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311
약먹는 천재마법사 311화
톱니바퀴(4)
차가운 안개가 내려앉은 새벽 외곽도로.
이리저리 파헤쳐진 채 침묵하던 아스팔트 표면이 느닷없이 붉게 달아오르고, 수십 발의 레이저가 터져 나와 하늘 위로 솟구쳤다.
콰아아아앙!!
폭음 사이로 튀어나오는 두 개의 인영.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룬델과 땀을 줄줄 흘리며 그를 따라 나온 레녹의 모습까지.
연초를 꺼내든 레녹이 숨을 고르며 웃었다.
“내가 질식해 죽을 때까지 버틸 생각이라 하지 않았나? 참을성이 없군.”
[흐, 이미 진작부터 열기를 거르면서 호흡하고 있었으면서…….]“눈치가 좋은데.”
까드드드드득!!
레녹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박살 난 아스팔트 위로 따라 기어 올라온 수십 가닥의 기계촉수 더비가 동시에 룬델을 노려본다.
자동차만 한 굵기의 뱀 수십 마리의 아가리 사이로 새빨간 레이저 광채가 빛났다.
공작새처럼 활짝 펼쳐진 촉수더미. 하지만 그 광경은 룬델 자신이 의도하고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제는 자신을 향해 그 아가리를 돌린 뱀의 모습을 보며 룬델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전선은 진작 다 끊어놓았는데도 이렇게까지 움직이다니…… 너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설치형 중장비 기생형 마력포대, 쥬네스의 뱀.
그 위력과 자의적인 판단능력은 실로 엄청난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제 자리에 설치된 채 동력원을 공급받지 않는다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하지만 레녹은 그런 단점 따위는 싸그리 무시하고 저 탄광 지하에 설치해둔 포대를 지상으로 끌어올려 룬델을 몰아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빤히 룬델을 바라보던 레녹이 씩 웃으며 말했다.
“건전지 역할을 대신하는 중이지.”
파지지직!!!
레녹의 양손에서 흘러나간 전격이 정확하게 끊어진 기계촉수 더미 아래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촉수의 규격과 용도에 맞는 동력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변환.
동시에 다비가 제압한 촉수의 방위 시스템을 재설정해 룬델을 표적으로 잡는다.
[X발……!!]룬델의 단말마와 함께, 쥬네스의 뱀에서 쏘아진 레이저가 외곽도로 일대를 뒤덮고 중앙선을 따라 길게 휩쓸었다.
콰과과과!!
등 뒤에서 길게 쏘아지는 레이저의 비. 미친 듯이 도망치는 룬델의 모습을 편하게 구경하던 레녹이 다비에게 물었다.
“다비. 분석은 끝났어?”
[간이공간 구현기능이 내장된 부품의 출력과 작동원리는 기록해 두었습니다.]다비가 곧바로 레녹의 이어폰을 통해 대답했다.
[다만 저 개조육신의 통제권을 빼앗기 위해서는 직접 접촉이 필요할 것 같군요. 독립된 시스템을 사용하는 만큼, 회로개입 없이는 해킹이 어렵습니다.]“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레이저의 폭격 속에서 모습을 감춘 룬델에게서 시선을 돌린 레녹이 대답했다.
“놈도 슬슬 여력이 다한 모양이니까, 조만간 승부를 걸려들 거야.”
이렇게까지 몰린 상황에서 룬델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승부수라 한다면.
콰아아앙!!
간이공간을 전력으로 투영해서 임하는 초근접 전투가 아니겠는가.
수십 미터를 날아든 간이공간 도약. 양손에서 뽑아낸 빔 블레이드로 레녹의 실드를 박살 낸 룬델이 으르렁거렸다.
[미안하지만 데이터 수집에 대해서는 없던 일로 하지.]“그게 내게 미안해할 일이었나?”
[대신 네 시체를 찢어발긴 후 가지고 돌아가면, 생체공학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뭐라도 해주지 않겠어?]키잉!!
