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78)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78화 >
‘도대체.’
언제부터 들어와 있었던 거야?
이름 모를 동양인 꼬마였다. 눈물을 훔쳐내고 노려봤지만 돌아오는 거라곤 능숙한 러시아어. 그 발음이 너무도 유창해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아무래도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일 것이다. 헌데 아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폐부를 휘젓는 것만 같다. 빠른 박자감은 물
론 내 오른손의 문제까지 단박에 알아채는 것이 아닌가. 무어라 반박하고 싶지만, 시선이 마주치자 목울대가 절로 긴장을 머금은 채 경직된다. 도대체 어린 아이의 눈빛이 어찌 저럴 수가 있는 건지.
“시작해보죠?”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담긴 목소리였다. 자그마한 아이의 오른손이 마치 달에 첫발을 내디뎠던 암스트롱처럼 거침없이 건반을 향했다.
두두두둥―!
혼이 쏙 달아날 지경이었다. 귀신을 마주했다고 해도 단언컨대 이보다 더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왼손의 빠르기를 오른손이 마치 연결된 것처럼 따라가지 않는가. 하물며 호흡 호흡마다 내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기까지. 분명 한 번도 호흡을 맞춰보지 않은 상대였다. 헌
데 아이는 원래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 오른손을 한 치의 오차 없이 복사해내고 있었다.
“정신 차려요―!”
경종을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마터면 또다시 박자를 놓칠 뻔했으니. 그 순간 칸타빌레, 아이의 오른손이 노래하듯이 다채로운 음색을 구축하고 있지 않은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기에.
“허리―!”
자세가 구부정해질 때마다 경종이 울렸다. 마치 옆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아이는 연주에 시선을 고정함에도 내 모습을 훤히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날카롭던지 여태껏 만나보았던 그 어떤 교수보다도 긴장을 머금게 했으니. 나는 입술을 질끈 깨
문 채 안간힘을 써가며 왼손을 움직였다. 그제야 아이가 흡족하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허어억,허억.”
연주가 끝나자,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토해냈다. 분명 왼손만 움직였을 뿐인데 평소보다 훨씬 빨리 체력이 소진된 것 같았으니. 등 뒤를 흠뻑 적신 장대비가 그 방증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개운한 기분이다. 드디어 내 문제점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으니.
“이제 혼자서 연주해봐요, 2악장까지.”
아이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이의 손이 내 어깨맡을 잡은 것은.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말해주고 있었다. 무엇을 망설이냐고. 그제야 기다란 열 손가락이 건반 위로 내려앉았다.
그 순간,
두웅―!
방랑자 환상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종전의 버릇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의 가르침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자세와 오른손이 이상해질 때면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리는 것만 같았으니. 거짓말 같은 광경이었다. 첫마디에 연타
되는 리듬이 점차 속도를 떨어뜨리며 반종지로 2악장을 끝마치자.
“됐, 됐어―!”
전율이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세차게 떨리는 것은 물론 감격에 차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나는 곧장 고개를 돌려 아이를 찾았다. 고마움을 말로 다 표현 못 할 정도의 은인이었기에. 헌데 아무리 주위를 살펴보아도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
-홀홀, 보기 좋구나.
벽에 걸린 차이콥스키 초상화가 그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으니. 누가 초대원장 아니랄까 봐 이곳저곳에 얼굴이 많이 걸려있기도 하다. 그래, 이 정도 도와줬으면 된 것이다. 입장료라고 생각하지 뭐, 앞으로 그 버릇을 완전히 고쳐낼지는 자신의 역량에 달린 문제였으니.
다시 연주회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지잉.
이번에는 바이올린 선율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연습실이 저곳 한 곳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 하지만 이번에도 들리는 선율이 그리 탐탁지 않다. 마치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것 마냥 껄끄럽기 그지없으니. 아서라, 내가 무슨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그때였다.
-홀홀, 그냥 지나칠게야?
꼭 차이콥스키가 눈치를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물며 귓가를 건드리는 이 선율들은 정말 듣고 있기 곤란했다. 작곡을 공부해서일까, 악보를 거스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이건 아예 재창조를 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만약 모차르트가 살아있었다
면 이 선율을 결코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관짝을 박차고 일어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후―!”
