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79)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79화 >
“취임식?”
홍차가 바람결에 일렁였다.
“알렉세이, 그건 내 취향에 전혀 맞지 않는 일이라네. 자네도 음악원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이례적으로 취임식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네만?”
남들의 관심을 받는 것은 무대 위에서 족했다. 감투를 쓰고자 기나긴 안식을 끝낸 것도 아니었으니. 더군다나 만약 절친한 지기 알렉세이가 장으로 있지 않았다면 학과장 자리도 사양했을 것이다.
“안톤, 말은 바로 해야겠군. 차이콥스키에는 나를 기다린 학부생보다 자네를 기다린 이들이 훨씬 많을 테니 말일세. 만약 자네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아마 이 장 자리도 내가 아니라 자네가 앉아 있을 테지. 알잖나, 내가 학생들에게 인기가 별로란 것을.”
“아직도 학생들을 절벽 끝까지 몰고 가나? 어미 사자처럼 말일세.”
알렉세이가 볼을 실룩였다. 음악원장이 교편을 잡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초대원장 차이콥스키가 백년전 화성학을 가르친 이후 처음이었으니. 학부생들에겐 좋은 기회가 아니냐고? 물론, 하지만 알렉세이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학부생들에게 모진 독설을 아끼지 않았으리라. 오죽하면 젊은 시절 실력이 모자란 교수에게도 직설을 아낌없이 퍼붓던 그였으니.
“이번 취임식 때 영원한 마에스트로도 참석하신다고 하니, 빠질 생각은 하지 말게나.”
“구스타프께서 말인가?”
안톤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 구스타프가 누구란 말인가, 야샤 하이페츠와 함께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이제는 영원한 마에스트로로 수많은 음악가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었으니.
“안톤, 자네가 평판이 좋긴 좋은 모양일세. 여기저기서 빠지지 않고 취임식을 축하하러 오겠다고 하니 말이야. 오죽하면 음악원에 유령이 나타났다고 하지 않겠는가. 유령도 자네를 반기는 모양이지.”
“유령? 차이콥스키를 말하는 건가?”
안톤과 알렉세이가 모스크바 음악원의 학부생이었을 시절 나돌았던 괴담이었다. 회중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 그때 연주회장의 차이콥스키 초상화가 살아 움직인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았지만 당시에는 믿는 이들이 꽤 되었다.
“알렉세이, 자네 기억나나. 어렸을 적 기숙사에서 했던 내기 말일세. 보드카 게임에서 진 사람이 연주회장에 놔두고 온 악보를 가지고 오는 것이었는데. 결국 자네가 걸렸었지 아마?”
“크흠, 기억 안 나네. 도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겐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구만. 그날 자네 연주회장에 들어섰다가 그대로 기절하지 않았나. 야간순찰을 하시던 경비원을 차이콥스키 유령으로 착각을 하고 말이지. 이번에도 음악원에 차이콥스키의 유령이 떠돌고 있는 모양이지?”
그 순간 알렉세이가 미간을 좁히곤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아닐세, 이번엔 꼬마 유령이라더군.”
한바탕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방문 너머로 울려 퍼졌다.
*
톡톡―!
어째 귀가 간지러운 것이 샤워하다 물이라도 들어간 모양.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어머니께서 혹시 몰라 챙겨주신 것인데 이렇게 입을 일이 생길 줄이야. 아무렴, 타지에서 행사에 참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으니.
“현아, 항상 느끼는 건데 이 호텔은 참 영화 속 건물 같구나?”
호텔 입구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호텔을 바라봤다. 정말이었다. 온통 분홍색인 외관은 물론이고 친절한 지배인 또한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떠올리게 했을 정도였으니. 때마침 러시아식 구형 택시가 도착했다.
“차이콥스키?”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우리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다름 아닌 일전에 내가 만났던 털보 기사였기 때문. 첫 손님부터 주머니 속을 든든하게 채우려 했던 털보 기사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내가 애진즉 입 모양으로 200루블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
“다 왔습니다, 손님.”
그래도 미운 정이 고운 정이라고 털보 기사에게 20루블을 더 얹어주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않은가. 저 사람도 결국 누군가의 아버지일 테니. 구시대의 영광 레닌 동상을 지나쳐 도착한 차키콥스키 동상 앞이었다. 허나 한참을 기다려도 티호노프 박사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손목시계를 바라보다 못한 아버지가 한 말씀 하셨다.
