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78)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78화 >
“다들 획기적인 아이디어 없어?”
침묵과 함께 정적이 내리깔렸다.
“지금 S사 시사교양은 박찬호 섭외해서 시청률이 완전히 노났다고 하던데 말이야. 우리는 언제까지 허송세월 보낼 생각이야. 방송국 짬밥 먹을 만큼 먹었다는 놈들이 이렇게 상상력이 빈약해서야. 이대로 가다가는 동물의 왕국이 우리 대표 프로그램이 되게 생겼어!”
국장의 잔소리가 아침부터 따사롭게 쏟아진다.
어느 누가 시청률 빵빵 터지는 황금 거위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싫겠는가. 그러나 항상 부족한 인력과 단출한 제작비는 기본적인 여건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진정한 프로는 변명을 하지 않는다고?
개뿔 뜯어먹는 소리.
방송국 일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인건비와 제작비가 얼마나 중요한 주춧돌인지 모를 리 없다.
과장을 더해 말하자면 납을 황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사가 아니고서야 명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김 피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예?”
“평소에는 말도 많은 놈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 이 난국을 타파할 방법이 있느냔 말이야.”
아뿔싸, 국장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황급히 SOS신호를 보내보지만 다른 PD들은 자신들이 당첨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시선을 회피할 뿐이다.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자 국장의 부리부리한 눈알이 들어찼다. 마치 잔뜩 화가 난 잉글리쉬 불독을 보는 것 같다.
“있습니다!”
“매번 그렇게 변명만 할 게 아니라, 뭐 있다고?”
“예, 이 난국을 타파할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국장은 물론이고 동료 PD들도 의아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무렴, 밑져야 본전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물러섰다가는 잉글리쉬 불독을 닮은 국장한테 몇 주 동안이고 물고 뜯길 것이다.
국장은 일찍이 PD들에게 상상력을 키우라며 잔소리를 하곤 했는데 이제 그 상상력이 십분 발휘 될 때였다.
“바이올리니스트 강현을 섭외하면 됩니다.”
“강현?”
“예, 일전에 영국 왕실에서 지휘를 해서 유명해진 소년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 누이가 음반지 기자로 일을 하고 있는데 들리는 소문에는 강현과 피아니스트 백정훈이 이번에 함께 지휘를 한다고 합니다. 이미 그쪽 업계에서는 쫘악 퍼진 소문이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답니다.”
강현은 이미 전 국민적인 관심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클래식의 불모지라 할 수 있었던 대한민국에 클래식 앨범 신드롬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니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하물며 피아니스트 백정훈의 팬층 또한 상당히 두터운 편이다.
“하지만 그들의 출연료가 문제입니다. 출연 조건도 꽤나 까다로울 거라고 예상되고 말입니다. 특히 바이올리니스트 강현 같은 경우에는 방송 출연이 적을뿐더러 칼럼 인터뷰 또한 자주 하지 않아 서태지만큼이나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허나 만약 프로그램 출연만 성사되게 된다면 엄청난 시청률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동료PD들은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설마하니 강현의 이름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한 모양.
암, S사에서 스포츠 스타 박찬호를 끌어들였으면 우리는 강현 쯤은 돼야 배팅이 맞지 않겠는가.
하지만 반려될 것이 뻔한 제안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출연료를 감당할 수가 없었으니. 그때였다.
“김 피디, 가능하겠어?”
“예?”
“출연료와 출연 조건만 맞춰주면 가능하겠냐고, 내가 직접 사장실을 가서 무릎을 꿇어서라도 재가를 받아올 테니 말이야.”
불독을 닮은 국장의 눈이 승부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다큐멘터리?”
뜻밖의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애초에 언론의 노출을 꺼려해 인터뷰 또한 자제하지 않았던가. 헌데 방송국 촬영 카메라를 눈앞에서 마주한다니.
“방송국 측에서 꽤 좋은 조건으로 제시를 해왔어. 현이 너를 기다리는 팬들에게 선물이 될 수도 있고 장기적으로 보면 대한민국 클래식 문화를 부흥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대표님, 그래도 다큐멘터리 촬영은 조금 그런데요.”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대본이 없을 줄 아는가.
