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83)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83화 >
“파가니니의 일화를 보면 눈을 의심하게 하는 것들이 있죠. 일례로 검은 까마귀의 기적이 있어요. 볼로냐의 소도시에는 장례식날 까마귀들이 와야 망자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는 풍습이 있습니다. 허나 그날은 우천이 며칠 동안 계속되어 까마귀는커녕, 참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죠.”
투두두둑, 때마침 창밖으로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유족들은 어떻게든 까마귀를 부르고자 썩은 돼지고기까지 내놓았지만, 흙과 뒤섞인 비냄새를 뚫을 수는 없었죠. 그들은 망연자실했습니다. 이대로 아버지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할까 봐서요. 그때 그가 나타났습니다. 파가니니가 말이에요.”
마른 입술이 신이 나 들썩였다.
“여행 중이던 파가니니는 유족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곧장 바이올린을 켰습니다. 라르고, 폭넓고 느린 음색으로 시작한 선율이 빗소리마저 뚫고 선명히 울려 퍼졌죠. 기록에 따르면 마치 장대비가 반주처럼 들렸다고 합니다. 슬픔에 잠겨있던 유족들조차
도 그의 선율에 취해 눈과 귀를 빼앗겼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거짓말처럼 종적을 감췄던 까마귀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짙은 회색 하늘이 검어질 정도로 말이에요―!”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그라모폰의 수석 편집장 애덤 위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레 예술가들의 일화는 과장되거나 날조되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니콜로 파가니니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오죽하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소문이 났겠는가. 그 탓에 죽어서도 교
회에서 무덤을 반려했을 정도이니.
“감독님, 설마 그 일화를 각본에 인용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왜요? 편집장께선 정말 그 기록들이 거짓이라고 생각합니까?”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리스트, 브람스, 망고레 같은 뛰어난 작곡가들이 반한 불세출의 바이올리니스트이지. 흑마법을 부리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음악 영화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반감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되는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특히나 니콜로 파가니니와 관련해 처음 제작되는 영화이지 않은가. 그 누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고.
“편집장, 전 영화상에서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꾸밀 생각이 없습니다. 만약 주인공이 바이올린을 켰는데 까마귀가 날아온다면 그것으로 장면이 완성되는 것이겠죠.”
허무맹랑한 이야기, 하지만 감독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 가득해 보였다.
“감독님. 마치 이번 영화의 주인공이 니콜로 파가니니, 본인이라도 된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만.”
“틀린 말은 아닐 지도요.”
“예?”
그때 장피에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 찾으러 가봐야겠습니다. 꼭꼭 숨어서 나오지 않는 파가니니를 말이에요.”
*
응접실에 묵은 향이 감돈다.
지난 삶에서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더러 만났었다. 삼선의원이었던 장인 덕분에 여러 곳에 얼굴도장을 찍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구시대의 권력가들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설마하니 저 두 사람마저 왕회장의 장학생이었을 줄이야.
“특융을 통해 종금사를 도와주고 있는 실정이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어르신.”
“얼마나 버틸 것 같은가?”
“두 달을 채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종금사가 무너지면 시중 은행들이 도산한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자산부채 이전형식으로 은행들이 인수합병 될 것입니다. 저희 쪽에서는 지금 적어도 열 곳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르신.”
“기존의 머리들은 어떻게 하려는가?”
“아마 대거 교체할 듯싶습니다. 지금 하도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통에 이대로 직위를 강행했다가는 역풍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다들 옷 벗는 것쯤 예상할 겁니다. 쇠고랑 안 차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겠지요.”
속된 말로 금융권 인사는 능력이 아니라 푸른 집의 선택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나 은행장이 그러했지. 관치금융이 만연하던 시대이니 푸른 집의 입김 한 방에 은행의 대표가 바뀌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한 마디로 눈앞에 있는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가 대한민국 금융계
의 숨통을 쥐고 있는 실세라는 뜻이다.
“앞으로의 방향을 말해보게나.”
