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Mythic creator is a regressed player RAW novel - Chapter 203
이제는 잊혀진, 먼 과거의
서상의가.
무림세가인 동시에 단약제조에 있어선 따를 곳이 없다는, 명실상부 명대 최고의 의가.
서아정은 그곳에서 가주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의 재능을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의술에 두각을 나타내던 그녀는, 과년에 이미 가문 어른들의 실력을 따라잡았다.
거기에 군소리 한 번 없이 환자를 돌보는 고운 마음씨와 선녀 같은 외모가 더해지니, 세간에선 그녀를 성수신녀라 부르며 추앙했다.
그러한 그녀의 운명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17세 겨울.
20여 년간 황실어의를 지낸 백종조(伯從祖)의 시신이 바싹 마른 목내이(木乃伊, 미라)꼴로 가문에 돌아오면서부터였다.
“…지금 뭐라 하셨소?”
“가주께 의술이 뛰어난 따님이 계시다 들었소. 백성들 사이에서 성수신녀라 불린다지?”
“그렇…소만.”
“성수신녀 서아정은 궁에 들어 어의의 업무를 이어받으란 폐하의 어명이오.”
시신을 운반한 무관은 백부를 잃은 가주에게 피붙이마저 요구했다.
허나 황실의 명을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당사자는 모르는 곳에서 그녀의 황궁행이 결정됐다.
***
“한 눈 팔지 마라.”
“네? 네, 어르신.”
“함부로 입을 열지도 마라. 이제부터 보게 될 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너도나도 목숨은 없다.”
“…….”
서슬 퍼런 목소리에 곁눈질을 멈춘 서아정은, 백종조의 뒤를 이어 어의에 오른 노인의 발뒤꿈치를 쫓아 서둘러 걸음 옮겼다.
허나 한창 호기심 많을 나이인 그녀는 머잖아 다시 잡생각에 빠져 들었다.
‘과연 자금성은 바닥에 깔린 판석부터 다르구나.’
설마 자신이 황제의 옥체를 보살피는 중임을 맡게 될 줄이야.
비록 어린 딸을 떠나보내는 부모님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나, 어려서부터 황제의 신화 같은 업적을 듣고 자란 그녀는 두근거림을 감출 수 없었다.
허나 황제와의 첫 만남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크아아악, 폐하아! 그만, 그마… 끅, 꺽….”
근엄하던 어의가 마른 장작개비마냥 쪼그라드는 모습을 서아정은 공포에 질려 바라봤다.
백부님도 저런 식으로….
그녀는 자신이 어느새 오줌을 지리고 있단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륵?”
지린내를 맡은 황제, 아니,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기괴한 살덩이가 그녀를 향해 붉은 촉수 한 가닥을 뻗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잠식된 그녀의 두 다리는 제자리에서 꽁꽁 얼어붙은 채 뒷걸음질마저 거부했다.
어려서부터 연마한 가전무공 역시, 억세고 질긴 촉수의 전진을 막아내진 못했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애처로운 발버둥이 촉수의 질척한 표면에 파묻혔다.
이윽고 다시 한 가닥.
또다시 한 가닥.
그리고 마침내는 수십 가닥의 촉수가 전신으로 밀려드는 공포와 역겨움 속에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
“헉…!”
놀랍게도 그녀는 죽지 않았다.
이튿날 정신을 차린 그녀는, 어느새 반쯤 인간의 형태를 되찾은 황제의 품에 알몸으로 안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두렵느냐?”
귓가로 파고든 늙수레한 목소리에 그녀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폐, 폐하….”
“내 모습이 그토록 추하였냐고 물었다.”
“절대 그렇지 않사옵니다. 부디 용서를….”
“아니다. 미안하구나…. 네가 당분간 날 좀 돌봐주어야겠다….”
지친 목소리에선 생명력이라곤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나 전날의 두려움이 생생한 그녀로선 감히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명… 받들겠나이다.”
다음날부터 그녀는 공석이 된 어의를 대신해 황제를 보살폈다.
그가 멀쩡한 정신과 육체를 되찾는 것은 하루에 단 세 시진.
그녀의 백부가 남긴 제조법을 따라 만든 단약의 기운이 사라지기 전까지였다.
허나 그마저도 시간이 점차 줄고 있었다.
“폐하. 병의 원인을 알면 치료에 차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뜻이냐.”
“혹여 이런 현상이 일어난 이유를 아신다면….”
“그만!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말거라.”
