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82)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82화 >
“아버님, 날이 쌀쌀해요.”
처서 무렵의 마지막 더위도 한풀 꺾였다. 여름 내내 울던 매미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종적을 감췄고 새벽녘의 풀잎에는 백로가 묻어있다. 어느덧 가을의 기운이 완연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어멈아, 내 이 정도로 고뿔이 걸릴 만큼 허약한 체질이 아니다.”
정말이었다. 왕회장은 동년배의 노인들에 비하면 족히 열 살은 더 어려 보일 만큼 정정했으니. 시력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치아 또한 나이에 비해 모난데 없이 희고 골랐으니 건강하나는 타고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몸에 좋은 것이라면 물불 안 가
리고 찾고 보는 성정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온 게 아니냐?”
황금잉어들이 흩뿌려지는 잉어밥에 수면위로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아버님, 오늘 평창동에서 선약이 있으시지요?”
잉어밥을 뿌리던 왕회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렴,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올 위인이 아니었으니. 왕회장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들어나 보자는 심정.
“저도 그 선약에 참석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몸쪽 가득 찬 직구이지 않은가. 어떻게 이리도 맹랑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들기도 했으니.
“오늘 약속에 누가 오는 줄 알고 있느냐?”
“예, 아버님.”
“광석이와 중석이가 오는 것을 아는데도 그렇단 말이지?”
청와대 경제수석과 한국은행 총재를 마치 손주 대하듯이 말하는 왕회장이었다. 것도 그럴 것이 두 사람 다 제일그룹 장학생으로 왕회장이 손수 키워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
“이유는?”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지. 물론, 왕회장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주관적으로 결정 내린다는 뜻은 아니다. 정부의 정책과 방향성을 남들보다 열 발자국은 앞서 알 수 있다는 정도.
“어멈아, 그럼 네가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더냐?”
등가교환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타고난 장사치가 혈육을 가릴 쏘랴. 하지만 며느리를 바라보는 왕회장의 눈가에는 이미 흡족함이 가득했다. 웬만한 남자들보다도 낫지 않은가. 저토록 담대함과 영민한 머리는 타고나는 것이었으니.
“며늘 아가, 만약 네가 남자로 태어났어도 난 너를 어떻게든 우리 집안의 식구로 들였을게다. 한편으로는 네가 여자인 것이 나와 일선이에게는 잘된 일이지. 자칫했으면 저놈보다 더한 호랑이가 나타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야.”
나이가 들면서 줄어드는 것은 밤잠이고, 늘어나는 건 사람욕심이었으니.
“참, 한 녀석 더 있구나. 꼭 우리 집안 사람으로 만들 녀석 말이다.”
임혜라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왕회장이 남은 잉어밥을 연못 위로 기분 좋게 흩뿌렸다.
*
에취―!
코끝이 간질간질한 것이 재채기가 나오려는 모양. 어째 환절기라 그런 것인지 모스크바의 새벽보다도 더 쌀쌀한 것 같지 않은가. 환기를 시키려 창문을 열었다가 졸지에 감기에 걸리게 생겼으니. 부리나케 창문을 닫고 잠옷을 여몄다. 다시 침대로 향하려는 찰나.
“강현 학생, 아침 먹어요.”
가정부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모스크바에서 조식을 먹었던지라 깜빡했다. 이촌동의 아침은 수탉이 울기도 전에 시작된다는 것을. 고소하고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감도는 가운데.
“강서방, 화학 연구소는 어떻던가?”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렴, 러시아 화학 연구소에 관해 객관적인 서면보고가 올라갈 테지만 아버지의 주관적인 평가를 듣고 싶다는 것일 테지. 아버지가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합성 설비가 열악하기 하지만 이미 그라이핀에 관해 저희 못지않게 연구를 거듭하고 있으며 소재 개발부문에서는 뛰어난 논문을 다수 발표했을 만큼 기술적 자원이 풍부합니다. 하물며 그라이핀 상용화와 관련한 아이디어도 뛰어나고요. 연구소의 인적자원만을 고려했을 때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소재 개발이 소재 혁명으로 거듭나고 있는 시대였다. 아버지의 말처럼 인적자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 캐시카우가 되는 기초소재의 기술진도 동주의 주춧돌이지만 앞으로 그라이핀의 연구진 또한 또 하나의 주춧돌이 되리라.
“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박사는 어떠하던가?”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만 말 그대로 괴짜입니다······.”
