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55
254 훈수(1)
대막칠사 일인.
사사(死死) 기사천.
대외적인 활동이 다른 칠사와 달리 뜸하거나, 미미해 보였다. 그러나 활약상이 작다고 얕잡아 보면 오산이다. 교란, 왜곡, 암습을 비롯한 뒷공작에 능한 놈으로, 마신교가 중원 대부분을 장악한 이후에나 행적이 드러났었다.
환술과 변장의 대가라 좀처럼 실체를 찾기가 어려웠다. 안갯속에 숨어 암약하며 집단을 서서히 곪아 가게 하는 전염병과 같은 자다.
배신당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 속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빼앗은 죽음의 환술사.
속이면 속였지, 계략으론 당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뒤통수를 맞았다.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것이다.
부들부들!
철저히 베일에 가려 음모를 주재했던 기사천에겐 천재지변이나 다름이 없었다. 치밀하게 세워놓았던 계획의 실타래가 풀리면서 엉망진창으로 엉키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완벽의 미학을 추구했던 그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차라리 전투를 벌이다 패했다면 받아들였을 것이다. 패자는 유구무언일 테니.
하나,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장단을 맞추며 놀아난 인형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놈이!’
환살의 대가리를 박살 내며 비릿하게 히죽이는 자. 무진이 유독 눈에 띄었다. 놈은 상념을 정리하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살수를 펼쳐 댔다.
안개처럼 분사하는 피 분수 속.
푸아악!
적의 고통은 나의 행복.
희비가 교차했다.
무진은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환살의 무딘 칼을 놓아주지 않았다. 전투 중에 한눈을 팔다니, 두 번 다시 한눈팔지 못하는 신세로 만들어주었다.
방심하면 저승 구경한다는 걸, 염라대왕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길 추천했다.
푹푹푹!
세 개의 대가리가 무진의 암검에 관통되어 뇌가 탁 트였다. 그야말로 창졸지간에 벌어진 참사. 재정비하며 물러서는 틈을 놓치지 않고 목숨을 챙겼다. 목숨을 빼앗을 때도 절약 정신이 투철했다.
으득!
더는 상념에 빠져 있을 수 없게 된 기사천이었다. 환살은 오랜 기간 투자하여 완성한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도구였다. 이토록 허망하게 잃을 순 없다.
“이놈, 멈추지 못할까!”
“나도 상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선약이 있는 것 같으니 다음으로 미룰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약속은 소중하잖아.”
“어디서 개소리를! 네놈부터 죽여 주마!”
“할 수 있으면 해 봐. 누가 하지 말래?”
기사천은 끊임없이 빈정거리는 무진의 주둥이를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발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기엔 상대가 지나치게 나쁘다. 환살을 이용하여 시간을 벌기도 어렵다. 하물며 분노의 화신이 되어 혈기를 활화산처럼 뿜어 대고 있었다.
저릿!
악의로 무장한 살기에 육신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죽이고 싶은 살의와는 별개로 기사천은 돌아서야 했다. 마지막까지 히죽이고 있는 놈의 비아냥거림에 울화가 치밀었다.
쐐애애애액!
살기를 불꽃처럼 발산하는 혈천의 두 눈이 피를 머금은 듯 붉어졌다. 혈천마혼기가 극성에 이르면 피어오르는 혈염마안(血炎魔眼)이었다.
격돌했다.
파아아아앙!
초원과 사막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파공성이 울렸다. 사각을 차단한 혈천의 수강, 혈염광마수(血炎獷魔手)가 폭사했다. 사위를 찢어발기는 섬뜩한 화기의 폭발력에 휩쓸렸다가 거칠게 쏟아 냈다.
솨아아아!
츠으으으!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모래와 흙더미는 가공할 열기에 타들어 가며 붉게 녹아들었다.
기사천과 철제양이 마주하며 섰다.
큭!
사령마검식(死靈魔劍式)의 사령검악(死靈劍惡)의 수로 막아섰음에도 검막이 찢겨 나갔다. 검신을 타고 흐른 혈천의 공력에 수벽이 아파 오며, 입술을 타고 가는 혈선이 흘렀다.
