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86
485 원한(1)
-장강의 이남은 대피를 해야 합니다. 천기를 보니 이 비는 하루아침에 끝이 날 것 같지 않습니다. 시일이 늦으면 피해가 클 것입니다.
한림원에서 올라온 상소문을 읽은 태철 승상은 혀를 찼다. 비가 오기는 하나, 오랜 건기를 해소하는 수준이었다. 시기를 봐도 비는 곧 지나갈 듯했다. 하물며 유림의 학사가 천기를 본다니, 상식적이지도 않았다.
내용을 살핀 승상은 한림원의 학사가 보낸 상소를 치웠다. 이런 내용은 황제 폐하에게 갈 필요도 없었다. 근래에 환후가 좋아지기는 했어도, 쓸데없는 일로 심기를 훼손시킬 수는 없다.
‘주변에서 띄워 주니 자기 주제를 망각하는군.’
하물며 이 맹랑한 한림학사는 폐하께서 아끼는 천란 공주와 연이 닿아 있었다. 그걸 믿고 이리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것이다. 자신이 무언이라도 된 것처럼, 젊음의 치기치고는 지나쳤다.
‘제법인 줄 알았는데, 거기까지였구나.’
태철 승상은 황궁의 삶이 어떤지를 한림학사에게 알려 줄 요량이다. 잘나간다고 하여 자신을 모두 드러내는 짓은 어리석었다. 그것이 도리어 역린으로 다가와 목줄을 죄기 마련이었다. 황궁의 기본적인 이치를 모르는 녀석이라면 크게 담아 둘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끝내려고 했지만.
태철 승상은 며칠 동안 올라오는 상소를 가려내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예상치도 못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상소의 절반이 한림학사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이놈이 기어이!’
일개 학사가 유림의 관주와 서생을 일어나지도 않을 일로 선동하고 있었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더욱이 이 많은 상소를 무조건 걸러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소란 모름지기 폐하와 백성의 뜻을 잇는 소통의 창구였다. 승상의 직위로도 모든 걸 막기는 어려웠다. 차후, 상소를 막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했다.
‘공에 눈이 멀어 선을 넘는구나.’
태철 승상도 더는 막지 않았다. 황궁의 쓴맛을 보여 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기로 했다. 이걸 계기로 한림학사와 유림에 족쇄를 채울 생각이다. 사실 한림원이 맘에 들지 않기는 했다. 학사란 놈들이 정치는 무슨!
승상은 황궁의 대전회의서 상소문을 바쳤다. 황궁에선 실언을 해선 안 되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다면 대가는 목숨으로도 가벼웠다.
대전회의에서도 갑론을박이 길어졌다. 장원급제 한 수재임은 분명하나, 그는 아직 한림원의 일개 학사에 불과했다.
다만, 무조건 한림학사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총기가 흐려졌다곤 하나, 황제도 사리 분별이 아예 없진 않았다. 그는 한림학사를 두둔하는 이부상서에게 물었다.
“이부상서는 어찌하면 좋은지 고하라.”
“젊은 학사의 객기라고 하기에는 사안의 중대함이 큽니다. 그가 잘못 예측했을 수도 있으나, 실제로 홍수가 난다면 장강 이남의 피해가 클 겁니다. 깊이 헤아리심이 옳은 줄 아뢰옵니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오시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어떠하온지요, 폐하!”
“일개 학사에게 책임을 묻는다라. 가당치도 않다. 상소문에 동조한 모든 이들에게 책임을 묻겠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황제가 이리 갑자기 세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한림원을 옥죄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고 했거늘, 이부상서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발을 빼기에는 내뱉은 말이 발목을 잡았다.
‘총기가 남아 있구나.’
그는 한림학사를 두둔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승상의 뜻을 따르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태도의 태철 승상을 보자,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젠장!’
이부상서 조동관은 달리는 말에 올라탔음을 깨달았다. 어느 쪽을 편들기도 어렵게 되었다.
***
강소성의 홍택현으로 가야 했다.