빔 블레이드가 레녹의 실드를 거침없이 썰어내고, 쏟아지는 레이저의 폭격을 튕겨내며 지척까지 파고든다.
레녹의 몸을 둘러싼 실드가 압축되면서 쏘아지는 광량을 받아내기 위해 회전하지만.
끼이이익!!
쇠가 긁히는 듯한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실드가 부자연스럽게 밀려나고, 역으로 레녹의 맨몸이 그대로 노출되기 시작한다.
[말했잖아.]뇌리를 파고드는 찰나와도 같은 전성.
노골적인 비웃음이 섞인 확신.
[아무 소용 없다니까?]실드가 차지하는 공간을 간이공간으로 밀어내며 위치를 뒤바꾼다.
공간을 통째로 밀어내며 칼날과 실드의 위치를 통째로 전이. 룬델이 휘두른 빔 블레이드가 빨려 들어가듯 레녹의 복부를 향해 쏘아졌다.
쒸이이익!!
눈 깜박할 사이 교차하는 수십 번이 넘는 공방. 간이공간의 구현과 공간의 밀림을 동시에 계산해 상대의 공방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한 수.
찰나의 공간간섭을 통해 실드를 옆으로 밀어내고 공격을 가해온다면, 레녹으로서는 정상적인 공수교환이 불가능해진다.
룬델이 말한 예측하지 못했던 물리법칙의 간섭이란 바로 이런 식의 살수를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실드와 전격마법으로 룬델의 공격을 받아치려 해봤자, 룬델이 원하는 대로 공간을 밀어내면 결국 빈 틈을 내줄 수밖에 없을 터.
더불어 룬델의 위치조차 제대로 특정할 수 없다면, 정면대결에서 레녹이 룬델의 공격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심장부터다!!]쐐애액!!
순식간에 레녹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룬델이 빔 블레이드를 가볍게 밀어 넣었다.
레녹이 즉시 반응해서 실드를 뒤로 돌려세우고 낙뢰를 내리찍지만, 그 모든 공방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듯 밀려나고.
반대로 룬델의 블레이드는 반월처럼 휘어져 정면에서 레녹의 가슴팍을 노린다.
하나의 간이공간으로 공간을 두 갈래로 양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밀어내는 수준의 신기.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이 필살의 수에 반응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레녹은 코앞까지 다가오는 블레이드의 광채를 보면서도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끼이이이익!!
그 순간 레녹의 양옆으로 밀려났던 실드가 기이할 정도로 안쪽으로 구부러지면서, 순식간에 룬델의 블레이드를 막아낸다.
터엉!!
[……!!!!]한순간에 가까운 저지. 하지만 룬델 역시 레녹이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깨닫고 경악스러운 전성으로 소리쳤다.
[공간이 밀리는 정도를 예측하고 실드를 그에 맞춰 구부린 건가……!!]간이공간을 만들어 공간을 한쪽으로 쭉 밀어냈다면, 레녹 역시 구현해둔 실드와 마법을 그 밀리는 정도에 맞춰서 움직이면 그뿐.
하지만 그것은 공간이 밀려나는 순간과 거리를 예측하고 반응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단 한 번이라도 예측에 실패한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내주게 될 터.
레녹은 룬델이 어떤 식으로 급소를 찌르려 드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 특유의 공간간섭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룬델이 하나의 공간에 고정되는 한순간을 기다리기 위해.
필살이라 생각했던 후공이 빗나간 아주 잠깐의 빈틈.
그 찰나의 간극을 거침없이 꿰뚫고 레녹의 손바닥이 룬델의 명치에 틀어박힌다.
손안에 한껏 압축된 마력이 회전하며 그리는 형상은 한계를 모르고 피어나는 불꽃.
[축화(築火)]극한까지 압축된 화력의 정수가 고스란히 룬델의 몸에 꽂혀 들어가며 그 육중한 기계 육신을 뒤로 터트렸다.
