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276
약먹는 천재마법사 276화
대리전(1)
오렌이 가볍게 발을 두드리는 것과 동시에, 칠흑처럼 어두운 바닥이 한 칸씩 아래로 꺼지고, 큼지막한 나선형의 계단이 만들어졌다.
우우웅!!
그는 망설이지 않고 계단 아래쪽으로 발을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처음 성채가 만들어질 때만 하더라도 의심과 미혹이 끊이지 않았다.”
빛이라고는 한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지하로 향하면서도 오렌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물었지. 왜 굳이 벽을 쌓고 이 구역에 새로운 거리를 만들 이유가 있냐면서…….”
“…….”
“하지만 온갖 모욕과 뜬소문을 감내하면서도 지금의 질서를 구축했던 이유를,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있다고 믿었기에-”
걸음을 멈춘 오렌이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까지 책무를 다해왔던 거다.”
레녹은 그의 등 뒤에서 오렌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쫓았다.
어두운 공동 안.
갈라진 천장 틈 사이로 기어들어 온 한 줄기 햇살이 한 줌도 되지 않는 공간을 비추고 있다.
낡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묘비. 이끼와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방치된 공간.
그 위로 작은 돌 부스러기와 나무조각들이 중력의 흐름을 거스르고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듯한 이질적인 풍경.
레녹은 그제야 이 장소에 숨겨진 비밀이 무엇인지 깨닫고 숨을 삼켰다.
성채 내부에서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비처가 존재한다는 소문.
오렌은 그 소문의 진실을 직접 레녹에게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물론이고, 공간을 분단해서 격리시키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이적이지. 알아보겠나?”
“…….”
“삼영을 비롯한 세 가문은 각기 이와 같은 비처를 관리하고 있지. 본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시공간의 괴리……. 이 비밀을 시의회와 나눠 가지는 대가로,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이 비좁은 성채에 틀어박혔다.”
발칸의 시의회 역시 팔굉성채 내부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오렌의 말을 들어보면 그 비밀을 공유하는 대가로 삼두령 중에서도 지극히 특수한 존속방식을 허락받은 듯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구나. 혹시나 했지만, 설마 정말로 교단과 손을 잡았을 줄이야…….”
“그렇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오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비처를 보고 나서야 레녹은 복마전의 수장이 그에게 남겼던 전언을 이해했다.
귀도 교단의 비처. 시간의 마법과 관련이 있는 유적지.
그는 레녹에게 교단의 지부들을 뒤지라는 조언을 해주었던 것이 아니다.
복마전은 처음부터 교단이 이러한 비처들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윌터가 선교의 책무를 짊어지고 이 도시에 잠입해 온 것 역시, 성채 내부에 이러한 비처들의 존재를 인지했기 때문이었겠지.
그건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비처들을 연구하다 보면 시간계열 술식에 대한 단서를 찾아낼 수도 있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을 뻗어서 눈앞의 유적지를 관찰하려던 그 순간.
쩌어엉!!
유적지를 둘러싼 황금빛의 파동이 그대로 레녹의 마력을 튕겨냈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레녹이 희미하게 어깨를 떨었다.
성위의 경지에 다다른 지금 레녹의 마력조작능력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이보다 한참 수준이 낮았을 때도 대마법사급의 입자조작이 가능했던 레녹이다.
그런 조작능력으로 사용한 마력감지에 반응하는 것도 모자라, 명확하게 인식하고 방어해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적어도 레녹이 육안으로 보았던 결계들 중에서는 단연코 최상급에 해당하는 보안결계.
오렌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시의회의 중개를 받아, 대륙에서 제일가는 대결계사를 초빙해서 만들어낸 공간격리주박이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결계사는 승천에 도전했지. 이 성채에 뿌리내린 세 개의 주박결계가 그의 마지막 작품인 셈이군.”
“승천에 가까운 실력으로 설계한 결계라, 이건가…….”