산의 능선을 한 사내가 오롯이 걷고 있었다. 비가 오는 능선을 걷는 사내에게선 고독이 물씬 풍겼다.
처벅, 처벅!
질척이는 산길을 추적추적 걸어갔다. 비옷을 입고는 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폭우였다. 이런 날씨엔 능선을 걷기보다는 쉬어 가야 했다.
오늘 안에 그치기는커녕 밤새 이어질 듯하다.
무진은 근처에서 노숙을 결정했다.
물이 고이지 않는 곳을 찾아 고랑을 파서 자리를 정비한 후, 기름을 칠한 포에 대를 꽂아 일으켜 세웠다. 간이 천막으로, 비가 올 것을 대비한 물품을 어깨에 메고 왔다.
젖은 땅에 가죽 포를 깐 후, 내기로 천막 안의 습기를 날렸다. 세 사람은 족히 있어도 될 넉넉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주변에 있는 나무를 잘라서 삼매진화로 불을 피웠다. 불을 피운 좌우에 철대를 꽂아 빗물을 그릇에 받아 끓였다.
물이 끓자 쌀과 말린 육포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여 마무리했다. 대단치는 않지만, 노숙에서 이만하면 호사였다.
전장에선 주먹밥 하나 먹을 시간도 없이 무인들을 쳐 죽여야 했다. 이때는 한참 쳐 죽이다 보면 핏물에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솨아아아!
어두워지면서 빗방울이 굵어졌다.
우중의 노숙이야말로 강호를 살아가는 무인으로서 한 번쯤은 경험해 봄 직한 풍류였다. 홀로 고독을 씹으며 삶을 반추하여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타다다다다!
방수 처리한 천을 끊임없이 때리는 빗소리가 운치 있었다. 무진은 위로 솟구쳐 오르는 불길과 쏟아지는 빗물을 보며 감상에 젖었다.
‘모처럼 혼자네.’
-내가 있다.
‘닥쳐.’
-쑥스러워하지 마라.
여럿이서 여행할 때가 좋기는 했다. 잘 가르친 제자들이 알아서 천막을 치고, 침구를 정리한 후 요리를 했으니. 사부로서 할 일이 없어서 좋았었다. 사부란 항상 떠받들어야 하는 고귀하고도 위대한 존재였다.
무진은 현 시류를 돌아봤다.
‘이만큼이나 명성을 올렸는데, 나를 너무 우습게 여기는 것 같지 않냐?’
-악명이겠지.
‘악명이고 자시고, 더는 숨길 생각 없어. 어차피 예상된 범위일 테니까.’
-운신의 폭이 늘었다고 해야 하는 건가? 하긴, 여태 잘 숨기기는 했지.
악명이 쌓이는 만큼 무진의 무력도 급격하게 상승했다. 절정에서 화경까지, 시간을 따지면 천재적이란 표현도 부족하다. 다음 단계라고 해서 멀지는 않았다.
필도와 합을 맞추기는 했어도, 대결의 파급력을 고려했다. 신주이십일강이라도 쉽지 않은 상대라는 인식을 심어 준 것이다.
어지간한 수는 통하지 않을 테니, 확실한 준비를 해야 했다. 물론, 무림대회를 고려하면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짓은 어리석었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이성적인 판단만으로 흘러갈까? 그런 세상이었으면 현실이 시궁창이 되진 않았다.
무진은 이제까지 해 온 일들을 다시 살폈다. 미래와 대비하여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놓친 부분이 있는지를 되새겨 보았다.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시간의 차이였다. 무려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었다. 마신교도 그동안 세웠던 계획을 앞당겨야 했었다.
‘미래를 안다는 장점은 사람에 대한 과거뿐이네.’
-그것만 해도 다른 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이점이잖아.
‘그렇긴 해도, 원래대로 흘러가야 엿 먹이는 재미가 크지.’
-날로 먹는 것도 적당히 해라. 매번 뒤통수만 노리다간 역으로 당할 수도 있어.
남의 뒤통수는 칠 수 있다. 한데, 자기 뒤통수 맞을 것도 계산은 해야 했다.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훈훈한 인간관계였다.