운 좋은 줄 알라고, 연주회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휙하니 돌렸다. 재능이 없는 연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도 않았을 터. 같은 음악가로서의 정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터였다. 더불어 이 찝찝한 기운도 어서 빨리 떨쳐내고 싶었으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도대체 몇 명이나 봐버린 거야?’
겉잡아도 너댓명은 봐준 것 같았으니. 발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마다 껄끄러운 선율이 내 귓가를 사로잡으니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더랬다. 그렇게 마지막 연습실을 나서니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을 정도였다. 그저 연주회가 끝나지 않았기를 바랄 뿐. 한편 차이콥스키
초상화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멀어지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연주회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1부 공연이 끝난 후 브레이크타임이었으니 이보다 타이밍이 좋을 수는 없었지.
“마담, 혹시 옆에 자리가 있나요?”
“아니요, 없답니다. 어서 앉으세요.”
맘씨 좋아 보이는 러시아 아주머니가 나를 반겼다. 아주머니는 땀을 흘리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자신의 물과 수건까지 내어 주셨다. 오오, 마더 러시아―!
그리고는 자신의 아들이라며 옆자리에 함께 앉은 우락부락한 청년을 소개해 주었는데 아무리 봐도 지금 당장 대학 럭비팀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순간 덩치라면 빠지지 않는 북유럽의 에릭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제 아들은 13살이랍니다, 소년은 몇 살인가요?”
하마터면 사레가 걸릴 뻔했다. 때마침 연주회 2부가 시작되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저 우락부락한 청년에게 형 소리를 들을 뻔했으니. 주먹이 무슨 내 얼굴만 하지 않은가.
과연,
‘괜히 세계 5대 음악원이 아니구나.’
무료 연주회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물론, 아직 완벽히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들이었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눈과 귀가 이토록 행복할 수가 있다니. 이들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을지 가히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
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마지막 무대는 바이올리니스트 안나의 연주입니다.”
청중들의 관심이 일제히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일전에 봤던 모습은 결코 내 착각이 아니였었다. 순백의 드레스가 백금발과 조화를 이루니 정말 백장미가 사람으로 변해 걸어 다니는 것 같았으니. 하물며 반짝이는 초록 눈동자는 어떤가, 웬만한 여배우는 상대도 되
지 않을 만큼 우수에 가득 차 있다. 활을 들어 올리는 자태마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니 청중들 모두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지잉―!
날카로운 선율이 천장에 닿았다. 내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한없이 가녀려 보였던 소녀가 저토록 단숨에 성장하다니. 더 이상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긴장을 풀어주지 않아도 되었다.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35번, 초대원장이었던 그가 들었다면 기립
박수를 쳐줄 것이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은 악보에도 겹세로줄 위 페르마타는 있는 법. 마지막 피날레가 흩날리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올 때.
‘오랜만이야, 안나.’
거짓말처럼 안나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 * *
두근 두근 두근.
손질된 긴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출렁였다. 세찬 고동소리가 들리는 것이 마치 누군가 심장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연주가 끝난 뒤 협주를 맡았던 지휘자와 인사를 나누고 무수한 악수를 나눴다. 청중들의 환호와 교수님의 칭찬에도 안나의 머릿속에는 계속
해서 한 장면만이 반복된 필름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분명 현이었다. 특히나 마지막 입 모양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당장 무대에서 뛰쳐 내려가고 싶었지만 애써 억눌렀다. 최대한 서둘러 연주회장을 찾았지만 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설마 자신이 보았던 것이 착각일까? 안나는 순백
의 드레스를 두 손으로 잡은 채 잰걸음으로 내달렸다.
“하만 아저씨······!”
안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의 경비를 총괄하고 있는 하만을 찾아갔지만 이미 선객이 여럿 있었기 때문. 하나같이 안면이 있는 학부생들이었다. 피아노, 바이올린, 심지어는 비올라에 이르기까지. 협연하다 보면 만날 때가 종종 있었으니. 그
들도 안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누가 뭐래도 안나는 현재 모스크바의 떠오르는 별이었기에.
“안나, 설마 너도 동양인 꼬마를 찾으러 온 거니?”
이들이 어떻게 안 것일까?
