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56)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56화 >
청중의 이목이 일제히 쏠린 그 순간,
지잉.
날카로운 선율이 콘서트홀의 천장에 닿았다. 한 줄기의 조명이 곧장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나타난 인영에 청중들은 숨을 집어삼켰다. 붉디 붉은 울림판 사이로 나있는 가늘고 길다란 검은 줄기가 엉켜 마치 바이올리니스트의 볼을 쓰다듬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지휘자의 손이 움직임과 동시에.
지잉―!
바이올리니스트의 활이 미친 듯이 보잉을 시작한 것은. 빼곡히 들어찬 32분음표의 악보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활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쉼 없이 맞닿는 활과 현의 모습에 사람들은 감탄마저 잊고 그 광경을 주시했다. 객석에 앉아있던 거장들 또한 앞다투어 자
세를 앞당겼다. 자신들의 눈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에.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
평행 옥타브, 하이포지션, 속주, 피치카토, 아르페지오 등 수많은 기교가 총망라된 곡이었다. 웬만한 거장들도 공연장에서 파가니니의 곡을 연주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가. 헌데 이 바이올리니스트는 일말의 스스럼조차 없었다. 마치 파가니니가 환생이라도 한 것처럼
자유자재로 기교를 선보이고 있었다. 하물며 그 울림은 청중의 눈과 귀를 단박에 빼앗아갔다. 악마의 선율처럼.
스르릉―!
활이 강하게 현을 짓누르는 소리가 마치 칼날처럼 서슬 퍼렇다. 신호를 기다리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수많은 청중의 시선이 해일처럼 밀려와 어깨를 짓누를 만도 하건만 바이올리니스트는 오히려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떨치고 있지 않은가.
리허설도 좋았지만 그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베토벤 리사이클의 공연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파격적인 앙코르 무대. 바이올리니스트가 무대와 가까워질수록 조명의 밝기가 점차 강해졌다. 이윽고 확연히 드러난 바이올리니스트의 모습에 청중들은 참았던 숨을 감탄과 함께 토해냈다.
지잉―!
악마의 선율을 일으키는 이는 다름 아닌 연미복을 입은 어린 소년! 청중들은 지금 자신들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한편 베를린필의 사자, 유리 또한 좌석에서 두 손을 움켜쥔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
얼음물에 손가락을 담갔다. 손가락 사이사이 피어올랐던 굳은살이 다시 찢어지려는 기미가 보였기 때문. 내연은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고 아직 한 차례의 앙코르가 남았다. 파가니니의 곡은 수많은 음표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오죽하면 뛰어난 거장들조차 카프리스를
연주할 때면 위스키를 마셔 마음을 달랬다고 하겠는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손가락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헌데.
두근 두근 두근.
연주가 끝나고 나자 심장이 미친듯이 거칠게 뜀을 느꼈다. 활을 쥐었을 때는 차마 몰랐던 감정의 해일이 온몸을 휘감았으니, 다리가 떨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 ‘환상’은 여전히 울부짖고 싶다는 듯이 은빛 현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순간,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스펜서가 나를 찾아왔다.
“현, 자네를 보기 위해 멀리서 손님들이 오셨네.”
휠체어 소리?
아무렴, 스펜서가 아무나 대기실까지 데리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
일전 보자르 홀에서 마주했던 노신사였다. 그때의 강렬한 눈빛이 아직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들어오는 이는 노신사의 비서쯤이라도 되는 것일까? 헌데 그의 눈빛도 날카롭게 벼려진 것이 평범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반갑습니다, 나는 구스타프라고 하오.” 설마!
오스트리아의 별을 말하는 것일까.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강현이라고 합니다!”
난 서둘러 고개를 깊숙이 숙여 예를 갖췄다. 것도 그럴 것이 눈앞의 구스타프가 정녕 오스트리아의 별이라면 그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었으니.
“디아코프라고 하네.”
