니까.”
“그 정도란 말입니까?”
도대체 영상미와 사운드가 어떻기에 장피에르가 이토록 확신을 가지는 것일까.
기자란 무릇 상대방의 말을 과장스럽게 뽑아내 헤드라인을 장식할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마 장피에르의 말만 곧이곧대로 옮겨 적어도 충분할 터였다.
그나저나 파가니니가 살아 돌아왔다니, 자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였다.
“파가니니의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두 개의 영상을 보면 됩니다.”
“두 개의 영상이요?”
“첫 째는 알렉산드로 주연의 영화 파가니니일 테고. 두 번째는.”
장피에르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으니.
“바이올리니스트 현이 주연으로 촬영한 메이킹 필름입니다.”
* * *
“다시―!”
불호령 같은 목소리가 떨어지자 백정훈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흑과 백의 건반 위로 기다란 손가락이 또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페달을 밟는 세기와 선율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는 레가토, 강현의 귀가 세밀한 현미경처럼 백정훈의 선율을 경청했다.
“다시―!”
악보의 해석이 틀렸을 때마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강현은 백정훈이 어느 부분을 어떻게 틀렸는지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혼자서 알아내기를 바라듯이.
대한민국의 차세대 거장이라 불리는 백정훈은 피아노를 처음 배웠을 때처럼 강현의 말에 가타부타 토를 달지 않고 악보의 낱장을 다시 첫 장으로 넘겼다.
“다시―!”
벌써 몇 번째일까. 강현이 다시 한번 언성을 높였으니.
음악을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는 부드럽고 풍부한 선율의 연속이었다. 허나 강현의 귓가에는 불협화음으로 들렸던 모양.
백정훈은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건만 오히려 얼굴에 홍조를 띄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연주가 계속될수록 강현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보였기 때문에.
“다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주제넘는 것이 아니냐고? 아서라, 강현의 피아노 실력은 그 누가 뭐래도 백정훈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벽을 마주한 것처럼 좌절감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모차르트를 질투하고 동경한 살리에르의 마음이 이러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그런 찰나의 협소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강현이 작곡한 악보를 보면 볼수록 감탄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았던가.
“형, 잠시만 쉬죠.”
“왜?”
“더하다가는 형 손가락이 못 버텨요. 지금 안 쉬고 세 시간 째잖아요.”
백정훈은 그제야 시간이 훌쩍 지나갔음을 깨달았다. 어깨와 등허리가 땀으로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으니.
강현이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며 말했다.
“형, 지난번에 제가 드렸던 곡은 그럴싸하게 해석하셨는데 이번 곡은 처음부터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느낌이에요. 저는 작곡을 할 때 형식과 규격에 얽매이지 않은 채 최대한 자유롭게 음표를 그려나가요. 헌데 형은 음표 하나하나마다 너무 강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야 할까요.”
“강한 의미를 부여한다?”
“다른 음악가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분명 과거에 천재라고 불렸던 작곡가들이 남겼던 악보를 보고 수많은 과잉해석을 하는데 제가 보기엔 그냥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적어 내려간 악보일수도 있거든요. 물론,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을 되살려서 물어보지 않는 한 정답을 알 방법은 없지만요. 좀 더 어깨에 힘을 빼세요.”
백정훈은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기분이었으니. 자신이 피아노를 배워가며 느껴왔던 가치관과 전혀 다른 방향이지 않은가.
자유로운 음표들에 너무 강한 의미를 부여해 오히려 선율에 족쇄를 채운다는 것이었으니.
“참, 그리고 베를린 필의 악장 사무엘이 형 이야기를 하던걸요.”
“뭐어?”
“아시아의 피아니스트 중 백정훈을 가장 눈여겨보고 있다고 했어요. 다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꼭 협연을 하고 싶다고요.”
백정훈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베를린 필과의 협연은 그가 여태껏 고대하고 고대했던 것 중 하나였기 때문.
한편으로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했다. 과연 자신이 잘해낼수 있을지 의문이었기에.
그때였다.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긴장해요. 그리고 형이라면 아주 잘해낼 수 있을 거예요.”
“이제 보니 현이 네가 동생이 아니라 형 같구나.”
“그럼 이참에 형이라고 불러보세요.”
어째 형이라고 불러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의젓한 동생이었으니.
어느새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악보를 집어들 때였다. 강현은 백정훈에게 악보를 받아 들고는 붉은 펜으로 중요한 부분을 연달아 체크해 나가기 시작했다.
“형, 앞으로 한동안은 제가 작업실에 오지 못할 것 같아요.”
“왜?”
한국에 귀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작업실에 나오지 못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정훈이 알고 있는 강현은 그 누구보다도 워커홀릭이었다. 어쩔 때 보면 음표와 사랑에 빠진 것 같지 않았던가.
허나 뒤이어 들려오는 대답은 의외였다.
“혼내줘야 할 사람들이 좀 있어서요.”
* * *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찻잔이 소리나게 내려 놓였다.
“예, 회장님.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 전쟁이라. 자네가 보기엔 어떻던가.”
“담대하고 대담했습니다. 어찌 보면 가장 정확한 표현이지요.”
왕회장의 주름진 눈가에는 묘한 기색이 가득했다. 김상국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흥미롭지 않은가.
하물며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난 김상국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략기획실의 수장 자리에 앉을 수 없었을 테니.
