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21)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21화 >
“드롭일세!”
왕회장이 워터 해저드로 빨려 들어간 골프공을 보며 소리쳤다. 재계 서열1위 왕회장이 점심내기 하나에 이리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누가 알까. 이런 왕회장의 들뜬 반응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옮긴다. 그나저나 여긴 여전히 조경수가 끝내준다. 누가 봐도 골프장이 아니라 유명 풍경화속이라고 착각할 정도.
이곳은 가평에 위치한 컨트리 클럽이었다. 사실 프라이빗 클럽이라 말하는 게 맞지, 일반인은 이곳에서 라운딩 한 번 돌아보지 못할 테니 말이다. 왕회장이 직접 공을 들인 골프장이니만큼 고목들의 값이 하나같이 웬만한 집값 못지않았다. 오죽하면 가평CC에 위치한 나무들을 가져다 팔면 3대가 걱정 없이 먹고산다는 말이 나돌았겠는가.
훗날에도 손일선이 임원들과 함께 회동을 할 때면 찾았던 곳. 시간이 흐르면 상류층들은 찾을 수 있는 곳이 되지만 지금은 왕회장의 허락이 없다면 손일선 조차도 마음대로 오갈 수 없었다. 이곳에 특이한 점이 있다면.
“현아, 다리가 아프지는 않으냐.”
골프카트가 없다는 것이다. 캐디들은 반자동카트를 밀며 경기를 보조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걸어서 전 홀을 라운딩 해야 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정말이었다. 왕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니만큼 풍광이 천혜의 절경 못지않았으니. 기묘하게 고개를 꺾은 노송들이 마치 신선을 바라보는 것처럼 홀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하물며 연꽃이 만개한 연못다리는 꿈을 꾸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한다. 지난 삶 이곳에서 라운딩 한 번 돌겠다고 얼마나 갖은 노력을 했던가.
“유회장, 자네는 좋겠어.”
왕회장이 내 머리맡을 쓰다듬으며 지나쳐 간다.
“현이가 이토록 의젓하니 말이야. 우리 유하는 이곳에 데려오기만 하면 심심하다고 어찌나 땡깡을 부리는지.”
역시 어린 아이다. 대한민국의 상류층이라면 누구나 꿈에 바라마지 않는 곳이거늘, 속된 말로 골프 선수들 중에서는 하늘의 선택이 없다면 가평CC에서 라운딩 한 번 하기 어렵다는 말도 있었지. 그만큼 폐쇄적인 곳.
“손회장, 난 자네가 더 부럽군.”
할아버지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왕회장은 할아버지의 절친한 지기였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영감탱이. 난 오히려 더 걱정일세. 내가 죽고 난 뒤에 일선이가 자기 형제들을 배척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야. 그놈이 겉으로는 온화한 척 하고 있지만. 내가 잡고 있는 고삐를 놓는 순간 곧장 제일을 집어삼키려 들걸세.”
왕회장의 선견지명은 역시 탁월하다. 그의 말처럼 훗날 왕회장의 사후 손일선은 제일그룹 경영구도에 대한 가지치기부터 먼저 시작하니.
“벌써부터 후계구도를 잡으려는 모양이야. 이제는 하나 밖에 없는 제 딸을 유학 보내려고 하더군. 유하도 가고싶어 하기도 했고. 알잖나, 제 어미가 프랑스에 있는 걸.”
유학?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이면 손일선의 아내는 프랑스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있겠군. 재벌가의 며느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왕회장의 자유분방한 성격이 그걸 용인해 주었다.
“헌데, 근래 들어서는 유하가 유학 가기 싫다 딱 잘라 말하더군. 일선이가 많이 당황했어. 아무리 어린 아이라지만 이렇게 마음이 쉽게 변할지 몰랐을 테지.”
그때 왕회장이 슬쩍 나를 쳐다봤다. 이거 이거 눈빛이 이상한데.
“오늘도 자기만 빼놓고 가평에 온 걸 알면 화를 내겠구만. 허허.”
