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55)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55화 >
“쇼비뇨 블랑을 부탁하오.”
화이트 와인의 산도와 싱그러운 과일향이 입안을 감돌았다.
“마에스트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베를린필의 사자, 유리는 여태 시차 적응 때문에 와인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심란한 마음을 풀어줄 방도로는 와인이 유일했다.
“무엇이든 물어보게나, 유리.”
“아무리 생각해도 에덴 시므온이 마에스트로를 선택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리도 궁금하던가?”
일등석에는 우연찮게도 두 사람이 전부였다.
“유리, 자네 샤펠에 있을 적 내가 내었던 수수께끼를 몇 개나 맞추었지?”
보자르 홀에서의 수수께끼를 말하는 것이었다. 교향곡의 틀린 부분을 찾아내는.
“제 기억에는 세 개였습니다.”
“그래, 자네가 최고였지. 에덴조차도 단 두 개를 맞추는 것에 그쳤으니 말일세. 솔직히 난 그 수수께끼를 맞출 수 있는 신예가 있으리라곤 아예 생각지도 못했었으니 말이야. 객관적인 모든 역량에서 자네가 에덴보다 뛰어났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그런데 왜?
“나도 과거에 자네와 같은 고민을 한 적 있다네.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님 밑에서 수학을 할 때였지. 그분은 자신의 애제자는 단 한 명만 두겠다 공표하셨고 나와 야샤가 그 물망에 올랐어. 당시의 난 자신만만했지. 객관적인 지표로 보나, 콩쿠르의 수상내역으로 보나 내
가 야샤보다 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야. 당시의 야샤 하이페츠는 믿기지 않겠지만 스피카토조차 서툴렀던 신예중의 신예였으니. 그런데 결국 아우어 교수님은 야샤 하이페츠를 선택했다네.”
구스타프의 주름진 눈가에 과거가 묻어나왔다.
“혈기왕성했던 젊은 날의 나는 그 사실을 용납지 못했어. 장대비를 홀딱 맞아가며 아우어 교수의 저택을 찾아갔지. 술에 취해 잔뜩 상기된 내 얼굴을 보고는 아우어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
구스타프가 일순 미간을 찌푸렸다. 그날을 떠올리듯.
“자네와 난 색이 다르네라고, 난 큰 충격에 빠졌지. 누구보다 뛰어난 인재라고 생각한 내가 최고의 지도자와 함께 할수 없다니, 고작 그 같지도 않은 이유때문에. 그 당시엔 그저 날 가르치기 싫은 교수님의 솔직하지 못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었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내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니 알겠더군.”
“무엇을 말입니까?”
구스타프는 대답 없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유리는 타오르는 갈증을 해소시키기라도 하듯 화이트 와인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구스타프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지도자는 양분을 줄 수 있는 비옥한 대지이네, 가르침을 받는 이는 예민한 꽃과도 같지. 어느 토지에서 자라냐에 따라 그 생김새가 달라지는 꽃말일세. 바이올리니스트 현을 만나게 되면 자네도 내가 느꼈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걸세.”
비어있는 와인잔이 눈에 띄었다.
“지금 자네의 모습은 마치 장대비에 홀딱 젖었던 젊은 날의 나를 보는 것 같만 같군.”
*
“현, 나도 봐주면 안 돼?”
애당초 바이올리니스트 단원의 자세를 손봐준 것이 문제였다. 퀸엘리자베스 다큐멘터리를 봤다며 끈질기게 부탁해오는 한 단원의 자세를 살짝 고쳐줬을 뿐인데 곧바로 음색이 풍부해진 것이 아닌가.
“클로이, 난 비올라에 대해서는 잘 몰라.”
비올리스트 클로이가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겠어, 대신 실망 하지마.”
클로이가 주근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올라는 일반인이 보기엔 바이올린과 닮았지만 사실 확연히 다른 악기이다. 깊고 울림 있는 음역은 바이올린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고 실력의 차이가 날수록 그 음색은 더욱 선명해진다. 헌데 왜일까.
지잉. 클로이가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바, 바뀌었어!”
