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Mythic creator is a regressed player RAW novel - Chapter 68
천무전 (3)
12년.
열 두 동물로 이루어진 생초의 주기이자,
갓 태어난 딸이 무사히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땅에 묻은 여아홍이 무르익기 충분한 시간이다.
또한 남송 말기 세 명의 황제가 재위한 기간은 겨우 그 절반인 여섯 해도 되지 않는다.
벽려군은 어떠한가.
그녀는 그 긴 세월을 오로지 복수에 바쳤다.
전대 검후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이들 외에도 수많은 악인들이 그녀의 검에 고혼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결과만을 보고, 그녀가 검후(劍后)라는 영예로운 별호를 잇기에 모자람이 없다고 찬사를 보냈다.
허나 모든 이야기에는 뒷면이 있는 법.
세간에 전해지는 고고하고 화려한 그녀의 영웅담은, 실은 목숨을 건 처절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세가 불리하면 도주와 기습을 반복하며 암살자 흉내도 서슴지 않았고,
비 오는 날 구정물이 흘러내리는 거적때기를 뒤집어 쓴 채 목표물이 지나는 길목에서 기회를 엿보기도 했다.
그러한 행동의 바탕에는 반드시 목표를 제거하겠다는 철두철미함이 깔려 있었지만, 그것도 한 가지 능력이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적과 자신의 수준 차이를 정확히 가늠하는 동물적인 감각과 눈썰미.
사문의 절기를 절반밖에 익히지 못한 그녀가 여태껏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때문에 그녀는 일검을 부딪히기 전에 이미 파악이 끝난 뒤였다.
상대의 역량이 만만치 않지만, 결코 자신의 상대는 아니라는 것을.
콰앙-!
검과 검의 격돌이라기엔 흡사 화약이라도 터진 듯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숲의 새들도 놀라 일시에 하늘로 솟구쳤다.
파스스스.
손님이 떠난 나뭇가지의 이파리들이 요란하게 부대끼는 가운데 제2, 제3의 충격파가 뒤를 이었다.
콰앙, 쾅-!
“으윽···!”
사내는 그녀의 검에서 피어나는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연신 뒷걸음질 쳤다.
허나 강호에서 검후라는 두 글자가 지니는 위명을 생각할 때, 그것은 결코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었다.
검이 얽히는 것도 적어도 상대의 검이 노리는 곳을 알 때나 가능한 법이니.
허나 애초부터 실력차이가 명백한 싸움이었다.
턱-.
간신히 유지되던 균형을 깨뜨린 것은 땅에 못 박힌 돌부리 하나.
하지만 제 아무리 고수라 한들 뒷걸음질에 막대한 경력을 싣지는 않는 법이다. 하물며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야.
“헙.”
사내가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어려서부터 마보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덕이었다.
하지만 찰나의 휘청거림마저 어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검후의 검은, 그 찰나의 시간을 다시 여러 번으로 쪼갤 만큼 무서운 속도를 자랑했다.
쐐액-!
어깻죽지를 향해 날아드는 검에선, 적어도 한쪽 팔을 앗아가겠다는 무자비함이 엿보였다.
단 한 번 대화를 거부한 것 치고는 혹독한 대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르르-.”
사내의 입에서 짐승이 낼 법한 숨소리가 나오자, 시종일관 평정을 지키던 벽려군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잠력격발이라는 것이 있다.
수련을 통해 쌓은 내공이 아닌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생명력, 선천지기.
그것을 강제로 격발시키면 일시적으로 실력 이상의 힘과 속도를 얻게 되지만, 사용하고 나면 어김없이 폐인이 되고 마는 무서운 수법이었다.
사내의 수법은 그것과 유사했다.
벌게진 눈과 꿈틀거리는 핏줄.
순간 팽창한 근육으로 휘두른 검이, 여태까지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공기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콰아앙-!
“읏···.”
검을 쥔 팔이 찌르르 울리고 두 발은 잠시 허공으로 떠오를 정도의 충격.