*
지글지글.
불판위에 닭갈비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재벌들의 점심내기가 고작 닭갈비라니, 의아하기는 했지만 마침 배가 고픈 참이라 뭐든 좋았다. 산속 별장처럼 마련된 식당에는 우리를 제외하곤 손님이 없었다.
“앞으로 백화점 쪽은 막내가 맡기로 했네. 그쪽으로는 일가견이 있는 아이니까 말이지.”
“허허. 일선이가 쉽사리 양보를 하던가. 일전에 왕세자가 온 것도 그 아이 덕이 아닌가. 쉽사리 공을 넘길 아이가 아닌데 그렇다면 아무래도 제생 쪽을 취했겠군.”
귀를 쫑긋 세우고 듣자니 식탁 위에서 오가는 대화가 예사 것이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었다면 할아버지들이 노망이 났다며 콧방귀를 뀌었을 테지, 계열사 하나를 마치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건 그렇고.
‘손일선이 이렇게 제일생명을 먹었던 거구나.’
속된 말로 보험회사를 가지면 그릇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토지보유와 자금 순환만큼은 어느 계열사도 제일생명을 따라잡을 수 없었지. 살을 주고 뼈를 취한 격. 어찌 보면 이때부터 손일선이 제일그룹을 점차 장악해 나갔는지도 모르겠다.
“현이는 뭘 가지고 싶으냐.”
일순 왕회장이 미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물었다.
“동주에서 말이다.”
동주?
동주 안에도 여러 부서가 있기는 했다. 제일그룹처럼 계열사들이 포진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 섹터별로 그 중요도가 달랐으니. 훗날을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허허, 역시 음악만 시키기에는 아까운 재목이야.”
응?
“안 그런가, 유회장. 고민하는 저 모습 좀 보게. 고 놈 참 볼수록 물건이구만.”
아차.
나도 모르게 왕회장의 질문에 깊게 고민을 해버렸다. 왕회장은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고 할아버지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조심하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왕회장의 술수에 넘어가게 생겼다.
“유회장, 일전에 자네가 부탁한 것 있잖나.”
이건 또 무슨 소리?
“일본 측에서 그 비디오를 보고는 다급하게 연락을 해왔어. 아무래도 충격이 컸을 테지. 오죽하면 왕세자조차 그 비디오를 요청했겠나. 히로세씨가 현이를 꼭 만나보고 싶다더군.”
설마.
“손가, 히로세라면 바이올린의 여제를 말하는 것인가?”
왕회장은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히로세라면 나도 모르지 않는다. 바이올린의 여제, 현의 여왕이라 불리며 일본 클래식계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사람이 아닌가. 일본에서는 영웅시되는 인물. 다만 내가 클래식에 관심을 가질 즈음에는 여제의 독주회를 볼 수 없었다. 슬프게도 이미 그녀가 세상을 타계한 뒤였으니.
때마침 막국수가 나왔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부연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했지만 말해주지 않으니 알 방도가 없지. 시간이 흘러 감칠맛을 더한 닭육수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
“현아.”
할아버지가 날 지그시 바라보셨다. 할아버지는 날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어 하셨다. 어머니에게 그간 모질게 굴었던 만큼 마음의 빚이 있는 것일 터.
“유학 갈 생각은 없느냐.”
모른 척 곁에 두기엔 강현은 너무도 재능이 많았다.
* * *
“스펜서, 자네 있는가.”
새뮤얼이 아침 일찍부터 악단을 찾았다. 지난 밤 런던 심포니의 수석지휘자인 스펜서가 급히 연락을 해왔기 때문. 다짜고짜 ‘자네가 한국행을 택했던 이유가 제일그룹 관련해서라지?’라며 쏜살같이 묻는 통에 대답을 하기는 했다만.
“마에스트로께서는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스펜서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악장 드미트리가 나와 새뮤얼을 정중히 모셨다.
“드미트리, 스펜서가 없다니요? 공연 연습으로 한창 바쁠 줄 알았는데.”