가볍지 않은 공수에 혈천의 살기가 증폭했다.
“내 손으로 쥐새끼를 살찌웠구나. 곱게 죽을 생각 따윈 집어치우는 게 좋을 것이다.”
철제양으로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과 마주하고 말았다.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고 여겼던 굳건한 성벽이 허무하게 와르르 무너져 버린 참담함이었다.
차라리 들키지나 않았으면 수치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북해빙궁에 의해서 밝혀졌다.
내 집안조차 다스리지 못한 주제에 북해빙궁을 탓한들,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었다.
스스스!
혈천의 엄포에도 사사는 살기를 피우며 응수했다. 비록 혈궁에 잠입하여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으나, 그의 진신은 교의 암주였다.
“흥! 마치 다 잡은 것처럼 우쭐하지 마라. 아둔하여 여태 자신의 발밑에서 자라는 가시조차 알아보지 못한 주제에 어디서 큰소리야!”
위장한 껍질을 벗어 버리고, 연기를 집어치웠다. 이제 와 부정한들 어떤 것도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해물을 전부 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이 외부에 알리진 않았겠지.’
사사는 혈천의 친위대, 혈병(血兵)을 가늠했다. 피의 병기로 알려진 자들. 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혈궁의 무력대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주인의 명이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혈천이 지닌 가장 날카로운 병기였다.
‘해볼 만하겠어.’
절반으로 줄어 버리긴 했으나 환살이 환극무영살진을 온전히 펼친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의도를 숨기고 혈천을 도발한 것도, 혈병을 끌어들이기 위한 연계였다.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승산이…… 젠장!
한 놈을 간과해선 안 되었다.
“저 새끼, 환영진을 펼치려고 시간을 버는 겁니다. 그 전에 축이 되는 팔문진을 부숴 버리면 환영진을 구축하긴 어렵습니다. 물론 알고 계시겠지만요.”
네놈의 같잖은 의도는 꿰고 있다는 듯, 무진은 전장에서 살짝 빠진 상태로 쉼 없이 고자질했다.
어디 내 눈을 피해 수작을 부려 보아라.
크크크!
비아냥거림도 멈추지 않았다.
빠직!
의도를 들킨 기사천은 치를 떨어야 했다.
대화를 유도해 주도권을 가져와야 했거늘, 무진의 훈수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부들, 부들!
몰랐기에 혈천은 열이 더 받았다. 하마터면 사사의 교활한 수작에 넘어갈 뻔했다.
“더는 간교한 혓바닥을 굴리지 못하게 해주마!”
“놈에게 농락당하는 거다. 우린 싸울 필요가 없어…… 빌어먹을!”
혈천이 무시무시한 혈기를 발산하며 쇄도했다.
대화 자체를 시도하지 못하도록 한 줄기의 혈광(血光)이 되었다. 동시에 혈병이 환살을 향해 살수를 뿌렸다.
“북해의 애송이에게 휘둘리다니, 사막의 대전사로서 부끄러움도 없는 것이냐!”
“자존심은 네놈을 짓밟은 후에 부리마.”
혈천의 긍지를 건드려 보려던 기사천의 시도는 시작부터 어긋났다. 교란술이 통하기에는 혈천은 대전사로서 경험이 노련했다. 상대의 수에 휘말리기보다 실전적인 성향이 강하다. 어수룩한 자였다면 진작 혈궁을 도모했을 것이다.
‘제기랄,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으로!’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처리하기도 어렵다. 원치 않은 일이나, 기사천도 본 실력을 드러내야 한다. 혈천을 상대로 비기를 숨기기란 불가능했다.
“괴상한 사술을 쓰는 놈입니다. 숨겨놓은 사법이나 암기도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사막의 대전사이신 궁주께서 흔들리지는 않겠지요. 아무쪼록 건승을 기원합니다.”
부르르르!
무진의 훈수는 기사천의 속을 연거푸 박박 긁어 댔다. 이렇게나 긁어 대면 피가 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숨겨놓은 회심의 수를 쓸 기회를 노리며 방심을 유도하려던 전략을 또다시 수정해야 했다. 알고 있을 때와 모르고 당할 때의 차이는 컸다. 하물며 혈천과 같은 절대고수가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하고 있다면 더더욱 사법을 걸기가 까다롭다.