제정신일 때는 성품이 온화한 황제였으나 병의 이유를 물을 때만은 달랐다.
결국 그녀는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치료 중에 발작이 시작되어, 첫 만남 때와 비슷한 아찔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미리 담아간 소변을 몸에 뿌려 괴물을 유혹했다.
그렇게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하루하루를 보내길 어느덧 한 달 보름,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의 달거리가 멈췄음을.
회임 방지에 효험이 있는 약재를 그리 복용했음에도, 괴물의 씨앗이 태내에 싹을 틔우는 것을 막지 못했음을.
“아….”
그녀의 신형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
“의녀 서씨는 오늘부터 장양궁에 기거하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소.”
황실의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유산에 특효라는 약재 몇 가지를 반출하자마자 동창의 고수들이 찾아온 것이 그 증거.
환관들로 이루어진 첩보조직의 고수들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평생 잊지 못할 방법으로, 그녀로부터 회임을 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의가의 딸에서 어의로, 다시 후궁으로.
그렇게 그녀는 다시 한 번 원치 않는 신분상승을 경험했다.
장양비 서씨. 그것이 그녀의 새로운 이름.
허나 장양궁의 생활도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
말이 좋아 후궁이지, 진시황의 현신이라 불리는 황제에게는 측실만도 수십 명.
황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여인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훨씬 증가한다.
헌데 그녀들 모두가 이번 대에야말로 황위 계승이 이루어질 것이라며 회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 이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녀를 반길 리 없었다.
“네가 이번에 든 아이구나?”
“폐하를 보살피라 하였더니 꼬리를 쳤구나. 폐하를 뵐 수 있는 시간이 날로 줄어드는 것도 실은 네 탓이 아니냐?”
여인들 간의 암투는 그렇잖아도 끔찍했던 황궁 생활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새끼치기에 혈안이 된 가축 같은 년들.
서아정이 다른 후궁을 싸잡아 부르는 명칭이었다.
허나 그렇지 않은 이도 분명 존재했다.
“다들 뭣들 하는 게야!”
“귀비님, 그것이.”
“장교영이 귀비일 적에 그 밑에서 숱한 괴롭힘을 당한 우리가 아니냐. 어찌 이럴 수가 있어.”
호통소리와 함께 아리따운 여인 하나가 그녀를 감쌌다.
장양궁에서 가장 지체 높은 여인, 한귀비.
그녀는 황실이란 진흙탕에 피어난 연꽃 같은 존재였다.
출산을 두어 달 앞둔 그녀는 몸이 불편한 중에도 다른 여인의 텃세로부터 그녀를 감싸주었다.
비록 그녀가 보지 않는 곳에서 괴롭힘의 강도는 더욱 심해졌으나, 서아정은 삭막한 궁 안에 의지할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
서아정이 궁에 든 지도 어느덧 석 달이 흘렀다.
그 사이 한귀비는 건강한 여아를 출산했다.
비록 난산이었던 까닭에 더 이상 회임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긴 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내심 한귀비를 친언니로 여기던 서아정 역시 태어난 아이를 조카처럼 아꼈다.
“꺄-.”
“예쁘기도 해라.”
“네 아이도 분명 널 닮아 귀엽고 예쁠 것이다.”
“감사합니다, 귀비님. 송구하오나 전 이만 폐하를 뵙기 위해 물러가겠습니다.”
아이를 되돌려주는 그녀에게 한귀비가 걱정스런 얼굴로 덧붙였다.
“요즘 건천궁에 드는 일이 더 잦구나. 혹시 폐하의 건강이 안 좋아지신 거니?”
“…죄송합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미안하구나. 내가 실수를 했다. 그보다 너도 이제 몸이 무거울 터인데 너무 무리는 말거라.”
“감사합니다, 귀비님. 그럼 또….”
“그래. 언제든 오렴.”
고개를 꾸벅 숙인 서아정은 한귀비의 처소를 나와 황제의 침소인 건청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허나 몇 걸음도 가기 전에 그녀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흥! 홀로 고고한 척하긴….
-아직도 자기가 귀비인 줄 아는 게지.
-더 이상 아이도 배지 못한다지?
“감히.”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한귀비의 험담에 서아정은 뿌득 이를 갈았다.
허나 드잡이 질을 해봤자 시간낭비요, 한귀비에게 폐만 끼칠 터.
쾅-!
-꺅!
-이게 무슨 소리냐!
“흥!”
애꿎은 벽에 화풀이를 마친 그녀는 고소를 머금은 채 건천궁을 향해 조용히 걸음을 서둘렀다.
