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44)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44화 >
꿀꺽―!
리아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눈은 붉게 충혈되었지만, 시선은 VCR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 낮이 밤이 되고 벌써 몇 시간 째 편집실에 앉아있었는지 모를 정도. 다큐멘터리는 특성상 편집해야 할 장면과 부각해서 담아야 할 장면이 나뉜다. 헌데.
“너무 재밌잖아.”
그래서 문제였다. 샤펠에서의 나날은 관찰카메라를 이용한 촬영. 과거에는 건져낼 게 없어 걱정이었다. 예민한 음악가들이 모이는 것이다 보니 서로 교류는커녕, 밤낮없이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만이 카메라에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기수만은 달랐다.
“찜, 찜닭?”
마치 하이틴 드라마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물론, 그 드라마의 중심에는 단연코 강현이 빠지지 않았다. 동양에서 온 아이. 작은 체구와는 별개로 좌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었으니. 바이올린을 켤 때만큼이나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특히 울고 있던 윌리엄을 다독여 주는 장면에서는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 당최 분간이 가질 않았다.
또한 러시아 출신의 안나가 강현을 잘 따랐다. 마치 오빠를 대하는 것처럼. 묘하게 그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역시 국장이 옳았어!’
짬밥은 허투를 먹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신예 중 무명의 어린 아이를 점찍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느 거장의 말처럼 2차 심사 영상이 공개되면 음악계가 들썩일 것은 물론이거니와 샤펠에서의 나날까지 선보인다면 강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쏟아질 것이리라. 그때였다.
일순 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VCR 속 강현이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자세를 잡아주는 장면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자세가 바뀐 뒤 곧바로 이어진 연주에서 그 음색이 묘하게 달라진 것이다. 이 마법과도 같은 일련의 광경에 나머지 신예들이 앞다투어 부탁해 보인다.
“허.”
감탄조차 터져 나오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장면. 음악적 자존심이 완강한 이들이었다. 더군다나 서로가 대회를 앞둔 경쟁자이지 않은가. 헌데 지금은 마치 모두가 한마음이 된 것만 같았다. 현을 통해서.
꿀꺽.
저 아이, 도대체 정체가 뭘까.
*
“어떻게 알았나요?”
뭐라 대답해야 할까.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지난 삶 자주 들었던 교향곡, 하지만 총보를 외운 적은 물론 본 적도 없었다. 현5부를 포함한 관현악편성의 오케스트라. 믿기겠는가. 이 수많은 화음 속에서 느껴진 찰나의 부조화가 내 귓가를 사로잡았다는 것이. 내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자 에덴은 오히려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 내려와요, 단원들과 인사를 나눠야죠?”
나는 짧은 다리로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정말 14살이란 말이에요?”
한국 나이로 치면 14살이었으니 거짓은 아니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하나같이 신기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최종 명단에 나같이 어린 아이가 이름을 올릴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모양. 더군다나 종전 믿기지 않는 광경까지 선보이지 않았던가.
“현, 오케스트라와 협연은 처음인가요?”
“예, 마에스트로.”
에덴은 날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론을 듣는 것보다 실제로 부딪쳐보는 것이 더 좋겠죠? 원하는 악상과 지휘의 흐름은 연습을 하는 동안 거리낌 없이 말해주면 돼요.”
내가 환상을 집어 들자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에덴의 눈동자에도 그 출렁임이 보였을 정도. 일순 월광을 머금은 붉은 커텐이 펄럭였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꿈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장대한 물줄기가 나를 향해 움직이는 것만 같았으니. 처음 느껴보는 선율의 웅장함에 놀라기도 잠시 활과 현은 쉼 없이 맞닿고 있었다.
“신기하군요, 정말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았어요.”
에덴은 과거를 떠올리는 듯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어떤 부분을 수정하고 싶나요?”
하나같이 실력이 뛰어난 단원들이다. 하지만 협연은 달랐다. 바이올리니스트가 해석한 악보의 흐름이 그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었기 때문. 에덴은 혹여라도 내가 부담을 가지지 않도록 편하게 대해 주었다. 사랑스러운 손자를 대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난 곧장 에덴에게서 붉은 펜과 총보를 받아들었다. 이윽고 거침없이 붉은 펜으로 현5부의 수정을 제시했다.