허나 사내의 반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쐐애액-!
정확히 목 한가운데를 노리고 쇄도하는 이격!
그러나 벽려군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천무학관의 교관으로 초빙될 만큼 노련한 실력을 지닌 그녀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덤벼드는 상대와 정면대결을 펼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벌어진 일은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했던 상대가 공격을 멈추고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동귀어진을 노리는 줄 알았는데 도주라니!
화들짝 놀란 그녀가 신법을 펼치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인 순간,
하늘에서 벼락처럼 떨어진 두 개의 검은 빛줄기가 도주 중인 사내의 등을 향해 꽂혀 들었다.
팅-!
“끄윽.”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암기였다.
사내는 검을 휘둘러 그 중 하나를 튕겨냈지만, 다른 한 자루는 그의 어깨에 자루만 보일 정도로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속도를 줄이는 일 없이 그대로 무림맹의 드높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모습을 감췄다.
“교관님!”
뒤늦게 들려온 목소리에, 벽려군은 암기를 던진 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렇게 오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정말 말을 안 듣는 학생이야.
그러나 찌푸린 미간과 달리, 몸을 돌리는 그녀의 입가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
약빈이와 동시에 비도를 날렸지만 달아나는 사내를 멈출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연영신법을 펼치려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벽려군이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추적을 만류했다.
“쫓지 마세요.”
“그래도···.”
“침입자를 격퇴한 것으로 충분해요. 천무전의 혼란을 노릴 이들이 있으리란 것은 맹에서도 이미 예측했던 부분이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말 걸 그랬나?
그 순간, 귓가에 전음이 파고들었다.
-내가 쫓으마.
스승인 신투의 목소리였다.
괜히 벽려군의 눈에 띄면 일이 복잡해질까 한 발 물러나 있던 그가 몸소 추적에 나선 것이다.
사부님이면 믿을 수 있지.
안심하고 어깨에서 힘을 빼자, 그제야 벽려군이 엄한 표정을 풀고 미소를 머금었다.
“남은 흔적들을 살피는 건 맹의 고수들에게 맡기고 우린 돌아가도록 해요.”
“네.”
“그래서 다른 고수들은 어디 있죠?”
“아하···하.”
“···조가휘 수련생?”
벽려군의 눈썹이 다시 역팔자를 그렸다.
난 어색한 미소와 함께 몸을 뒤로 뺐지만, 그녀에게 잡힌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
벽려군의 설교는 한참을 이어졌다.
심지어 비무대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녀는 보호자마냥 우리가 딴 길로 새지 않는지 감시했다.
“어린 애도 아니고···.”
“자업자득이에요. 여기서 얌전히 비무를 관람하고 있어요. 이따가 시합 내용 꼼꼼히 확인할 테니까, 알았죠?”
“네-.”
벽려군이 보고를 위해 떠나가자, 나와 약빈은 우글거리는 관중들 틈바구니로 끼어들었다.
굳이 수련생 대기석으로 향하지 않은 것은 귀찮은 질문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시합마저 내팽개친 채 사라진 두 남녀를 동기들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는 불 보듯 뻔하니까.
내일부터 방학인 게 다행이다.
잠시 뒤, 검후가 귀빈석에 오르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그러나 전음을 통해 보고를 받는 무림맹주의 얼굴은 안색 하나 변하는 일 없이 평온했다.
과연 정파의 기둥 소리를 듣는 양반답게 이 정도 해프닝쯤은 그의 오랜 인생에서 위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거겠지.
당연히 천무전 행사가 지연되는 일 또한 발생하지 않았다.
난 무림맹주가 무언가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화면에서 눈을 뗐다.
동시에 엄청난 환호성이 귓가를 강타했다.
와아아-!
이 사람들이 다 금라희 교관님께 음공을 배웠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거야.
귀를 찌르는 함성에 인상을 찌푸린 채 비무대 위를 바라봤다.