그 정도 경지에 다다른 괴물이 만든 결계이기에, 레녹의 마력조차 반응해서 거부해낼 수 있는 것인가.
오렌이 이어서 말했다.
“비처를 관리하는 가주와 채주의 피를 동시에 흘려보내야만 잠깐이나마 결계를 해제하고 유적지를 관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채주의 권한을 정당하게 승계받기 위한 것이 바로…… 네가 참가하려 하고 있는 대리전이지.”
그는 시선을 돌려서 담담한 표정으로 레녹을 응시했다.
“패배하면 채주의 권한을 넘겨주게 된다. 교단이 유적지를 건드릴 수단을 이쪽에서 제어할 수 없어지는 거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새카만 눈동자가 그 얼굴을 투명하게 비추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대리전에 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삼영가주. 당신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레녹이 웃었다.
“정말로 대리전의 승리를 통해 채주의 직위를 인계받을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계획을 짰을 리 없어. 저항의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 다른 가문과 대리인을 철저하게 관리했겠지.”
“…….”
레녹이 이어서 말했다.
“놈들이 원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대리전의 존재 유무 그 자체다. 아마 승패와는 상관없이 채주의 권한을 탈취해 올 계획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겠지.”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
성채의 채주를 결정하는 이벤트는 이 구역의 모든 거주민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으기에 부족함이 없는 거창한 명분.
거기에 인간의 생명을 물건처럼 쓰고 버려 버리는 교단의 입김이 섞였다면, 대리전에서 패배하고도 무슨 수를 쓰려고 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레녹이 연초를 꺼내 입에 물면서 중얼거렸다.
“대리전에서 승리하는 것과 동시에 교단의 정체를 억지로 까발리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우리가 직접 판을 흔들 필요가 있겠지.”
* * *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아리스가 약속했던 휴가 날짜가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함께,
다음 채주를 결정하기 위해 8가문이 한자리에 모이는 총회의가 열렸다.
당연하게도 8가문의 의견이 하나로 모이는 일 없이 파토.
채주를 결정하는 일은 대리인을 내세운 대리전으로 넘어갔다.
이 폐쇄적이고 비좁은 성채에서 단 하나, 유일하게 공평하고 공정하게 돌아가는 일이 있다면 바로 자신들의 다음 지도자를 결정하는 일 하나뿐.
성채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 팔굉성채의 일원이라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자리에 함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대한 나무 뿌리를 중심으로 세워진 큼지막한 목각 장원.
수천 명에 달하는 성채 주민들을 능히 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장원은 가히 스타디움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반경 수백 미터에 달하는 무대를 내려다보는 관객석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고,
흥분에 찬 관객들이 고함 소리가 귀청이 터질 만큼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그들에게 있어서는 당장 다음 지도자가 누가 되느냐 만큼이나, 앞으로 있을 대리전의 양상 역시 흥분되는 종류의 것이겠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다.
성채의 거주민으로서 살아오던 그들이 이렇게 합법적으로 초인들의 전투를 관람할 기회가 얼마나 될까.
오히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대리전이라는 명분만으로 이렇게 성채 주민들을 모두 불러모으지는 못했을 것이다.
성채 내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자리보다는, 축제에 가까운 분위기.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요란한 음악과, 무대를 흥겹게 돌아다니며 행진하는 광대들의 모습은 처음부터 8가문에서 이런 분위기를 의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게 빽빽하게 들어찬 관객석들 한가운데, 유달리 사이 공간이 넓게 펼쳐진 특별석.
성채의 고위 관계자들에게만 허락된 특등석 사이에서도 가장 정성 들여 꾸며진 8개의 좌석.
8가문의 가주들을 위해 마련된 그 자리에는 단 하나의 공석도 없었다.
성채를 이끄는 가문의 수장들 역시 오늘 이 자리를 위해 직접 그 무거운 엉덩이를 이끌고 자리한 것이다.
‘임원총회가 생각나는 자리군…….’