안나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하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이 앞에 있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란다. 동양인 꼬마가 갑자기 연습실에 나타났다가 또 갑자기 사라졌다는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리여야지. 단체로 환각에 시달리는 건 아닐 테고, 유령이라도 본 거 아니니? 키가 이 정도 오는 애라면 고작 해봐야 열 살도 안 됐을 텐데 어
떻게 너희들을 가르칠 수가 있단 말이야?”
안나는 일순 샤펠에서 만났던 음악의 신을 떠올렸다. 자신들의 문제점을 단박에 찾아내던 소년을. 하지만 학생들은 저들도 억울하다는 모양새다. 분명 제 눈앞에 있었던 동양인 꼬마가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의아할 만도 하다. 경비원 하만은 여전히 유령을 본 게 아니
냐고 말하고 있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정말 유령이었을까…?”
어느 피아니스트의 떨리는 목소리처럼 학부생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저들이 생각하기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었기 때문. 그 누가 그토록 단숨에 모두의 문제를 파악해 낼 수 있겠는가, 그건 차이콥스키가 살아 돌아와도 힘들 것이다. 왠지 모여있는 사람
들의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으니. 모스크바 음악원에 꼬마 유령의 전설이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었다.
*
“티호노프 박사가 참 좋아하겠구나, 현아.”
아버지와 함께 숙소를 나서 박사의 연구소로 향했다. 어째 영락없이 도축장에 끌려가는 망아지 같지 않은가. 며칠 전 모스크바 음악원을 갔다가 늦은 시각 되돌아오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한바탕 혼쭐이 난 뒤였다. 아무렴, 나라고 연락을 안 하고 싶었겠는가. 연주회에
몰두해 있다 보니 시간을 깜빡 잊고 만 것이다. 안나와 인사도 못 나누고 부리나케 택시를 잡아탔을 정도였으니.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수십 년 만에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맞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라이핀의 상용화가 성공한다면 앞으로 많은 분야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일례를 들어보죠. 1m2의 그라이핀 한 층으로 투명한 해먹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위에는 현처럼 작은 체구의 소년이 올라타도 문제가 없을 만큼 튼튼할 거예요. 그리고 해먹의 무
게는 1mg이 되지 않습니다. 강도는 강철보다 수백 배는 높은데 말이죠. 이 점을 이용한다면 무수한 업종에 쓰일 수 있을 겁니다. 스포츠, 군사, 등등 전기전도성이 높으니 전자는 말할 것도 없겠죠오?”
누가 수다쟁이 박사 아니랄까 봐, 날 붙잡고는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오죽하면 이제는 티호노프 박사의 성대모사까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따금 대화를 듣고 있다 보면 박사의 선견지명에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대는 언제나 변화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에요. 현, 저는 앞으로 머지않은 미래에 사람들이 전화기로 모든 것을 즐길 것이라 예상합니다. 단순히 음성통화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트라넷은 물론 영상을 보고, 현금을 대신해 결제도 하고, 가상현실도 가능하도
록 만들어줄지도 모르죠. 참 이건 제 친구들이 저한테만 은밀히 알려준 이야기입니다.”
“친구분이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미국립 과학재단이 아니면 NASA에 있는 것이 아닐까.
“헐리우드에서 영화감독을 하고 있답니다. 형제끼리 아주 합이 잘 맞거든요.”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애써 참아냈다. 설마하니 영화감독일 줄이야. 어찌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지. 공상과학이야말로 미래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었으니. 우리도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매 순간 지나치고 있지 않은가.
“참, 현 음악에 관심이 많다고 그랬나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내가 국제콩쿠르에서 대상을 차지한 것은 말하지 않은 모양. 티호노프 박사는 클래식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 그저 날 단순히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기회만 잡으면 화학도로 전향시키려 하는 것
일 터.
“제 사촌 형님이 이번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학과장으로 취임하는데요. 시간이 괜찮다면 축하를 해주러 갈 생각인데, 현도 함께 가겠어요? 음악가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바라마지 않는 곳이니까요.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더욱이 흥미로운 것은 지금 모스크바 음악
원에 엄청난 전설이 내려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근데 무슨 전설을 말하는 것일까.
“아 글쎄, 꼬마 유령이 음악원에 돌아다닌답니다. 운이 좋으면 우리도 꼬마 유령을 만날지도 모르죠.”
꼬마 유령?
왜일까, 이상하게도 귀가 간지러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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