아버지는 저도 모르게 뒷말을 흐렸다. 블랙마틴의 기억이 너무나도 강렬했기 때문일 테지. 그때 할아버지가 불현듯 나를 바라봤다.
“현이 네가 보기엔 어떻더냐?”
오프더레코드를 원하시는 것일까.
“저는 괴짜라 더 마음에 들던걸요.”
“괴짜라서?”
처음에는 그저 동명이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허나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되지 않았던가. 티호노프 박사의 진면목을. 양파껍질이 벗겨지듯 놀라운 것이 한둘이 아녔지. 특히나 그가 그리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은 내 입장에서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애초에 새로운 소재를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틀에 박혀 고리타분한 사람보다는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 사람이 더 적합하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 티호노프 박사님이 제격이지 않을까요?”
한국의 보수적인 문화는 연구소에서도 그대로 자리매김했는데, 그 예로 선임 연구원의 말에 연구원이 토를 못 다는 것만 봐도 그랬다. 뭐, 어느 사회조직이든 안 그렇겠는가. 내가 있었던 검찰은 더 심하면 심했지 못하지는 않았으니.
헌데 티호노프 박사의 연구소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말단 연구원조차도 선임 연구원, 수석 연구원의 의견에 반박을 자유롭게 하지 않았던가. 어찌 보면 시도 때도 없이 있던 티타임 또한 티호노프 박사의 깊은 생각이었다. 조직의 수직관계를 허물고자 만든 것이었
으니, 그들이 동주로 들어온다면 분명 딱딱하게 굳은 톱니바퀴에 윤활유를 붓는 격이 되리라.
아침식사가 끝나고,
“흐음.”
조간신문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다. 것도 그럴 것이 하루가 멀다 하고 기업들이 부도의 위기에 빠지지 않는가. 오죽하면 외국은행들이 한국을 투자 위험국으로 지정했다는 기사가 보도되기까지. 총리가 나서서 다급하게 경제위기를 전면 부인하기는 했
지만 오히려 불안함만 더욱 증폭되었지. 역사는 흐름이 빨라졌다뿐이지 그 틀은 지난 삶과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정재계에서도 수많은 별들이 지기 시작했으니. 한편 궁금하기도 했다. 재계의 거두라 불리는 왕회장은 지금 즈음 무슨 생각일지.
“현아, 오늘 할 것이 있더냐?”
아무래도 작업실에 가서 악보 작업을 할 생각이었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이 심상찮다.
“아무 일도 없다면, 할애비와 함께 어디 좀 가자꾸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의아한 시선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봤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시선은 여전히 조간신문 헤드라인에 닿아있었으니. 1997년 그해의 악몽이 현실이 되어 되살아나고 있었다.
* * *
“임자, 나왔소.”
할아버지와 도착한 곳은 할머니가 계시는 선산이었다. 결혼기념일은 물론 기일도 아니었는데 이곳을 찾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지만 되레 생각해보면 꼭 이유가 있어야 찾아올 곳도 아니었으니. 난 자리에서 일어나 산소에 핀 잡초를 뽑았다. 관리인이 있기는 하지만 여
름 늘그막에 무성히 피는 잡초들은 고개 돌린 틈에도 다시 자라나지 않는가.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기특한 모습으로 바라보셨다.
“임자가 좋아하는 것도 가져왔지.”
언제 준비하셨는지 모를 호박전이었다. 하물며 할머니가 좋아했던 흰 우유까지. 아무리 봐도 할아버지는 로맨티시스트가 분명했다. 산속 새소리가 운치를 더해줄 즈음 할아버지가 운을 띄웠다.
“현아.”
“예,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결심이 설 때마다 할머니의 산소를 찾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만큼 뜻깊은 장소였으니.
“범경이를 제주도로 내려보내고 많은 생각을 했단다. 과연 동주를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길일까 하고 말이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들이지만 영 못 미더우니 강서방에게 모든 것을 일임할까도 했지만 알지 않느냐. 네 아비는 그리 모질지 못하다는 것을.”
어쩔 수 없었지. 아버지의 타고난 성정 자체가 경영가보다는 연구원에 가까웠으니. 중상모략이 넘치는 정글 같은 사내정치와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현이 너라면 아주 잘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린 네게 이런 말을 하는 할애비가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다오.”
“할아버지. 기억 안 나세요? 동주가 절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손을 내밀기로 이미 2년 전에 약속했잖아요. 작은 삼촌이 또 그러면 제가 제주도가 아니라 아예 대마도에 보내버릴게요.”