여하튼 죽은 자가 살아 있고, 살아 있어야 할 자가 죽었다. 그것이 미래와 현재의 차이를 크게 벌렸다. 그러한 하나하나의 변수가 모여 대륙의 흐름과 역사가 뒤바뀌었다.
‘가지는 거의 다 치지 않았나?’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하나, 내가 모르는 수가 없다고 확신은 할 수 없어. 게다가 몸통이 가지는 파급력이 가지와는 비교도 안 될 수도 있고.
무림맹을 흔들려면 최소한 흑룡성이 나서야 했다. 하나, 흑룡성은 현재 흑천부로 인해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구양천극이 푼 신물이 사도십이세의 구심점을 흔들었다. 파가 갈리면서 흑룡성주의 장악력이 예전과 같지 않게 된 것이다.
‘흑룡성주가 놈들과 연관이 있으면 암흑신마를 내버려 두진 않았을 텐데.’
-확실하지 않을 때는 단정하지 않는 편이 이롭다. 당장 수를 쓰지 않았거나, 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네가 미래에서 겪었던 마신교를 생각해 봐라. 지금처럼 드러낸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비가 오는 산이라 금세 어둠이 짙어졌다. 불길이 바람에 출렁일 때마다 주변이 간혹 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화화화!
불이 꺼지기 전에 토막 낸 나무를 넣어 불길을 키웠다. 타오르는 불길이 정면을 비추자, 빗속을 뚫어 내고 걸어오는 자가 있었다. 밤중에 홀로 산길을 걸으며 고독을 씹는 동지였다.
처벅, 처벅!
거구의 투박한 몸을 지닌 사내는 짚으로 얼기설기 대충 만든 비옷을 걸치고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우중의 산에서 낯선 사내의 등장에 공기가 긴장했다.
착!
불길 앞에 사내가 섰다. 대나무로 만든 챙이 넓은 벙거지 형태의 중심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모자를 들어 올리며 내려 보았다.
“비가 많이 와서 그런데 잠시 피할 수 있을까?”
“얼마든지.”
천막을 밖으로 편 상태라 앉을 자리는 충분했다. 대충 자른 둥그런 나무토막을 의자로 내어 주었다.
“나는 모도산이라고 하네.”
“강무진이다.”
“흠. 이상한데.”
“뭐가 이상하지?”
“천권이라고 할 줄 알았거든.”
“네가 알고 있으니까, 안 한 거야.”
“……?”
순간 말문이 막혔던 모도산의 날카로웠던 눈빛이 풀리면서 누런 이를 드러냈다. 예상치도 못한 반격의 연속이라, 재미가 있었다.
“본인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군.”
“당신은 아닌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혼자선 안 될 텐데.”
무진의 자신감에 모도산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 젊은 나이에 고수의 반열에 오르면 자신을 오롯이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젊은 혈기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지녔지만, 강호는 그러한 과정을 순순히 지켜보지 않았다.
“나를 모를 텐데, 자신감이 지나치군.”
“왜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그리 되묻자, 모도산의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 대화의 흐름이 그가 예상했던 범주에서 엇나가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판단이 서지 않는 놈임은 분명했다.
모도산은 시험하듯 다시 물었다.
“하면 내가 누군가?”
“한 삼십 년 전일 거야. 시골에 꽤 인상적인 소녀가 있었어.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붉은색의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를 지닌 소녀였지.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면서도 소녀는 마음이 착했어. 하지만 어느 날 물을 달라고 한 사내에게 잔인하게 간살을 당했지.”
얘기가 이어질수록 모도산의 안색이 점점 굳어 가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던 비사였다.
그렇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의 정체를 언급했다면 이렇게 놀랄 이유도 없다. 이름을 모르더라도, 인상착의는 유포가 되었을 테니.
“네놈 뭐야?”
“그러게 화근은 제거했어야지. 안타깝게도 소녀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진 않았던 거야. 물론, 오래가진 않았지.”
“……이놈! 감히 나를 농락하려는 것이냐!”
“농락이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를 간살 하는 버러지보다는 낫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