“티호노프 박사가 생각 보다 늦는구나?”
“원래 러시아 사람들이 약속시간을 그렇게 제때 맞추진 않는데요, 아버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약속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민족은 그리 흔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면 티호노프 박사가 아랍계열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삶에서도 느꼈었지만 약속시간에 늦은 중동 바이어가 인샬라(신의 뜻대로.) 하며 변명할 때는 꿀밤을 때려주고 싶은 정도였으니. 그때였다.
“저기 오네요?”
멀리서 봐도 척 눈에 들어오는 낡은 자동차였다. 웬만한 올드카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연식이 오래되어 보였는데 아마도 부품이 전부 제각기이리라. 우리를 발견한 티호노프 박사가 창문을 손으로 마구잡이로 내려서 열고는 손을 연신 흔드는데 차가 앞뒤로 흔들렸다, 아아 그러지 말라고. 혹여 사고라도 날까 보는 사람이 더 무서웠기에.
“미스터 캉,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블랙 마틴이 중간에 퍼져서 말이죠.”
“블랙 마틴이요?”
“이 녀석 말입니다. 냉각수가 전부 말라비틀어진 걸 확인하고는 곧장 응급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하마터면 블랙 마틴을 갓길에 버려두고 올 뻔했지 뭡니까. 앞으로 저랑 이십 년은 더 함께해야 할 친구인데 말이죠. 하하.”
어째 낡은 자동차에 이름도 있었던 모양. 그나저나 응급 치료를 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취임식이 끝난 후에는 아무래도 택시를 타고 돌아가야겠다. 자칫했다가는 블랙 마틴보다 내가 먼저 응급실에 실려 갈지도 몰랐으니.
“박사님, 생각보다 사람이 엄청 많은데요?”
단순한 학과장의 취임식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을 찾은 인원이 꽤 많지 않은가. 입구부터 사람들이 드글드글 거리는 것이 취임식장에는 얼마나 많을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 뭐하지만, 저희 사촌 형님께서 러시아 클래식계에선 꽤나 알아주는 분이십니다. 갑자기 몇 년 동안 세계를 여행하시다가 돌아오시는 통에 얼굴을 못 본 지도 꽤 되었죠. 참,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이런 행사가 있을 때면 가족들이 총출동한답니다. 저 앞에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제 친척입니다. 저 뒤쪽에도요.”
티호노프의 말처럼 정말 닮은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러시아 사람이라 전부 비슷하게 생긴 줄 알았거늘. 알고 보니 다들 혈연관계였던 모양. 그나저나 참석장을 지닌 티호노프를 앞장세워서 걸음을 옮기는데 경비원 아저씨가 나를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안톤 티호노프 학과장님의 취임식장을 찾으시는 손님분들은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학부생들이 취임식장을 안내해주고 있었는데 어째 낯익은 인물이 보였다. 짙은 갈색 머리하며 기다란 손가락이 꽤나 인상에 남았던 청년이었으니. 이번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그 전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무의식적으로 취임식장을 안내하던 청년의 시선이 불현듯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곤 다시 용수철처럼 고개를 팩하니 돌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
청년의 눈이 점차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누가 보면 귀신이라도 마주한 사람 마냥.
* * *
끼리릭―!
기숙사 식당 문이 부서지기라도 할 듯 비명을 내지르며 화들짝 열렸다. 식사를 하고 있던 학생들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것도 그럴 것이 취임식장 안내를 맡고 있어야 할 녀석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식당까지 뛰어왔지 않은가. 조금만 있으면 교대를 해줄 것인데 그런데도 이렇게 부리나케 달려온 것은 이 달콤한 수프 냄새를 참지 못한 것이 분명할 터.
“막심, 조금만 있으면 교대인데 뭐가 급하다고 이렇게 뛰어와? 네가 자리를 비우면 학과장님 취임식을 찾은 손님들이 길을 잃을 거 아니야. 우리 음악원이 얼마나 큰지 벌써 까먹은 거야?”