마치 부하직원에게 프레젠테이션을 받는 직속 상관 같지 않은가. 웃긴 것은 두 사람의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누가 보면 왕구렁이 영감님이 이 나라의 실권자 같았으니. 어찌 보면 내가 그동안 무덤덤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왕회장은 그야말로 훗날에도 전설이라 불리는
인물이었으니. 괜히 손일선 사장이 연로한 자신의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다. “대한철강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부도유예협약과 화의를 통해 시간을 끌고 있지만 결국 줄도산을 막지 못하리라는 것이 저희의 판단입니다. 대기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기업들의 부채비율이 현시점으로 450%를 넘어섰습니다. 이미 디폴트에 빠졌다고 봐도 무방합
니다.”
그때 왕회장이 나를 슬며시 바라봤다. 일전 내가 했던 이야기 때문일 터.
“이다음부터는 현이 네가 말해보아라.”
왕회장의 말에 좌중의 시선이 쏠렸다. 특히나 장학생 두 사람은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꼬마가 이런 자리에 참석한 것도 의아할 텐데 왕회장이 질문까지 하니 판단이 안 서기도 할 테지.
“결국, 자력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겁니다.”
단호한 대답에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가 눈을 크게 떴다.
“그다음은?”
“스스로 해결을 못 하니, 도움을 받을 수밖에요.”
“도움을 받지 않고 일어설 방법은 없겠느냐?”
“신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외부에서 생긴 문제가 아닙니다. 실상은 내부가 곪아서 생긴 문제죠. 이미 팔다리가 잘렸는데 어떻게 일어설 수가 있을까요. 하물며 정부는 도움을 받는 사실조차도 국민들에게 숨기기 급급할 겁니다.”
두 사람은 물론, 임혜라 이사장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내게 일전에 이야기를 들었던 할아버지와 왕회장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부가 왜 그렇게까지 할 거라 보느냐.”
국민들의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는다는 명목이겠지만 실상은 간단했다. 후폭풍이 장난 아닐 것이기 때문. 구제금융을 받게 된다면 따르는 조건이 너무나도 명확하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목적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을 것이 불 보듯 뻔했고, 빈부격차는 나날이 심
해지며 고금리가 생겨날 것이다. 이걸 간단히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결국.
“국민들이 피해를 봐야하기 때문이죠.”
그 순간 청와대 경제수석과 한국은행 총재가 두 눈동자에 경악을 머금은 채 도대체 정체가 뭐냐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 * *
뻐끔뻐끔―!
연못의 황금 잉어들이 어찌나 밥을 잘 먹은 것인지 살이 도톰하게 올랐다. 하물며 사람이 다가서기만 해도 밥을 주는 줄 알고 수면 위로 부리나케 모여든다.
“이놈들은 언제 밥을 먹어도 눈 깜짝할 새에 잊는단다. 그만큼 머리가 나쁜 것이겠지.”
왕회장이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유영하는 잉어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현아, 어찌 보면 인간이라고 다르지 않단다. 아까 만났던 아저씨들 있지 않으냐. 그 아저씨들도 무언가 받아먹는 걸 그 누구보다 좋아하니까 말이다. 끝없는 욕심, 그게 습관처럼 굳어지는 순간 그 사람의 본성이 되는 것이란다.”
가을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수면 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제야 황금 잉어들이 다시 수면 바닥으로 고개를 내린다.
“할애비는 현이 네 본성이 어느 쪽일지 무척이나 궁금하구나.”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바이올린을 켤 때 보면 음악에 대한 욕심이 많은 것 같지만, 또 어느 때 보면 모든 것을 해탈한 초로의 노인처럼 굴지 않느냐. 지금과 같이 나라가 어수선한 시기를 두고 누군가는 위기라 말하겠고 또 다른 이는 기회라고 말하겠지. 현이 너는 어떠하냐?”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지난 삶과 달리 이번 삶에서는 권력과 물욕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물며 제일그룹의 비리를 담당하던 법무팀 차장직에 오른 뒤 국회의원까지 준비했을 정도이니. 돈을 버는 방법이야 지금이라도 깜지에 수두룩 빽빽하게 적을 수 있을 것이
다. 그런데도 그다지 돈을 벌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다. 하지만 왕회장은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으니.