*
‘신기해, 정말.’
수십 년만에 수수께끼를 풀어낸 당사자가 이토록 어릴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보통은 정답 대신 주관적 감상을 늘어놓기 바빴으니. 하물며 연주실력은 어떠한가, 지휘를 하는 내내 눈을 뗄 수조차 없었다. 이런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다.
“여기 있습니다, 마에스트로.”
수정된 총보가 에덴의 눈을 의심케 했다. 하나같이 자신이 느꼈던 문제점들을 빠짐없이 찾아냈기 때문. 단원들의 음정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었다.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가 가지는 해석의 차이일 뿐. 이런 것을 어떻게 저토록 어린 나이에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인가?
“현, 정말 타고 났군요.”
지휘자의 재능까지도.
아니라며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겸손한 모습에서는 나이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어떤 거장이 저 아이의 몸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일까. 설마하니 브뤼셀에 돌고 있는 소문이 사실이 아닐까 의문도 들었다.
모차르트가 환생했다는.
* * *
“독주회가 끝나면 어떤 기분인가요?”
복잡미묘한 질문이다.
“달콤한 사탕이 입안에서 녹아 없어진 기분이라고 말하면 될까요?”
벌써 수십 년째 바이올린을 켜고 있지만 독주회가 끝날 때 느껴지는 이 기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 농도가 진해지는 듯 하다. 나이가 들수록 끝없는 선율을 추구하는 이 마음이 왜 더 뜨거워지는 건진 모르겠다. 아마 그 아이를 만나서가 아닐까.
“히로세 씨, 들리는 소문에는 브뤼셀에 히로세 씨의 추천장을 받은 인물이 있다고 하던데요. 사실입니까?”
히로세는 망설임 없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다나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일전 브뤼셀에 대해서 인터뷰를 나눴을 때는 나오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 인물이 최종 명단에 들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히로세는 침묵으로 긍정을 표시했다.
“또 스트라디바리우스 ‘환상’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환상이라는 말에 히로세의 표정이 변했다. 침착하던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이 꽤나 놀란 모양. 하지만 이내 입가에 엷은 미소가 자리했다. 스트라디는 영혼을 가진 바이올린, 먼 길을 돌고 돌아 붉은 실로 이어져 있는 제 주인을 찾아간 것이리라.
“히로세 씨, 이번 독주회를 끝으로 안식기를 가진다고 하셨는데 가장 먼저 무얼 하실 계획입니까?”
“일단 오늘 저녁 비행기를 타고 벨기에로 갈 생각이에요.”
벨기에라는 이야기에 다나카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벨기에를 찾는 이유는 정황상 너무나도 확실했기 때문. 이제는 클래식계에 떠돌고 있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정확히 해야 할 시간. 다나카는 짐짓 뜸을 들이곤 말문을 열었다.
“히로세 씨, 설마 퀸엘리자베스에 출전한 그 인물이 제자입니까?”
현의 여왕이 여태껏 누군가를 가르쳤던 적이 있던가, 그래서 이번 추천장은 더 화제가 되었다. 하물며 이제는 직접 벨기에로 향한다지 않는가. 퀸엘리자베스의 최종 경연은 외부인에게도 공개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순간 히로세의 백발이 출렁였다.
“친구.”
짧지만 많은 의미를 시사하는 단어였다.
*
8일이란 시간은 긴 시간이 아니다.
더욱이 끝없는 선율을 추구해야 할 이들에게는 찰나처럼 짧게 느껴졌을 것이리라. 마지막 날이 다가왔을 즈음 어느새 이들과 부쩍이나 친해진 것을 느꼈다. 모두 경연을 앞두고 있다기보단 화려한 피날레를 준비하는 것처럼 서로를 도와주기 바빴다. 물론, 그중에서 내가 가장 바빴고.
“자, 어서 저녁을 먹자고!”
바이킹족을 닮은 에릭이 호탕하게 소리쳤다. 오늘 저녁 당번은 저 녀석인 듯했다. 아무래도 또 연어가 아니면 절인 청어가 올라와 있을 테지. 에릭이 식사 당번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메뉴였으니. 전생에 에릭은 곰이었을 거라는 조셉의 주장에 신빙성이 더해졌을 정도였다.