가장 가까이서 오믈렛을 먹고 있던 덩치 큰 여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큼직한 손아귀에 굳은살이 많이 배인 것이 아마도 타악기를 연주하는 학생이리라. 그제야 나머지 학생들이 안도하는 눈치였다. 만약 갈색 머리 막심이 허무맹랑한 변명을 할 적에는 저 여학생의 손에 들리는 것은 채가 아니라 몽둥이가 될 테니.
“유, 유, 유!”
헌데 막심이 마치 헛것을 본 사람 마냥 횡설수설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학생들은 막심이 단순히 달콤한 수프 냄새에 취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흥분해서 말을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막심의 어깨 위에 여학생의 두툼한 손바닥이 닿았다. 마치 고장 난 오뚝이 인형을 고치듯 어깨를 잡은 손에 몇 번 스냅을 싣자 막심의 몸이 바이킹을 타는 것 마냥 세차게 흔들렸다.
“막심, 제대로 말해!”
경종을 울리는 목소리에.
“유, 유령이 나타났어!”
“유령?”
“그래, 그때 내가 봤다던 아이 말이야.”
이미 모스크바 음악원에 파다하게 퍼진 전설이었다. 몇몇 교수들은 수십 년전 유행처럼 번졌던 차이콥스키 유령의 뒤를 이을 괴담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설마하니 그 유령이 다시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서라, 것도 이 벌건 대낮에? 허나 뒤이어진 외침에 식사를 하던 학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유령이 취임식장에 앉아 있다고―!”
*
벽면에 붙은 베토벤, 모차르트, 차이콥스키, 글린카, 루빈시테인의 눈동자가 형형하다. 평소에는 연주회장으로 사용하는 공간을 오늘만큼은 취임식장으로 쓰는 모양. 누가 보면 유명한 음악가의 독주회가 있다고 생각이 들 만큼 1층과 2층까지 전부 만석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왔는지 계단에도 사람들이 서 있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어?
그때였다.
‘마에스트로?’
러시아의 거장 알렉세이가 단상 위로 올라서고 있지 않은가. 치켜 올라간 눈썹을 물론이고 날카로운 눈동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저분이 바로 모스크바 음악원장이십니다.”
“예?”
“러시아에서 아주 알아주는 마에스트로이시죠. 얼마나 카리스마가 넘치는지 별명이 창공의 독수리입니다.”
설마하니 마에스트로가 모스크바 음악원장을 맡았을 줄이야. 후학을 양성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던 분이었으니. 뒤이어 또 다른 인물이 단상 위로 올라서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나에게 눈치를 주셨다.
‘노신사?’
러시아 항공에서 만났던 노신사였다.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눴던 인물이니 얼굴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눈썰미 좋은 아버지 또한 단박에 알아보신 듯했다. 저분이 도대체 여기에는 왜?
“제 사촌 형님이십니다. 이번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학과장을 맡게 되셨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안톤 학과장의 취임사가 마치 운명교향곡처럼 들릴 정도였지. 열띤 환호를 받는 것은 보니 정말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손꼽아 기다렸던 교수였던 모양. 고약한 인상의 마에스트로마저도 지금만큼은 크게 미소짓고 있지 않은가. 취임식이 끝나갈 즈음 알렉세이가 마이크 앞으로 다가섰다.
“오늘 취임식을 찾아주신 수많은 분들께 모스크바 음악원을 대신해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특히 아직 독주회의 일정이 남았음에도 모교를 찾아준 바이올리니스트 안드레이와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을 수상하고 축하공연을 준비 중인 카를레야.”
꽤나 유명한 인물들이 참석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브뤼셀에서 이곳 모스크바까지 취임식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주신 영원한 마에스트로 구스타프께도 깊은 영광을 표하는 바입니다.”
구스타프? 영원한 마에스트로도 음악원을 찾았다니! 생각보다 엄청난 행사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났다. 그때였다. 제자리로 돌아가려던 알렉세이의 시선이 한 곳에 고장 난 것처럼 멈춰 선 것은.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그의 눈동자에 모두가 의아함을 표하고 있었다.
꿀꺽―!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것도 그럴 것이 알렉세이가 마치 ‘시건방진 꼬맹이?’라며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일순 알렉세이의 볼이 천천히 실룩였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러고 보니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최연소 대상을 수상한 분도 몰래 참석을 해주셨군요.”
알렉세이가 손을 들어 청중석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오랜만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