뒤이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던 중년인도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설마 베를린 필의 지휘자 유리 디아코프씨?”
부리부리한 눈매의 중년인이 긍정의 표시로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허―!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마에스트로께서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제대로 된 자리를 마련했을 텐데요.”
약소한 다과상과 차가 준비되었다. 그 누구 앞에서도 작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스펜서가 영원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앞에서 만큼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겸손했다.
“괜찮네, 오늘 연주의 주인공은 바로 런던 심포니와 바이올리니스트 현이 아닌가. 난 축하를 하러 온 것이지 자네들에게 부담을 주러 온 것이 아닐세. 그나저나 차 맛이 참으로 좋아. 한국의 전통차인가?”
누가 준비한 것인지는 몰라도 쌍화차였다. 노른자까지 동동 띄워져 있었지만 구스타프는 마치 음미를 하듯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현, 잠시 자네의 손을 만져봐도 되겠나?”
누구의 부탁인데 거절하겠는가. 내 손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구스타프가 일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정말이군. 정말 바이올린을 켠지 오래되지 않은 손이야. 에덴에게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구만. 야샤를 처음만났을 때보다 더 당황스러운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야샤?
설마 불세출의 천재 야샤 하이페츠를 말하는 것일까.
유리와 스펜서, 두 사람은 말없이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이고만 있었다. 가뜩이나 부리부리한 눈매의 두 사람이었다. 알 수 없는 신경전이 오가는 것이 스파크가 튈 듯이 매섭지 않은가. 그때 구스타프가 맘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미소 지었다.
“현, 자네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예?”
뭘 말하는 것일까.
“런던과 베를린 둘 중에 말일세.”
* * *
꿀꺽―!
백정훈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국내의 이름난 음악가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예술의전당으로 모여들었기 때문. 아무렴, 국내 최초로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이 방문한 것이었으니 오죽할까. 하물며 일반 시민들 또한 생각보다 많았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에
관심을 가져줄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촬영 카메라가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얼핏보면 무슨 촬영장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어머, 정훈씨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일전 인터뷰를 진행했던 데일리Q의 김샛별 기자였다. 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조용히 말했다.
“정훈씨가 이렇게 빨리 귀국하신 줄은 몰랐어요.”
“잠깐 들어온 것입니다.”
유학생활을 하던 중 국내에서 런던 심포니의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갑작스럽게 한국행을 택한데 있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앙코르 무대에 그 아이가 선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
“오늘 앙코르 무대에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선다는 것은 알고 계신가요?”
“네, 알고 있습니다.”
아무렴, 그 무대를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온 것인데. 김샛별은 백정훈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고개를 돌려 무대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인터뷰보다는 런던 심포니의 생생한 후기를 칼럼으로 남기는 것이 더 바빴으니. “와아―!”
백정훈은 옆자리에서 터져나오는 감탄같은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과연 세계 최정상을 달리고 있는 교향악단다웠다. 지휘자의 손짓하나에 심포니 전체가 하나의 울림이 되지 않았는가. 이런 무대에서 베토벤 리사이클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자신감이 아니고
서야 불가능한 일이었지. 한 마디로 격이 달랐다. 저런 교향악단과 협연하는 것 자체가 음악가들에게는 꿈에 바라마지않는 일생의 소원.
‘과연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앙코르가 다가오자 백정훈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격동하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 어두컴컴한 객석의 한 자리에는 히로세 선생님도 계실지 모르지. 기대감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찰나.
바이올린 선율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한 줄기의 빛이 객석의 중앙을 비추었다. 백정훈은 거침없이 뛰는 심장에 두 손을 말아쥐었다. 마치 파가니니가 환생이라도 한 것처럼 소년은 나아가고 있었다. 술렁이던 객석이 순식간에 폐부를 휘젓는 선율에 매료되었다. 과연 열
네 살에 저렇게 담대한 배짱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비르투오소를 마주한 듯 숨막히는 압박감이 온몸을 옥죄었다. 모든 연주가 끝나자 백정훈은 자신이 자리에서 기립해있음을 알게 되었다.