“김 실장, 자네가 보고 느낀 바를 더 자세히 말해보게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에는 회장님께서 저를 시험하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과제를 내는 이가 바로 강현이라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강현이 정말로 저를 스카우트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김상국은 긴장한 것인지 목이 마른 것인지 목울대를 한 번 크게 출렁여 보였다.
“기세가 남달랐습니다. 평범한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담대했습니다. 계약서의 내용을 살펴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준비해 준 것인지 몰라도 세밀했으며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지라는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기민하게 움직였으니까요.”
“자네에게는 무엇을 주겠다고 하던가. 등가교환이니 자네를 쓰는 만큼 그만큼의 값어치를 지불해야 될 터인데.”
“야망을 이뤄주겠다고 했습니다.”
왕회장은 감탄을 숨김없이 터뜨려 보였다. 세상을 살다 보면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인물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김상국이었으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금전보다는 훗날 거머쥐게 될 권력에 대해 더욱 야망이 가득한 남자가 아니었던가.
강현은 짧은 기간 동안 김상국을 보며 그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김 실장, 자네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가?”
왕회장의 물음이었다. 김상국의 얼굴에는 고민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각고의 세월 끝에 얻어낸 전략기획실의 수장 자리가 아닌가. 제3자가 보기에도 아직 앳된 고등학생에 불과한 강현의 대리인이 되는 것과 전략기획실의 수장 자리는 하늘과 땅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차이가 있었다.
헌데 왜일까. 김상국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강현의 눈동자가 떠올랐으니.
결심을 끝낸 김상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어머, 어르신.”
왕회장의 때아닌 방문에 강현의 어머니 유현자 여사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하물며 왕회장의 뒤로 비서들이 저마다 황금색 보따리를 양손 가득 들고는 집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현자야, 유 회장 좀 보러 왔단다.”
“어르신, 아버지 몸이 아직 안 좋으셔서 큰 차도가 없으시네요.”
“괜찮다. 유 회장 얼굴만 한 번 보고 가려는 참이니. 기력에 좋다는 것들로 많이 가져왔으니 주치의랑 상의해서 잡수시도록 하거라.”
유현자는 아버지의 죽마고우가 고마웠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번 이렇게 이촌동을 찾아주었기에.
모름지기 아플 때일수록 직접 챙겨주는 사이가 각별한 사이이지 않은가. 하나밖에 없는 형제들이라곤 하나같이 아버지의 건강보다는 잿밥에 더욱 관심이 많아 보였으니 오죽할까.
“아버지, 손 회장님 오셨어요.”
유현자의 목소리에도 병상에 누워있는 유 회장은 별다른 미동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바이탈 사인이 정상이라는 것 정도다.
왕회장은 누워 있는 친구를 바라보다 유현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현자야, 내 잠깐 유 회장하고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자리를 잠시 비워줄 수 있겠느냐?”
아무렴, 정신이 없는 환자라고 할지라도 듣는 귀는 열려 있다고 하지 않는가. 주치의가 말하기에도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면 걸어줄수록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유현자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애써 참아내며 미소 지었다.
“이보게, 유 회장. 자네가 몸져누우니 자식들이 성화라고 하더군. 특히 첫째 범진이 그놈이 앞장서서 강 서방을 해코지하려고 들 걸세. 만약 범진이 그놈이 지분만 확실했다면 임시주총이라도 열어서 자네를 회장 자리에서 내려 앉히려고 했을 테지.”
왕회장은 뒷짐을 진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둘째 범경이 그놈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러 가기는커녕 이제 첫째 옆에 딱 달라붙어서 합심을 하고 동주를 잡아먹으려 들고 있더군. 셋째 복자야 말해 뭐하겠는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 제 오빠들 말이라면 껌뻑 죽는시늉도 하는 녀석이니. 아무리 봐도 자네나 나나 자식 농사 하나는 제대로 말아먹은 것 같구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은 채 삐빅거리는 기계 소리만이 공허한 병상 위를 울리고 있었다.
“그래도 현자가 자네 뒷바라지를 하느라 어찌나 열심인지 모르네. 우리 막내딸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효녀이지 않은가. 이럴 때 보면 자네가 참 부럽네. 강 서방은 또 어떻고 매번 정신도 없는 자네한테 회사 일을 보고한다지?”
자식 복이 없는 유 회장에게도 나름의 복이 있었으니. 막내 딸 부부내외와 바로 손주 강현이었다.
왕회장은 오전 중에 김상국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읊어주었다.
“가장 다행인 건 강현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지. 내게 자신의 장기 말로 쓸 인물을 요구했는데 그게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전략기획실의 김 실장일세. 아무리 봐도 강현이 고놈 사람 보는 안목 하나는 범상치 않아. 그리고 일의 추진 능력도 어찌나 뛰어난지 김 실장이 어느새 강현에게 푹 빠졌어. 성공을 못 할지언정 강현과 한번 함께 일해보고 싶다더군. 이유야 간단하다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남자라면 모름지기 역사를 써 내려가고 싶어 하는 법이니.”
왕회장이 병상 위에 누워 있는 유 회장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나저나 계속 그렇게 누워만 있으면 어쩌누?”
“…….”
“영감탱이, 아무도 없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게나.”
그 순간 방금 전까지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유 회장이 눈을 슬그머니 뜨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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