“그게 다음 공연까지 시일이 남아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항상 악단의 연습에 광적으로 집착하던 스펜서였다. 오죽하면 그라모폰지에서 가장 집요한 지휘자로 스펜서를 손꼽았을까. 그런 스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악단을 비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슨 중한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평소의 스펜서라면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그 속내를 전부 털어놓는 인물이 아니었으니. 드미트리는 특유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고개를 저어보였다.
“저도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며칠간 자리를 비운다는 짤막한 말만 남기고 사라진 스펜서였다. 오히려 가장 답답한 것은 다름 아닌 드미트리였다. 단원들을 총괄하는 악장이지만 지휘자가 없으면 아무래도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원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연습을 게을리 했다가는 스펜서의 눈밖에 날 수 있었으니.
그때.
어디선가 계속해서 바이올린 선율이 들려왔다.
새뮤얼과 드미트리는 홀린 듯 선율이 들려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당도한 곳은 다름 아닌.
“지휘자실?”
드미트리가 노크를 하려는 찰나 문이 스르르 열렸다. 어찌나 바빴던지 문을 잠글 생각조차 하지 못한 모양. 새뮤얼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드미트리가 결심한 듯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지잉.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어린 신사?”
브라운관 속에서 강현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지난 밤 비디오 테이프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연속재생된 듯 하다. 주인은 없고 비디오만 재생되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그 순간 새뮤얼과 드미트리의 시선이 교차했다.
설마?
*
“히잉, 할아버지 나뻐.”
평창동 대저택이 손유하의 볼멘소리로 가득하다. 아침댓바람부터 자신을 놔두고 왕회장 홀로 가평을 향했기 때문. 평소 같았으면 가자고 해도 싫다고 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현이 오빠도 있다고 말하지도 않고!”
계획에도 없던 보모역할을 맡아버린 손일선의 비서는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손유하의 성격이 웬만한 아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특한 것도 모자라 한 없이 까칠한 것이 웬만한 어른 저리가라다. 다행이라면 웃어른에 대한 예의는 있다는 것 정도. 저런 아이가 강현 앞에 가면 세상에 둘도 없는 순한 양이 되어버리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 나갈래요!”
요즘 들어 부쩍이나 군것질 거리에 재미를 붙인 손유하였다. 비서가 말릴 새도 없이 어느새 정원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다리도 짧은 것이 빠르기는 또 어찌나 빠른지 잠시라도 한 눈을 팔았다가는 이 넓은 저택에서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유하야, 아주머니한테 부탁해서 간식 먹으면 안 될까?”
말 한마디면 수제로 만든 고급과자는 물론이고 임금님에게 진상했다는 특산품들이 떡하니 나오는 대저택. 하지만 손유하는 어려서부터 쟁취욕이 과도했던 탓인지, 자신의 손으로 직접 구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후.’
비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경호원들에게 눈짓했다. 혹여나 모를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하려는 것. 그때였다.
“어?”
손유하가 차가 주차되어있는 차고가 아닌 문을 박차고 뛰쳐나간 것은. 비서가 아뿔싸 하는 표정으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젠장 하필이면 하이힐이라니!
“응? 아저씨는 누구세요?”
때마침 평창동 대저택 앞에 당도한 차량에서 색목의 외국인이 내렸다. 척 보아도 날카로운 인상. 희끗희끗한 새치까지 강렬하게 보일 지경. 외국인이 대저택에서 뛰어나온 손유하를 보고는 뭐라 말을 했지만.
“히잉. 나 아직 영어 잘못하는데.”
강현처럼 원어민의 빠른 발음까지 알아들을 정도로 손유하의 청해 능력은 뛰어나지 않았다. 그 순간 외국인이 품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웃기게도 브라운관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정확히는 브라운관 속의 인물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어?
“현이 오빠?”
손유하가 사진을 보고 눈을 크게 뜨자, 외국인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날카로워 보이던 인상은 어디가고 숫제 어린 아이마냥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그리고는 한 마디 하는데.
“오케이! 혀니! 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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