대리인의 자격으로 무대 뒤쪽 대기석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레녹이 물끄러미 관객석을 올려다보았다.
저쪽에서는 이쪽을 들여다보기 힘들지만, 두꺼운 커튼 사이로 레녹이 관객석을 훔쳐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삼두령의 수뇌부들이 모인 대규모 회의. 조직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소집령.
얼마 전 카르텔과의 일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카르텔 모두가 적이나 다름없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이곳에도 레녹의 편이 존재한다는 것이겠지.
오만한 표정으로 무대를 내려다보는 삼영의 가주, 오렌과 긴장한 얼굴로 곧게 등허리를 편 수련의 모습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새하얀 백발을 땋아 올린 노년의 여성, 이본의 모습까지.
그녀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일원의 가주는 나이가 어린 소년으로, 이본의 기세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보였다.
웃는 얼굴로 아래서 펼쳐지는 흥겨운 공연을 바라보던 이본이 슬쩍 소년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아랫것들이 준비를 잘해온 것 같지요? 보는 늙은이도 절로 흥이 나려 합디다.”
“그, 그렇군요…….”
“새로운 채주를 결정하는 자리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없군요. 이 정도면 바깥 손님들에게도 능히 면이 설 것 같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팔굉성채가 건재하다는 것을 사방에 알려야 하는 이 자리에, 왜 두 가주님은 수행원도 데려오지 않으셨는지 늙은이는 이해가 가지 않네요.”
이본 가주의 날카로운 시선이 향한 곳은 멀지 않았다.
그녀의 날이 선 눈초리를 받은 두 가주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수련이 살짝 어깨를 좁힌 것과는 반대로, 오렌은 팔짱을 낀 채 대놓고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제 말이 들리지 않으시는지?”
섬뜩하게 변한 이본의 목소리에, 수련이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륜가는 최근에 큰 고비를 겪은 뒤로, 가문 재건에 바쁜 실정입니다. 이해해 주시길.”
굳이 물을 필요도 없다.
오륜의 전대 가주의 사치와 향락을 문제 삼아 그의 목을 날려버린 장본인이 바로 그녀였으니.
뭐라 트집을 잡지 못한 이본이 시선을 오렌에게 돌렸다.
“삼영은 왜 대답이 없지요?”
“대답이라…….”
오렌이 천천히 눈을 뜨면서 이본의 가주와 시선을 마주했다.
“언제부터 내 수행원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지?”
“…….”
“채주가 살아 있을 적에도 다른 가문에는 하등 관심 없던 할멈이 이제 와서 내게 선도를 하려는 겐가……. 세월이 참 무상해.”
무심한 듯이 중얼거리는 오렌의 말에 이본이 빠득 이를 갈았다.
“삼영가주. 시기가 시기인 만큼, 그런 발언은 많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같은 날에 굳이 분위기를 해쳐서 좋을 일이 없을 텐데요.”
이본의 손이 자연스럽게 일원의 가주 역할을 맡은 소년의 어깨로 향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꽈악.
“이 늙은이는 일원가주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은데요.”
다른 가문의 의견 따위는 하등 신경 쓰지 않는 자연스러운 태도.
하지만 그 고압적인 발언에도 그 누구도 반발하지 않는다.
팔굉성채를 이끌어온 8가문. 하지만 그중에서도 명백히 세 가문의 위세가 다르다는 것 하나만큼은 다들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원가 출신이었던 채주가 죽은 뒤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표정을 찡그리던 소년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
오렌이 희미한 연민의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8가문의 가주들 사이에 날카로운 긴장감이 흐르는 사이,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를 가득 메우고 울려 퍼졌다.
[그럼 지금부터 팔굉성채의 주인을 결정짓는 대리전을 시작하겠습니다!!]* * *
“그럼, 이쪽 대리인 분들께도 대리전의 규칙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원을 알 수 없는 도포를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레녹을 비롯한 네 사람의 앞에서 길쭉한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다음 채주를 결정하기 위한 가주회의에서 의견이 일치되지 못함을 확인한 바, 성채의 전통과 규칙에 따라 가문간의 대리인을 내세워 결정권을 양도하게 됩니다.”