지난 삶 사법연수원에서 촬영했던 다큐멘터리 때문에 방송국 놈들은 하나같이 믿을 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몇 번이고 똑같은 장면을 재촬영하는 것은 물론 사소한 일상 대화에도 스크립트를 주지 않았던가.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백 퍼센트 날것을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촬영팀에서 직접적인 간섭은 없을 거야. 그냥 현이 너와 정훈 씨가 연주회를 준비하는 나날들을 촬영하고 싶은 생각인 것 같으니까. 촬영 도중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촬영을 그만두겠다는 약속도 해주겠다고 했어. 솔직히 난 현이 네가 너무 신비주의를 고수해서 걱정이야.”
애초에 안빈낙도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지난 삶 물욕과 권력을 좇아 인생을 낭비했었으니 이번 삶만큼은 원초적인 행복에 맞춰 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을 하다 보니 어째 지난 삶보다 더한 관심과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 같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괜찮다고 생각해. 현이 네가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이름을 날리지 못한 음악가들은 독주회 객석 채우기도 힘든 게 사실이야.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에 클래식 열풍이 불면 참 좋을 것 같아.”
백정훈은 도의적인 뜻에서 방송국 촬영을 긍정했다. 것도 그럴 것이 유명하지 않은 음악가들은 무료 독주회를 열더라도 빈 객석을 전부 채우기는 요원한 것이 사실이었기에.
“알겠어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앞으로 방송국 측에서 무명의 음악가들을 알리는 프로그램을 제작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 출연료는 익명으로 전부 기부해 주세요. 다들 힘들 때인데 돕고 살아야죠.”
때마침 백정훈이 옆에서 자신 또한 출연료를 전부 기부하겠다고 의사를 밝혀오는 것이었으니.
임혜라 이사장이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설마하니 내가 이런 제안을 할 줄을 몰랐던 모양.
“그리고 이건 정훈이 형과 상의를 해봐야 할 일인데, 이번 연주회에서 얻어지는 제 수익 또한 전부 기부하고 싶어요.”
“정말?”
“기부처는 대표님께서 잘 알아봐 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임혜라 이사장이 놀라는 까닭은 간단했다. 독주회를 비롯한 연주회를 개최할 때마다 얻어지는 수익은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나도 한참 뛰어넘었으니.
하지만 돈 욕심은 이미 닳아 없어지지 않았던가. 과장을 더해 말하자면 VH컴퍼니에서 얻어지는 투자 수익만 하더라도 삼대가 걱정 없이 먹고 살 정도였다.
그나저나.
“촬영은 언제부터 시작해요?”
그때 임혜라 이사장이 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대표실 천장에 반투명한 액정의 카메라들이 달려 있는 것이었으니.
바이올리니스트 현에 대한 미담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 * *
팟―!
골프공이 유려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천혜의 절경 부럽지 않은 가평 컨트리클럽에 왕회장과 김상국 단 두 명만이 라운딩을 돌고 있었다.
왕회장이 드라이버를 캐디에게 건네며 김상국을 바라봤다.
“어째 자네하고 골프를 치다 보면 실력이 느는 것 같은 기분이야.”
“회장님께서 워낙 퍼팅을 잘하셔서 그런 것 아니시겠습니까. 나이를 생각한다면 회장님께는 웬만한 세미 프로도 함부로 명함을 못 내밀 겁니다.”
“예끼 이 사람아, 어째 강현이하고 함께 다니다 보니 비행기를 태우는 법도 배운 모양이구만. 예전에는 로봇처럼 사람이 참 딱딱했는데 말이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각진 턱에 강한 눈매를 자랑했던 김상국 실장의 얼굴은 유순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온화함 속에 날카로움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니.
“요즘 여기저기서 연락이 많이들 오지?”
“예, 승정원에서 회동이 있었던 뒤부터는 국내 5대 기업들은 물론이고 청와대에서도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전략기획실에서 있었을 적에도 못 겪어본 일이라 당황스럽더군요.”
“현이는 어떻게 하라고 하던가?”
“물 흘러가듯 놔두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바바라 그룹에서 제안한 투자 위임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5대 기업에서 온 각종 투자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는 모습을 보고 말입니다.”