***
“폐하, 진맥을 마쳤으니 소첩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기다리거라.”
그날은 평소와 무언가 달랐다.
“잠시 가까이 오거라.”
“예? 예….”
무슨 일이지? 왜 저러지?
솟구치는 불안감에 쭈뼛거리며 다가서는 그녀에게 황제는 말없이 서책 한 권을 내밀었다.
[흡성대법]“이것…은?”
“너도 무예를 익혔으니 한 번 쯤은 들어보았겠지. 이백년 전 혈마가 익혔다는 불노불사의 비급이자, 내 장수의 비결…이다. 그리고 날 이런 몸으로 만든 원흉이기도 하지. 받거라.”
비급을 내민 황제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 안에 담긴 것이 갈등과 살기임을 깨달은 서아정은 그만 등골이 오싹했다.
그는 이 순간에도 고민하고 있었다.
한낱 후궁에게 자신의 보물이자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주, 죽여주십시오. 제가 감당하기에는 과분한 물건입니다.”
“아니다… 아니야.”
욕망이 아닌 두려움을 드러낸 것이 정답이었을까.
마침내 미련을 끊어낸 그가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툭-.
“네 무공이 제법 뛰어나다 들었다. 가져가서 그 안에 적힌 구결들을 연구하라.”
“제가 어찌….”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 지금 복용하는 약으로는 한계야. 점점 머릿속이 뿌옇게… 물든다. 붕괴에 몸을 맡기라고 속삭여. 나를 살려다오.”
서아정은 떨리는 눈으로 비급을 주워들었다.
비밀을 듣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거부했다간 죽음뿐이란 사실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명… 받들겠나이다.”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비급이 그녀의 품안으로 사라졌다.
***
쏴아아아-.
때 아닌 장대비가 장양궁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어깨를 적셨다.
허나 젖어 드는 옷보다 백 배, 천 배로 무거운 것이 품속의 비급이었다.
“추워….”
조금 전 황제가 보여준 섬뜩한 눈빛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의 마음이 도중에 바뀌면 어쩌지?
아니, 어쩌면 이미 누군가 내 뒤를 쫓고 있는 건 아닐까?
그녀는 불안함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걸음을 서둘렀다.
한귀비의 따뜻한 미소라면 이 오한을 녹일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허나 어렵사리 장양궁에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꽈릉-!
때마침 친 천둥번개가 어둠에 잠긴 한귀비의 처소를 환히 밝혔다.
그 순간 잠시 드러난 피, 피, 피.
새빨간 풍경 속에 싸늘하게 식어가는 주검 한 구.
콧속으로 파고드는 비릿한 혈향.
“귀비…님…?”
“꺅! 게 아무도 없느냐!”
비명소리가 얼어붙은 시간을 깨웠다.
황급히 돌아본 시선에 맺힌 것은 장양궁 여인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그 속에 자리 잡은 간악한 미소.
그녀는 자신이 지독한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녀는 장양궁을 나서기 전 들었던 그녀들의 뒷담화를 떠올렸다.
그 때 자신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이 일을 막을 수 있었을까?
허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여기다! 어서!”
“이건…!”
방안에 펼쳐진 참상을 확인한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가증스럽게 병사까지 동원하다니.
그들이 매수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다수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것인지, 현재의 그녀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서 씨는 얌전히 오라를 받으시오!”
꼼짝없이 누명을 뒤집어쓰게 생긴 순간,
“서 씨는 우리와 함께 있었다.”
“헛!”
그녀 곁에서 솟구친 두 개의 그림자를 향해 병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멍하니 한귀비의 시신을 응시하던 서아정의 시선 또한 그들을 향했다.
“당신들은… 누구죠?”
“감등.”
“허오라 합니다. 폐하의 명에 따라 금일부로 그대의 호위를 맡았소.”
서아정은 품에 든 비급을 떠올렸다.
“두 분은… 제 명령을 따르시는 건가요?”
“…그것이 황실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 전 제가 누명 쓰는 모습을 똑똑히 보셨을 겁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그녀의 말에 망설임은 없었다.
“저년들을 죽여줘요.”
“…….”
“물음에 답할 한 사람만 제외하고 전부. 모두 가문도 변변찮고 남아도 출산하지 못한 것들이에요.”
“…충.”
여인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직후 방안에 또 한 번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혈겁이 벌어지는 동안 여인들이 데려온 병사들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 사이, 서아정의 발걸음은 유일한 생존자를 향했다.