“…….”
“일원과 삼영을 중심으로 여덟 가문의 의견이 갈린만큼 승패에 점수를 매기는 것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고 판단되어, 대장전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말은 아니다.
대리인이 각기 네 명으로 나뉜 지금에는 2 대 2로 승패가 갈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으니.
하나의 대장을 정해두고 그 대장이 쓰러질 때까지 상호 간의 1대1 결투를 이어나가는 방식.
“대전에 앞서, 대리인 분들은 모두 이 팔찌를 장착해 주십시오.”
남자가 품안에서 팔찌를 꺼내들어 레녹을 비롯한 다른 대리인들에게 나눠주었다.
큼지막한 여덟개의 고리로 만들어진 팔찌다. 여덟개의 사슬 고리 중에서 하나의 사슬만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대리인의 자격을 증명하고, 승패에 따라 권한을 양도받는 의식을 매개하는 촉매입니다. 대리전 의식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발동하여, 여덟개의 사슬 고리에 의지가 깃들면 의식이 종료됩니다.”
[생각보다 무거운데.]투덜대는 맨슨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가 말을 이었다.
“팔찌의 파손, 점유, 양도와 같은 훼손이 발생할 경우 그 시점에서 대전은 종료. 권한을 양도하게 됩니다. 관중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마력을 투영하면 쉽게 파손이 이뤄지니 조심하시길.”
“그 기준은 어느 정도지?”
“……가주분들과 대등한 실력자의 참전을 고려하지는 않았습니다.”
요컨대 성위급 마력을 함부로 사용하다가는 역으로 실격패를 당할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저쪽의 대리인들 중에서도 경지에 이른 전사가 있겠지만, 명백하게 이쪽에게 불리한 사항임에는 틀림없다.
마법사인 레녹에게 행여나 화력으로 상대를 찍어누를 여지를 없애버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
발끈한 첸이 무어라 쏘아붙이려 했지만, 맨슨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첸. 내버려 둬라.”
레녹 역시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쪽에서 안전을 명분으로 삼았는데, 여기서 트집을 걸기는 어려운 일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팔굉성채의 채주를 결정하는 대리전. 대리인의 실력에 상한선을 걸어두지 않는다면 성채가 감당할 수 없는 외부인의 난입으로 일이 어지러워질 테니.
더불어 장원 주위에 빼곡하게 몰려든 성채 주민들의 안전을 고려하는 것 역시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초인들의 전투가 격렬해지면 그 여파 역시 걷잡을 수 없어질 테니까.
“빌어먹을, 하지만 이건……”
“안다. 하지만 감수할 만해.”
하지만 이런 식의 노골적인 마력제한은 오직 레녹 하나만을 견제하기 위한 노림수일 터.
이번 의식의 중재자들 중 일부는 이미 연맹 측에 줄을 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오히려 이 정도로 끝난 게 신기한 일이군.”
“…….”
레녹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고 싶은 모양이지만, 이런 식의 페널티를 우회할 방법은 차고도 넘친다.
오른쪽 손목에 팔찌를 차면서도 여유로운 레녹의 말에 남자가 희미하게 미간을 꿈틀거렸다.
레녹은 그 희미한 표정의 균열도 놓치지 않았다.
“……반대쪽 대리인 분들께는 이미 설명해 드리고, 대장이 정해진 상황입니다.”
남은 규칙을 마저 설명한 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삼영의 대리인 분들 역시 전투에 나설 순서를 정해주신다면, 곧바로 대리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레녹은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서 가장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렌이 직접 지정해서 이 자리에 데려다 놓은 삼영의 대리인을.
“어, 어떡하지. 어떡해…….”
“…….”
“싸우기 싫은데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을까요?”
퀭한 두 눈과 비쩍 마른 몸.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손톱을 물어뜯는 청년.