짝짝짝짝―!
백정훈 뿐 아니라 모두가 진심어린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하나같이 온몸을 관통한 전율과 감동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일순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김샛별과 백정훈의 시선이 교차했다. 김샛별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환희에 젖어
있지 않은가. 김샛별 또한 백정훈을 마주보며 일전 인터뷰에서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앞으로 한국의 클래식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
요 며칠 정말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런던 심포니의 내연이 끝나자마자 언론사는 물론 각종 매스컴의 인터뷰요청이 얼마나 쇄도했던가, 지난 삶 다큐5일에 출연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관심이었다. 하물며 9시뉴스에도 내가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이 방영되었을 정도니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랴. 차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즈음.
“현아, 정말 유학은 생각에 없느냐?”
할아버지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공연날에도 그랬지. 오스트리아의 별이라 불리는 영원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가 직접 나에게 묻지 않았던가. 런던으로 갈 것인지, 베를린으로 갈 것인지. 내 대답은 간단했다. 아직 둘 다 갈 생각이 없다. 물론, 분에 차고 넘치는 제안임은 분명했지만 적어도 내가 성인
이 되기 전까지는 한국에 머물 생각이었으니. 만약 협연제의가 다시 온다면 그때 잠깐 비행기를 타고 다녀오면 되는 일이니.
“모든 배움에는 때가 있는 법이거늘, 할애비는 그것이 걱정된단다.”
어렸을 적 신동으로 여기던 아이들이 커서는 범재가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니 할아버지의 걱정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충분히 제가 원하는 음악을 할 수 있어요.”
계속되는 완강한 내 태도에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느새 김기사 아저씨가 모는 자동차가 서울의 한 갤러리에 도착했다. 지난 삶에도 익히 와본 곳이었지. 제일재단 산하의 갤러리였으니.
임혜라 작가전.
‘이맘때쯤 한국으로 돌아온 거였구나.’
훗날 제일재단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는 여사님의 귀환이었다. 갤러리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국내의 내로라하는 재력과 권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물론, 이름난 예술가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오늘 난 할아버지의 옵션으로 초대받은 것이 아니었다. 갤
러리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강현에게 직접 초대장을 보내온 것이다.
“오빠아―!”
역시나 예상했다는 듯이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손유하가 나를 반겼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옷을 입은 것을 보아하니 오늘의 주인공이 마치 자신인냥 한껏 뽐내고 있었다. 날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어째 런던 심포니와 협연을 한뒤로 더 강렬해진것만 같
다. 이따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한동안 뉴스에까지 시끄럽게 방영되었으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바이올리니스트 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들 격식을 갖추는 탓인지 다짜고짜와서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유회장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소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여인이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긴 생머리는 물론, 웬만한 모델 부럽지 않은 기럭지였다. 얼핏보면 손유하가 그대로 몸집이 커지고 나이가 든 모습이다. 난 그녀가 누군지 잘 안다.
“오랜만이군, 임작가. 이제 아예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야?”
“예, 아버님이 성화시기도 하고 저도 이젠 한국에서 생활할까 해서요.”
바로 손유하의 어머니였다. 지난 삶 제일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지 않았던가. 손일선의 자서전에는 이렇게도 서술되어 있었다. ‘아버지 다음으로 무서운 사람은 바로 아내다.’ 라고. 지난 삶 법무팀에 있다 보니 제일재단과 접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금의 순환이 가장
빠른 곳이 제일재단이었기에 법의 재단이 필요한 부분도 많았다. 아침마다 임혜라 이사장에게 보고서를 올리곤 했던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탓에 그녀의 성격을 사내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지.
“네가 바로 그 강현이구나?”
예, 이사장님. 그녀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대답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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