“어? 이건.”
검붉은 스튜였다.
“그게, 현이 만들었던 찜닭을 내가 따라 만들어 봤거든.”
어쩐지 일전에 레시피를 적어가더니만 얼추 모양새는 비슷했다. 에릭의 덩치만큼이나 감자와 당근, 닭고기가 하나같이 큼지막하게 썰어져 있는 것 빼고는. 닭고기를 건져내 나이프로 잘라먹어 할 정도였으니. 그나저나 맛은 꽤 괜찮았다. 역시 손이 큰 사람이 요리를 잘한다는 정설이 사실인가?
“안나, 왜 그렇게 울상이야?”
다니엘의 질문에.
“마에스트로한테 혼났거든, 내가 긴장해서 실수를 해버렸어.”
안나가 특유의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나저나 에덴이 혼도 내는 사람이었던가? 항상 웃는 얼굴이라서 몰랐는데.
“원래 마에스트로 시므온이 엄하기로 유명하잖아, 오죽하면 젊은 시절에는 붉은 머리의 마녀라고 불렸겠어. 나도 마에스트로 앞에서 바이올린을 켤 때면 웬만큼 긴장되는 게 아니더라고.”
생각보다 마에스트로께서 엄하신 모양이었다. 윌리엄은 물론 장옌까지도 동의를 표했을 정도였으니. 난 울적이는 안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안나, 너무 걱정하지 마. 잘할 수 있을 거야.”
“고, 고마워. 현.”
안나가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모습에 닭다리를 통째로 들고 뜯고 있던 에릭이 부연한다.
“누가 누나고, 동생인지 모르겠구만.”
화기애애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각자 바이올린을 켜기 위해 연습실로 향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 경연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다들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까지 연습에 매진했다. 덕분에 샤펠에는 밤낮없이 선율이 끊이지 않는다.
만월이 보인다.
사각사각사각.
나뭇잎이 맞물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볼을 스쳐 지나갔다. 이럴 때면 연습실에만 박혀 바이올린을 켜기는 아까울 정도다. 샤펠의 앞에는 큰 정원이 있었는데 은은한 만월의 달빛을 받아 수풀이 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난 조심스레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흩날리는 만월 아래로,
지잉.
환상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어떨 때는 활과 현이 쉼없이 맞닿으며 속주와 화려한 기교를 자랑했고 일순 새끼강아지의 숨소리만큼이나 나른하고 느린 선율 또한 보여주었다. 바람과 벌레 소리를 반주 삼아.
지잉―!
활로 현을 강하게 누르자 경쾌한 고음과 함께 연못을 유영하던 물고기가 튀어 올랐다. 왜 샤펠이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성지라고 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태곳적 아무것도 없던 시대로 돌아간 것처럼 오로지 선율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어스름이 걷혀가고 있었다. 장대비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축축하다. 팔은 아프지 않냐고? 어떤들, 지금 느끼는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였다.
타오르는 여명 속에서.
또각―!
선명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 것은.
두근 두근 두근.
희뿌연 안개 사이로 불쑥 선명한 뿔이 나타났다. 바람결에 흔들리던 수풀이 그 움직임을 일제히 멈추었고 어스름 사이로 서서히 그 실체가 드러났다. 흰 사슴이었다. 하지만 어찌나 신묘한 후광이 비치는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착각이 일 정도였으니. 타오르는 여명 속에서 순백의 사슴이 내게 지척까지 다가왔다. 눈동자는 마치 자연을 담은 것처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던 그 순간.
“현, 지금까지 바이올린을 켠 거야? 밖에서?”
뒤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안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내가 밤새도록 밖에서 바이올린을 켰기 때문일 테지. 그건 그렇고 도대체 이 사슴은 뭐란 말인가.
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지만 아까 그 순백의 사슴은 보이지 않았다. 연못 아래 물고기만이 유유히 유영하고 있을 뿐. 수풀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샤펠에서의 마지막 날 난 그렇게 또 다른 환상을 마주했다. 찰나의 순간 신기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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