“아이는 어디 갔어.”
“살려줘. 나, 난…!”
서걱-!
소름끼치는 피륙음과 함께 손가락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아악!”
“아이는 어디 갔어.”
“몰라요. 몰라요…!”
서걱-.
“아이는 어디 갔어.”
“흐어엉. 으으… 민 씨가 줬어요. 시녀에게.”
“시녀?”
“…개의 먹이로 주라고, 난 몰랐… 컥!”
목에 단도가 꽂힌 여인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아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찾으세요, 당장.”
“충!”
“당신들도 움직여.”
“헉!”
병사들도 화들짝 놀라 방을 나섰다.
그렇게 한밤 중 때아닌 수색이 펼쳐졌다.
그러나 아기의 행방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발견된 것이라곤 교살당한 시녀의 시신과 사냥개 우리에 남은 작은 비단 조각 뿐.
털썩-.
“아….”
피에 젖은 비단을 보며 서아정은 흐느꼈다.
허탈했다.
끔찍한 궁궐에서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한귀비를 이리 허무하게 보내다니.
더불어 그녀의 아이까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귀비님….”
내장이 끊어질 듯한 슬픔 속에 그녀의 신형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이젠 다 지긋지긋했다.
돼지 우리 같은 황실도.
괴물이 된 황제와 그의 비밀도.
이 순간에도 뱃속에서 자라나는 아기마저도.
전부 다….
전부 다 부술 거야. 전부.
손끝에 닿는 비급을 매만지며 그녀는 다짐했다.
훗날 모든 황족의 씨를 말리고 수많은 이를 도탄에 빠뜨릴 악녀의 탄생은 그토록 쓸쓸하고 초라했다.
***
“그 말이 진정 사실이냐?”
머나먼 과거를 회상하는 태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정녕 한귀비님의 딸이란 말이냐?”
“그래. 네 손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한소영이 내 어머니야.”
“아니야. 아니다, 내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보다, 날 키워주신 할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너희를 난 용서할 수 없어.”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본 서아정은 그제야 깨달았다.
꿈에서라도 다시 한 번 만나길 바란 얼굴이 코앞에 있음에도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한 까닭을.
‘그녀에게선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눈빛.’
그 순간 서아정은 깨달았다.
어긋난 관계만큼이나 너무 많은 것이 변했음을.
한귀비의 죽음에 복수를 다짐했던 어린 날의 자신은 이미 세월에 마모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실을 향한 분노는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변질된 지 오래.
절대 정을 붙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괴물의 자식에게도 모정을 품게 되었다.
비록 그것이 뒤틀린 애정일지라도.
자식을 황제로 옹립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수많은 사람을 이용하고 죽였다.
과거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사람들처럼.
그 행동에 망설임이나 후회 따위는 없었지만, ‘그녀’를 꼭 닮은 여인을 만난 순간 서아정은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게도 이런 마음이 남아 있었나.’
실소를 머금은 채 그녀는 다시 약빈을 바라봤다.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더 이상 힘없는 후궁 중 하나가 아닌, 황제의 어미였으니.
그 와중에 정마협의 사람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제라도 인질을 풀어주고 그녀의 대모를 자처한다면, 지난 20년 간 품어온 한을 풀고 죽어서도 당당히 한귀비 앞에 설 수 있으리라.
“얘야, 난….”
“마마, 위험합니다! 제가 보필을.”
“아니다, 저 아이와 할 말이.”
푸욱-.
“아….”
어째서…?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나온 검을 향했다.
“마마!”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뒤늦게 울려 퍼지는 고함과 비명들 속에 서아정은 자신을 찌른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마, 강녕하셨습니까.”
“그 목소…리.”
병사의 복장을 한 사내가 복면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그 안에서 서아정을 기다리던 것은, 복수라는 미명 하에 그녀가 저지른 또 하나의 업보.
“너…였느냐. 철혈…대주.”
“이만 가시지요.”
“너라면, 쿨룩-. 자격이 있…지. 하지만 강은은 죄가….”
“죽을 때가 되니 갑자기 어미 행세요. 후… 알겠소. 녀석은 내게도 친구니까.”
“귀비…님. 그 아이가 살아 있…었….”
미련이 가득한 얼굴에 한 가닥 미소를 띄운 채, 태후가 고개를 떨궜다.
“마지막까지 이기적이구려.”
검을 거둔 사내, 천무학관생들에게는 존명이라는 별명으로 익숙한 사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