결승전 무대를 꾸민 것은 소림사의 정훈과 남궁현이었다.
아무래도 설이나는 아쉽게 떨어진 모양이다.
아니, 잠깐.
근데 왜 남궁현이 저기 있지? 우희는 어디 가고.
오랜 친구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녀석이 우희에게 이기는 모습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다. 우희가 기권이라도 하지 않고서야···.
잠깐, 그러고 보니까 나 따라온다고 기권한 사람이 바로 옆에 있잖아?
“왜?”
“아니야, 아무것도.”
생긋 웃는 약빈이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설마.
약빈이야 세력이랄 것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설마 제갈세가 사람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우희가 그런 짓을 했겠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난 일말의 불안함을 지우지 못하고 카메라를 날려 우희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것은 헛수고임이 밝혀졌다.
“휘 가가-.”
팔을 휘감는 뭉클한 감촉에 목이 휘릭 돌아갔다.
“희야···!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졌어?”
“기권했어요.”
“너도?”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냥 가가랑 구경하려고 했는데 한참을 찾아도 안 보이더니 여기 빈아랑 같이 있었네요?”
난 우희 몰래 승자의 미소를 짓는 약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응, 빈아도 기권했다고 해서···. 근데 몸이 어떻게 안 좋았는데 기권을 해? 내가 한 번 볼까?”
“으응, 이제 괜찮아. 근데 휘 가가는 어디 다녀왔어요?”
스승에 대한 것을 제외하면 별로 숨길 일도 아니었다.
이미 벽려군도 아는 사실이고.
난 수상한 자를 쫓았던 일을 적당히 각색해서 들려주었다.
“그랬구나아. 어디 안 다쳤으면 됐지.”
고개를 끄덕인 우희가 내게 어깨를 기대며 속삭였다.
“휘 가가.”
“응?”
“휘 가가-.”
“왜애?”
몇 시간이나 날 찾아다닌 것에 대한 보상심리일까?
오늘따라 콧소리가 듬뿍 섞인 응석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 순간, 다시금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휘 랑-.”
그 한 마디에 놀라서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헌데 나보다 더 놀란 것이 약빈이다.
내 손을 움켜쥔 그녀의 손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질 정도였으니까.
우희는 그런 우리 둘을 가만히 바라보다 배시시 웃었다.
“응, 가끔 이렇게 다른 식으로 부르는 것도 색다르고 좋네요?”
“그렇···네?”
“아, 현아 올라왔어요, 가가.”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비무대를 가리켰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녀의 옆모습에, 나와 약빈이는 남몰래 한숨을 교환했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지? 그래봤자 애칭인데.
잠시 뒤 펼쳐진 정훈과 남궁현의 비무는 결승전답게 화려했다.
객석의 반응 역시 뜨거웠다.
아마 우희가 출전했다면 이런 반응은 무리였으리라.
양민학살이 재미있는 것은 이기는 당사자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이 각이 넘는 치열한 접전 끝에 승기를 잡은 것은 남궁현이었다.
“현 가가아!”
어휴, 우리 소희 입 찢어지겠네.
이제 11살밖에 안 된 상가 출신의 꼬마가 이런 숨 막히는 대결을 언제 구경이나 해봤겠는가.
고조되는 시합의 열기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것은 우리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메라에 비치는 귀여운 두 모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키득거리던 그 때,
-스승이 고생하는 동안 제자는 사랑 놀음이라니 말세구나, 말세야.
사부님?
전음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어느새 약빈의 옆에 선 유생 차림의 중년인이 눈에 들어왔다.
참 지닌 재주를 헤아리기 힘든 분이라니까.
벌써 추적을 끝내고 옷까지 갈아입으시다니.
하지만 이런 예상과 달리 이어진 그의 전음에는 아쉬움과 민망함이 가득했다.
-심상치 않은 자더구나.
-···설마 놓치셨어요?
-크흠, 조력자가 있었다. 도망치던 놈과는 수준이 다르더구나.