아무렴, 대마도가 아니라 큰집에 보낼 생각이다. 작은 삼촌의 여파로 인해 동주가 허무하게 무너질 뻔했으니. 난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마주 잡았다. 지난 삶과 달리 권력과 물욕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언제나 그랬듯 동주를 지켜낼 것
이다.
“오늘 현이 너를 특별한 자리에 데려가려 한다. 하지만 네가 싫다면 가지 않아도 좋단다.”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허나.
“동주를 위하는 자리라면 어디든 괜찮아요.”
그 순간 창공을 가로지르던 이름 모를 새가 크게 선회했다. 마치 내 다짐에 응답하기라도 하듯이.
*
‘여기는?’
차창 밖으로 거대한 양옥집이 보였다. 높다란 붉은 담벼락이 성곽처럼 내부를 한치도 보여주지 않고 있었고 오늘따라 경비는 유독 삼엄했으니. 설마하니 할아버지가 말했던 특별한 자리가 평창동 대저택을 말하는 것일 줄이야.
하지만 할아버지의 발걸음의 무게가 평소와는 달랐다. 상당히 진중해 보이는 모습이셨으니. 울창한 조경수가 펼쳐진 정원을 가로질러 갈 즈음이었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정장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저택에서 걸어 나오는데.
“어?”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버렸다. 낯익은 인물이었기 때문. 분명 희끗했던 머리가 검어지고 얼굴에 주름도 적었지만 지난 삶 사법연수원에서 내게 제일그룹 장학생을 제안했던 노교수이지 않은가. 아마 이맘때쯤이면 사법연수원이 아니라 대검에 있을 텐데.
“현아, 아는 분이더냐?”
“아니에요, 할아버지.”
그래, 마담뚜라고 다르겠는가. 저 사람 또한 왕구렁이 영감님의 장학생 명단 중 한 명일 테지. 지난 삶의 인연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감회가 새롭긴 하네. 걸음을 옮기다 고개를 슬쩍 돌려봤는데 때마침 고개를 돌리던 노교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
에도 긴가민가한 기색이 가득하다. 내 눈빛 때문이리라. 걱정마십쇼, 이번 삶에서는 다시 만날 일 없으니까.
그나저나.
“유하네 할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으신가 보네요?”
평소 같았으면 앞장서 우리를 마중 나왔을 왕구렁이 영감님이 보이지 않았으니. 저택에 내리깔린 분위기 또한 심상찮았다. 도대체 오늘 자리가 무슨 자리이기에. 의문이 깊어갈 무렵 임혜라 이사장이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유회장님.”
“아닐세, 임작가. 내가 약속시간보다 늦은 것 같아서 걱정이구만. 선산에 다녀오는 길에 차가 막힐 줄 누가 알았겠나.”
“아니에요, 다들 방금 전에 당도하셨어요. 제때 맞춰서 도착하신걸요.”
다들?
그 순간 임혜라 이사장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헌데 눈빛이 묘하다.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조심스레 허리를 낮춘다.
“아줌마는 이번 모임에 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현이는 한방에 되는구나. 역시 우리 유하가 좋아할 만해-!”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으니. 일단 가타부타 토를 달지 않고 임혜라 이사장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응접실이었는데 임혜라 이사장의 말대로 이미 선객이 있는 모양. 고급 창호지로
된 미닫이문이 조심스레 열리는 순간.
······!
내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상석에 앉아계신 왕구렁이 영감님 때문이 아니었지. 응접실에 앉아있는 다른 손님들 때문이었다. 정원에서 마주했던 노교수가 마음의 호수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라면 이번에는 요동을 치게 하기 충분했기에.
꿀꺽―!
목울대가 절로 크게 출렁였다. 왕구렁이 영감님이 할아버지에게 손님들을 소개하려 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이곤 의아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는데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도 내가 왜 이 자리에 초대받은 것인지 모르겠으니까. 손님들이 누군지 알
고 있냐고? 내 팬티색은 몰라도 저 사람들 얼굴을 어찌 잊을 쏘랴. 요즘 매스컴에 하루가 멀다하고 얼굴을 비추는 인물들이 아닌가.
청와대 경제수석과 한국은행 총재.
철통 보안을 자랑하듯 미닫이문이 닫혔다.
다가오는 1997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한 발자국 들어선 기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