“현이 네가 성인이 되고 나서 이와 같은 일이 또다시 생긴다면 난 어떻게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드는구나. 능력을 갖춘 이가 아무 이유 없이 방관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능보다 못한 거이니까 말이다. 그래야 나중에 할애비가 두 발 뻗고 유하를
맡길 수 있지 않겠느냐?”
어째 이야기가 또다시 그쪽으로 빠지는 것일까. 그때였다. 농담처럼 말을 이어나가던 왕회장의 눈빛이 바뀐 것은. 마치 내 속을 전부 읽으려는 듯한 시선이다.
“현아, 돈에는 선과 악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거라.”
왕회장이 처음으로 내게 해주는 조언이었다.
*
악보를 쓰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 모든 상념을 떨쳐버리게 한다. 오선 위의 음표가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으니. 겹세로줄 위 페르마타가 쓰이며 비로소 하나의 악보가 만들어졌을 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이 온몸을 관통한다. 성공을 좇았던 지난 삶에
서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진실한 성취감.
“현, 드디어 악보가 완성되었나 보죠?” “아, 죄송합니다. 감독님.”
아침 일찍 작업실을 찾았을 때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장피에르 감독이었다. 프랑스에서 나를 위해 날아온 분이 아닌가. 더군다나 악보 작업이 남은 것을 알고는 먼저 악보를 쓰라며 내 편의를 봐주기까지.
“왜 음반 레이블들이 그렇게 현과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아요. 저야 음악에 대해서 심도 있게 아는 수준은 아니지만 현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느 누가 매료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네요. 정말 매력적이에요.”
“과찬이십니다, 감독님.”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봐도 되겠죠?”
니콜로 파가니니와 관련한 이야기였다. 헌데 각본 군데군데에 내 눈을 의심케 하는 내용들이 있었으니. 바이올린을 켜서 까마귀를 부른다고? 이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물론 최초의 비르투오소였지만 전설은 시간이 흘러 살이 덧붙여지고 과장되기 마련이다. 아무
렴, 파가니니가 정말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고서야.
“감독님, 바이올린을 켜자 까마귀 떼가 날아온다 이 부분은 비약 아닐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현마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요.”
진심인가보다.
라비안로즈를 촬영하면서 느꼈던 바지만, 장피에르는 이상한 것에 꽂히면 발현되는 황소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 이걸 어쩐다. 지난 삶에서 봤던 영화 파가니니에서는 그러한 장면이 분명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설마 이것도 나비효과 때문인가? 그때였다. 장
피에르가 내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는 것은.
“그럼 현이 한번 연주해보시겠어요? 오랜만에 현이 연주하는 카프리스를 들어보고 싶기도 하고요. 물론 장소는 작업실이 아니라 탁 트인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부탁합니다.”
“설마 제가 연주하면 까마귀가 날아올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감독님.”
농담 섞인 진담이었거늘 장피에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탈한 웃음이 나올뻔한 것을 애써 참아내고는 난 연습용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갤러리의 옥상은 탁 트여있어 마치 광활한 평야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도 했다.
지잉.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활을 들어 올렸다. 선율이 창공을 향해 울려 퍼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 예술의 전당에서 손에 피가 날 정도로 연주했던 곡이 아닌가. 오랜만에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가락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율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고 정확했으니.
“됐죠?”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삼켜내고는 장피에르를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창공에는 새는커녕, 여름의 늘그막을 즐기는 잠자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무렴, 내가 피리 부는 사나이도 아니고 말이다. 파가니니의 일화 또한 과장되게 부풀려진 것이리라. 그럼에도
장피에르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내려가시죠, 감독님.”
서둘러 다시 작업실로 내려가야 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한 곡을 더해보라고 부탁할 것 같지 않은가. 가만 보면 티호노프 박사도 그렇고 장피에르 감독 또한 그렇고 뛰어난 천재들은 하나같이 괴짜인 듯하다.
탁.
옥상의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사라질 즈음.
푸드드득―!
이름 모를 새가 조금 전 현이 있던 자리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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