-그래도 사부님의 안목이면 상대의 무공을 알아보셨을 텐데요.
내 말에 신투가 고개를 저었다.
-무당의 검을 쓰는 것을 확인했으나··· 지나치게 당당하더구나. 마치 보라는 듯 말이야. 아마 위장일 게야.
-추종향은요?
-그마저 간파 당했다. 보통 내기가 아니더구나.
-고생하셨어요. 안 다치신 게 어디예요.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벽려군도 그러지 않았나, 그런 자들이 한 둘이 아닐 것이라고.
이번 일로 맹에서도 보안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다음 학기에는 뭔가 조치를 취하겠지.
그나저나 스승님의 추격을 따돌릴 정도의 고수라니, 대체 누구였을까?
생각이 깊어지는 가운데, 다시금 주위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내가졌소, 남궁시주.”
“좋은 승부였소.”
그렇게 제 1차 천무전의 우승자의 탄생을 알리며 학관의 1학기가 끝을 맺었다.
***
무림맹이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사이, 그로부터 10리가량 떨어진 어느 가옥에선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쿨룩.”
오랜 침묵을 깨뜨리는 기침 소리에, 죄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사내가 얼른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대주?”
“괜찮아 보이냐?”
“···죄송합니다.”
“실로 무서운 자였다.”
“대주의 실력으로도 감당하지 못하다니 대체 누구기에···.”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너처럼 역용을 했을지도 모르지.”
최소 구파일방의 장로, 어쩌면 장문인급.
스치기만 해도 살이 떨어져나갈 검세를 눈 하나 깜짝 않고 돌파하던 중년인을 떠올린 사내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다 말고 몸을 떨었다.
그에 대한 원망은 자연히 눈앞에 팔자 좋게 누워 있는 부하를 향했다.
“하루를 못 기다리고 거길 들어와서 이 사달을 만들어?”
“죄송합니다, 대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설마 귀면신노가 만든 인피면구를 꿰뚫어보는 자가 있을 줄은···.”
“솔직히 말해봐. 나 고생하는 모습 구경하려고 일부러 들어온 거 아니야.”
“···예.”
“내가 예전에도 말했지. 넌 그놈의 호기심 때문에 언젠가··· 쿨룩.”
“대주!”
옷자락으로 피를 닦아내는 그의 모습에 부하가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호들갑 떨 거 없다. 이제 좀 시원해졌으니까. 그보다 네 몸이나 살피거라. 지금이야 역혈대법의 효력이 남아 있어 못 느끼겠지만, 근 한 달 간은 밥숟갈도 들기 힘들게다.”
“정말 대주께서 때마침 와주시지 않았으면 전···!”
“살려달라고 폭죽까지 터뜨린 놈이 말은···.”
“어깨에 구멍까지 났으니 내일 도착할 녀석들에게 어떤 비웃음을 당할지 두렵습니다.”
“추종향 묻히고 온 것도 빼먹지 말고 전하거라.”
툴툴거리던 사내가 부하를 향해 지나가듯 물었다.
“마마께선.”
“여전하십니다.”
“쯧.”
“대주께선 지낼 만 하십니까?”
“글쎄다.”
한숨을 내쉰 그가 품에서 곱게 접은 서찰을 꺼내 부하에게 건넸다.
“이건···.”
“향후 주의해야 할 후기지수들의 명단이다. 돌아가서 경윤에게 전하도록.”
“넷!”
“음···.”
또다시 울컥 솟구치는 핏물을 억지로 삼킨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지만 이 이상 자리를 비울 순 없었다.
그 순간, 부하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아, 대주! 잠시만.”
“또 뭐?”
“이걸 가져가셔야.”
“아, 깜빡했군.”
그는 부하가 건넨 명패를 바라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정말이지,
내일부터 방학이라 다행이야.
천무학관 소속임을 나타내는 신분패가 그의 옷소매 안쪽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