‘네놈을 반드시 죽이고 말 테다!’
암수를 들키진 않았지만, 기사천으로선 진면모를 절반 이상 드러낸 꼴이었다. 혈천과의 승부가 더더욱 쉽지 않게 전개되는 양상이었다.
채채챙!
혈병과 환살의 전투도 치열했다. 누가 우위에 있다 장담할 순 없으나, 팽팽함 속에 혈전이 펼쳐졌다.
꽈아아아앙!
혈천의 노도(怒濤)와도 같은 장력이 기사천을 덮쳤다.
풍랑 속 거침없이 흔들리며 언제든 수몰할 배처럼 위태위태했지만, 거짓말처럼 장력의 해일 속을 빠져나오는 운신이 놀라웠다.
기사천의 절기 보법, 신광보(神光步)의 공능이었다. 귀신이 뿜어내는 빛의 초현은 이승의 무기로는 닿지 않을 비현실적인 공간을 창출했다.
퍼퍼퍼펑!
하나, 혈천의 보신도 기사천에 뒤지지 않았다.
다짜고짜 위력적인 초식을 사용하여 힘으로 제압하는 것처럼 보이나 혈천의 전투 감각은 사막제일이었다. 전투에 임하는 이상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쐐액, 투아앙!
쇠를 가르고, 치고, 뭉개는 거친 굉음이 연이어 토해졌다.
면과 점을 절묘하게 교차하고 둔탁함과 날카로움이 뒤섞인 혈천의 공수였다. 혈천마혼기를 극성으로 연마하면 굳이 초식의 영향을 받지 않음에도 내외력의 소모를 최소화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만하지 않지만, 또한 자신을 믿었다.
‘큭, 삼공자가 넘어서기엔 아직 무리였어!’
교에서 인정한 천재이긴 하나, 연륜과 경험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이를 증명하듯 처음 상대하는 사령마검식의 환검을 무리 없이 받아내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자리에 앉은 시간이 늘수록 전투 감각이 떨어져야 마땅하거늘. 혈천은 여전히 현역과 다르지 않은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하나, 그보다 짜증 나는 것은 쉴 새 없이 나불대는 저놈의 주둥이였다. 갈가리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와우, 궁주께선 정말 대단하시군요. 제가 보기엔 저희 궁주님보다 조금 더 강하십니다.”
헉!
듣고 싶지 않지만, 들을수록 기가 찬 놈이었다. 비교 대상이 자신의 상전이라 할 수 있는 북해빙궁의 궁주였다. 주인을 띄워주어도 부족한 판국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대 관계였던 혈궁주를 높여 주고 있었다. 저놈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헷갈리게 했다.
“우리 궁주님도 강하긴 하지만,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셨거든요. 마음가짐이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열쇠임을 잊은 거지요. 그러니 암계에 속절없이 당하시지. 쯧쯧쯧!”
큭!
노골적이고도 신랄한 비판.
이 순간 북해천존이 자리했다면 기혈을 토하며 주화입마에 빠졌을 악마의 혀 놀림이었다. 혓바닥에 마공절학과 절대극독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불거릴 때마다 사람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녹여 버렸다.
동시에 말하고 있었다.
혈천, 당신도 방심하거나 방만하면 북해천존과 다르지 않은 꼴을 면치 못할 거라는.
‘삼대에 걸쳐 오체분시를 해도 시원찮을 놈이!’
저 망할 놈의 훈수가 이어질수록 기사천의 준비해 둔 수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절묘하다고 해야 할까? 수를 쓰려고 할 때마다 집중력을 흔들었다.
‘신경 쓰지 않겠다!’
무진의 화술에 휘둘리다간 혈천의 파상 공세에 속절없이 당할 수도 있었다.
기사천은 귀를 닫고 집중하기로 했다.
“아차차,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낄 데 안 낄 데 구분을 매우 잘합니다. 자, 그러면 넌 어서 돗자리나 펴라. 싸움 구경에 술이 빠져서야. 술 마시기 좋은 날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