클로이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것도 그럴 것이 자세를 약간 틀어준 것 뿐인데 음색이 확연히 차이가 났기 때문. 소심한 클로이가 목소리를 높이자 이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단원들조차 내게 서둘러 다가왔다. 오죽하면 작은북을 연주하는 마이클마저 북채
를 잡는 법을 고쳐달라고 하지 않는가, 그건 내 능력 밖이라고!
“흐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첼리스트 에마누엘이 흡사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민머리를 매만졌다.
“절대음감이라는 말은 오히려 부족할 정도야, 이건 모차르트가 살아 돌아와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도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랐다.
평생 정형화된 자세를 취했던 이들을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바꿔주었을 뿐이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악기를 처음 쥐었을 때처럼. 나 또한 얼떨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능력이 첼로와 비올라, 콘트라베이스에까지 통용될 줄 어디 알았겠는
가.
“뮤즈의 손!”
일순 에마누엘이 생각났다는 듯이 외쳤다. 아무래도 미다스의 손에서 따온 별명 같았지만 자신은 아주 흡족한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현, 잠깐 나 좀 보지.”
마에스트로 스펜서가 나타났다.
“파격적으로 하자고요?”
스펜서는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현, 자네의 첫 협연을 무미건조하게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네. 더불어 이곳은 자네의 고국이 아닌가. 부담가지지 말게나, 오직 자네의 선율을 듣기 위해 찾은 청중들만을 생각하게. 그들에게는 자네의 첫 무대가 영원한 기억으로 자리매김 될 테니.”
뜻밖의 제안이었다.
런던 심포니의 앙코르 무대에 선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영광이었으니. 내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자 스펜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를테면 파가니니처럼 무대를 꾸며보는 건 어떤가?”
“예?”
스펜서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의 기억에 깊이 남을 수 있게 말이야.”
* * *
거울에 비친 모습이 영 익숙지가 않았다. 지난 삶 턱시도를 아예 입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토록 어렸을 때 입은 적은 없었다. 단원들은 내 모습을 보고는 귀엽다며 소리치기 바빴지만 난 아무리 봐도 그저 꼬마 펭귄 같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현, 잠깐 시간 괜찮은가?”
차가운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예, 괜찮습니다.”
평소 내게 말을 걸지 않았던 드미트리였다. 끝내 친해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건만 공연 직전 이렇게 나를 찾아와 준 것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공연 직전인데 떨리지는 않나?”
물론, 아예 떨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긴장되기 보단 설렙니다, 활을 쥐는것 자체만으로도요.”
드미트리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현, 내가 처음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한 건 스물다섯살 적이었지. 벌써 십수년 전의 이야기지만 그때만 해도 심장이 너무 뛰어서 무대에서 쓰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했었다네.”
냉혈한이라 불릴 정도로 표정의 변화가 없는 드미트리였다. 그도 긴장을 할줄 알았단 말인가.
“결국 아무도 오지 않는 창고에 들어가 소리를 크게 지르고 나서야 마음이 평안해졌어. 러시아의 숫기 없는 총각이 수천 명 앞에서 바이올린을 든다는 것 자체가 고욕이었으니 말이지. 아직도 청중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들 때면 심장이 거칠게 뛰곤 한다네, 그때마다 아
무도 없는 창고에 들어가 속을 비워내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드미트리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그는 혹여나 내가 심란한 마음을 지니고 있진 않을까 긴장을 풀어주러 온 것이다. 단원들은 물론 협연자의 컨디션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악장의 몫이었으니.
“현, 바이올린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바이올린이라고 할지라도 누가 연주하냐에 따라 레가토, 스피카토, 트릴이 아예 다른 선율로 들리기 때문이죠.”
“그럼, 오늘 자네의 바이올린은 어떤가?”
난 말 없이 환상이 들어있는 오래된 케이스를 바라봤다.
“글쎄요, 과연 어떨까요?”