전사로 보이기는커녕, 당장 싸울 컨디션조차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가 바로 삼영의 대리인.
레녹은 말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이것 역시 오렌과 사전에 합의가 된 내용이기는 했지만, 막상 그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스이라고 했나?”
“바, 반 님. 살려주세요. 삼촌의 말 때문에 여기 나, 나오기는 했지만 전 사실 단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구요!!”
호들갑을 떨면서 울음을 터트리는 아스이의 모습에, 옆에서 그 꼴을 지켜보던 맨슨과 첸의 표정도 묘하게 변했다.
이번 대리전에서 애초에 도움이 되지 않을 동료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맥아리 없는 사람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스이는 그런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리에 무릎을 꿇은 뒤, 레녹의 코트자락을 부여잡고 달달 떨기 시작했다.
“아, 아니 난 분명 뒷방에서 책을 읽고 연구하는 일을 부탁하신 줄 알았는데, 왜 제가 이런 일을……. 왜 이런 일으으을!!”
비참한 비극의 주인공처럼 처절하게 절규하는 아스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실 그렇게 무서운 게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 정도.
하지만 레녹은 그 호들갑을 칼같이 잘라내는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적당히 그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아스이. 진정해라. 오렌에게 이미 어느 정도 이야기는 들었을 텐데?”
“그, 그치만……. 계획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대리전에 대해서는 몰라요. 제가 저기 서야 할 줄은 정말 몰랐다고요!!”
“흠.”
오렌이 무신경한 사람임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설마 가문의 대리인으로 나서는 사람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을 줄이야.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구경하던 맨슨과 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이게 일반적인 술사들의 반응이기는 하지. 반을 너무 자주 보다 보니 나도 잠깐 잊고 있었군.”
[맞아맞아. 후위에 서보기는커녕, 평생 실전경험이 없는 놈들도 얼마나 많은데. 네가 이상한 거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레녹 역시 이 바닥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왔음에도, 자신처럼 마법만으로 전위와 후위를 가리지 않는 경우를 보지는 못했으니까.
그나마 카르텔과의 일전에서 싸웠던 파르덴 맥퀸 정도가 그와 비슷한 사례겠지만, 그 역시 고무술을 익힌 수준급의 전사가 아니었던가.
삼영가의 방계 후손이자, 그림자 술식을 물려받은 아스이는 우수한 술사일지는 몰라도, 뛰어난 전사는 결코 아니었다.
남들과 한번도 다투거나 목숨의 위협을 느껴본적이 없던 그가 느닷없이 죽고 죽이는 전투에 내던져졌다면, 이성을 잃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중년 남자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빨리 순서를 정해주십시오.”
“…….”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이번 대리전의 승패가 어디로 향할지 대충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레녹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곧바로 순서를 배정했다.
레녹이 대장. 맨슨이 후열. 첸이 중견.
그리고 아스이가 선봉.
“흐아아아아악!!”
나무 판자에 먹칠된 자신의 이름을 본 아스이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으음…….”
[이 얼간이가 정말로 삼영의 대리인이라 이거지?]맨슨이 로봇 대가리에서 빨간 경고등을 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렌은 성채 내부에서도 높은 평판과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동시에 지키고 있는 기인이야. 반이 그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이건…….”
첸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지만, 레녹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스이는 삼영의 그림자술사들 중에서도 오렌 다음가는 실력자야. 이번 일에는 반드시 그의 힘이 필요하다.”
“그건…….”
대리전의 규칙 중 하나. 기권은 대전 이후 5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능하다.
과연 저쪽에서 첫 번째로 나타날 대리인을 상대로, 아스이가 5분을 버티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레녹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잠깐, 반. 설마?”
레녹의 말에서 불길함을 느낀 첸이 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오히려 이 녀석으로서는 의식이 없는 게 나을 수도 있을 테니.”
다섯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마력사가 축 늘어진 아스이의 사지를 거침없이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