김상국 실장이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알지 않는가, 그 누구라도 돈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하지만 강현은 예외였다.
바바라 그룹은 물론이고 국내 5대 기업에서 막대한 자본을 통한 투자 제안을 해왔지만 강현은 단칼에 잘라냈다. 그때의 강현은 마치 물욕을 버린 수도승의 모습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VH컴퍼니의 투자 성과에 대해서 물어도 되겠는가. 자네도 알다시피 VH컴퍼니에는 유 회장 말고도 내 지분도 섞여 있으니 말일세.”
“승정원에서 5대 기업의 총수들이 놀란 것처럼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났습니다. 전략기획실에서 십수 년 동안 몸담았던 저조차도 믿기 어려웠으니 다른 사람들은 아마 귀신을 본 것 같았을 겁니다. 특히 손일선 사장께서 저를 따로 불러 물어보시더군요. 혹시 강현 대표의 투자 전략을 제가 코칭해 준 것이냐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 만약 강현의 투자 전략을 김상국이 코칭해 준 것이었으면 김상국은 이미 전략기획실이 아니라 한 기업의 대표자리에 앉아 있어도 모자람이 없었다.
김상국 또한 강현의 투자 전략은 볼 때마다 새로웠다.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질 때면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 * *
“피디 김도현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담당 피디가 이토록 과도하게 고개를 숙이니 부담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을 것이다.
촬영감독은 물론이고 피디까지 호위무사처럼 강현을 뒤따랐다.
대본 같은 것은 다행히도 없었지만 강현과 백정훈의 모습을 한시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항상 카메라가 주시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하겠습니다.”
연주회에서 공연을 맡은 오케스트라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었다.
일찍이 강현과 구면이었지만 방송국 촬영 카메라 때문일까, 단원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리허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 순간 무대 위에서 허공을 가로지르던 손끝이 한데 모아졌다.
“다시.”
어긋난 음을 잡아내는 것은 지휘자의 몫이었다. 단원들의 박자와 호흡을 관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새 촬영 카메라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지휘를 펼쳐 나가고 있지 않은가. 단원들 또한 더욱 연주에 몰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틀린 부분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애초에 완벽한 연주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법이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었다.
객석에 앉은 백정훈 또한 긴장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봤다.
“바이올린―!”
그때 계속해서 음정을 틀리던 단원과 강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직 나이가 어린 단원이었다. 척 봐도 음대를 이제 갓 졸업한 학부생이다. 모르긴 몰라도 서울시립교향악단에 입단할 정도면 국내 콩쿠르는 휩쓸고 다녔을 것이 분명했다.
“본인이 어디를 틀린 건지 알겠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화음을 맡아야 할 제2바이올린이 계속해서 음이 어긋나고 있어요. 악장의 신호를 반 박자 늦게 따라가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죠.”
흡사 호랑이 선생님과 같은 모습이다. 단원들은 강현의 모습에 입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것도 그럴 것이 교향악단에서 십수 년을 몸담은 수석단원들 조차도 강현의 족집게 같은 실력에 감탄을 토하지 않았던가.
모르긴 몰라도 평범한 지휘자였다면 종전 바이올리니스트의 실수를 잡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잠시 시범을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계속해서 이론으로 설명을 듣는 것보단 한 번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강현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악기를 건네받았다.
지휘봉을 보면대 위에 올려놓은 채 순식간에 자세를 취한다.
물 흐르듯 바이올린이 어깨 위에 안착하고 활이 현과 맞닿는다.
방금 전 연주했던 교향곡의 한 부분을 거짓말처럼 소화해 내는 강현이었다. 하물며 두 가지 버전으로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닌가.
“첫 번째는 정석적으로 연주를 했을 때 선율이고, 두 번째는 방금 전 단원께서 계속해서 실수를 하며 냈던 선율입니다. 차이를 알겠어요?”
단원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고개를 연거푸 끄덕인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 선망 어린 놀라움이 서린다. 것도 그럴 것이 스치듯 지나갔던 상대의 실수를 저토록 완벽히 복사해 내는 인물이 또 있을까 싶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이 모든 장면을 방송국 촬영 카메라가 한 치도 빠짐없이 담아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