드미트리는 여태껏 보인 적 없던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마에스트로와 마찬가지로 신동의 존재를 믿지 않았었네, 하지만 요 며칠 자네를 마주하고 있자니 생각이 달라지는군. 자네의 마음을 풀어주러 왔다가 오히려 내가 심신의 위안을 얻고 가는 격이니, 앙코르 무대에서 기다리겠네. 청중들에게 똑똑히 보여주게나.”
드미트리는 자리를 떠나며 조용히 러시아어로 말했다.
“현의 세계를.”
*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 초저녁부터 사람들이 가득하다.
인산인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객석은 만원이었다. 콘서트홀이 건립되고 난 후 이토록 많은 청중이 모였던 적이 있을까. 군데군데 국내의 부호들이 눈에 띄었고, 세계적 명성을 유지하는 거장들 또한 보였다. 가장 신난 것은 다름 아닌 방송국과 기자들이었다. 국내
최초로 세계 유수의 악단이 내연한 것이 아닌가. 그들이 눈을 빛내는 것은 당연했다. 이윽고 들썩이던 객석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오케스트라가 등장했기 때문.
전운이 감돌듯 은은한 조명 아래 긴장감이 내리깔렸다.
지휘자가 등장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단원들이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섰다. 깊은 눈을 한 스펜서가 청중들을 향해 경의를 표했다. 스펜서는 곧장 몸을 돌려 단원들을 마주했다. 하나같이 타오르는 눈빛을 지니지 않았는가. 마치 모든 준비를 끝냈다는 듯.
베토벤 리사이클, 내연의 주제였다.
누군가는 그랬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해석이 불가하다고.
지휘자마다 성향이 천차만별이기에 곡의 방향성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특히 베토벤의 곡이 그 이야기의 중심이었다. 악상기호를 있는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이가 있는 반면 오케스트라의 특성에 맞춰 생각해야 한다는 이도 있었다. 하물며 템포는 어떠한가, 교향곡
을 시작할 때 들어가는 호흡이 정확히 표시되지 않아 지휘자마다 제각기 달랐다. 이러한 점에서 런던 심포니의 시작은 마치 천둥과 같았다.
두두두둥―!
일순 지휘봉이 허공을 강하게 가로질렀다.
베토벤 교향곡 운명.
얇고 가느다란 지휘봉의 움직임에 맞춰 수십 개의 악기가 일제히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템포와 리듬, 선율의 방향성까지 지시하는 지휘봉의 움직임에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강렬한 손끝의 움직임만큼이나 천둥이 내리치는듯 한 선율의 연속.
두두두둥―!
과연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울림이었다. 지휘자의 힘과 오케스트라의 생동감이 여실히 느껴지지 않은가. 충격을 주듯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선율에 청중들은 숨을 집어삼켰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앙상블의 연속에 그들은 잠시도 쉴 틈 없이 눈과 귀를 빼앗
겨야만 했다.
거대악기가 연주되는듯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호흡.
베토벤 교향곡 합창.
교향곡 운명을 비롯해 합창까지 한달음에 달려나가는 공연이었다. 세계 정상의 교향악단들이 베토벤 교향곡을 쉽게 공연의 레퍼토리로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본다면 분명 대단한 결정이었다. 대중들에게 유명하지만 그만큼 청중들을 만족시키기 어려운 곡이기에. 하지
만.
콰득!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에 어느새 다들 손을 말아쥐고 있었다. Freude, schoner Gotterfunken! Gotterfunken!
환희여, 환희여, 신들의 아름다운 불꽃이여! 신들의 아름다운 불꽃이여!
2부의 말미에서 터져나온 합창단의 외침에 청중들은 감탄을 터뜨렸다. 소프라노에서 테너에 이어지는 우렁찬 목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천둥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콘서트홀에 들어찬 모두가 쉼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앙코르,
단원들은 전부 준비가 된 듯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청중들은 하나같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지휘자의 손끝을 바라봤다. 헌데 협연자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는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협연자가 나타나지 않자 알 수 없는 수군거림이 장내에 들
어찼다. 그 수군거림이 점차 커지던 그 순간.
지잉―!
활이 현을 강하게 짓누르며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객석의 중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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