콰아아앙!!!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한 전성을 내지르며 공터 밖으로 튕겨 날아간 룬델이 그 자리에서 미친듯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빌어, 먹을……!!]한번 열기를 머금고 달아오른 부품들이 쉽게 냉각되지 않는다.
룬델의 몸을 뒤덮은 외골격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며 순식간에 기계가 접합된 앙상한 육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순전히 마력원을 남기기 위한 생체조직. 그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신을 기계로 대체한 사이보그의 정점.
하지만 그 기술력과 내구도는 레녹이 보았던 그 어떤 이들보다도 정교하고 완성되어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방금 그 공격을 고스란히 맞아줬다는 것 자체가 네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군.”
공터 밖으로 걸어 나온 레녹이 말했다.
“온몸을 개조하고 그 기술의 정수로 간이공간 구현을 선택한 게 아니야. 그 기능만을 위해서 전신을 갈아 넣은 결과물이 그 모습일 뿐이지.”
[데이터 송신 기능 불능……!! 도대체 언제!!]당황한 기색으로 가슴팍을 더듬는 룬델을 내려다보며 레녹이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오직 한가지 기능의 구현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통째로 바친다……. 말 그대로 기계의 부품이나 다름없는 삶이군.”
자신들의 연구한 기술의 구현을 위해 전신을 개조하는 광인들의 집단.
기어사이드라는 조직의 이름 자체가, 그 목적과 연원을 적나라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이제 와서 방위군 사령부와 손을 잡고 무슨 짓을 벌이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자색으로 빛나던 레녹의 왼쪽 눈동자가 검게 돌아온다.
“산채로 그 몸을 헤집다 보면 뭐라도 알아내기는 충분하겠지.”
[으아아아아아아악!!]절규와도 같은 비명.
그 직후 룬델의 앙상한 몸이 폭발적으로 가속하며 레녹을 향해 쏘아졌다.
후위공간을 통째로 밀어 올려 존재하지 않는 속도를 만들어내는, 제로백에 가까운 필살의 일격.
끼이이이익!!
하지만 그 마지막 발악조차, 레녹의 앞에서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위로 돌아간다.
허공에서 쏘아진 룬델의 몸을 그대로 멈춰 세운 레녹이 말했다.
“공간전투에 대한 감을 잡기에는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감, 이라니……. 그렇군.]그제야 레녹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룬델이 허탈하게 웃었다.
[직접 공간에 손을 대는 술사 앞에서, 묘기를 부렸을 뿐이라고?]“…….”
[고작, 부품…… 고작, 부품……]멍하니 넋두리를 시작한 룬델의 모습.
레녹은 잠시 그 중얼거림을 들어두다가, 그의 체내에 침투시킨 다비의 힘을 이용해 그대로 의식을 끊어버렸다.
기계 두개골 사이로 떠오른 안광이 꺼지듯이 사라지고, 축 늘어진 그의 몸을 마력사로 묶어올린다.
[이상하게 개조된 전력이라 그런지 영 맛이 이상하군요.]그제야 쓰러진 룬델의 몸 사이로 전선을 문 다비가 폴짝 뛰어올랐다.
[살짝 익히다 만 느낌이라 해야 하나.]“데이터 송신은 제대로 끊었지?”
[의식 데이터를 기어사이드 공용 네트워크에 백업시켜 놓았길래, 잠깐 송신을 풀고 백업 데이터를 통째로 지워버렸어요.]꼬리로 쓰러진 룬델의 머리를 탁탁 친 다비가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이 맛없는 전기를 다시 먹게 될 일은 없을 거예요.]“잘했어.”
레녹은 다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그녀를 안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룬델의 공간밀림을 파훼하고 축화를 명치에 꽂아 넣은 순간, 레녹은 다비를 전산화시켜 그대로 룬델의 몸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신체 대부분을 기계로 대체하고 작동하는 그 육신이라면, 전뇌정령의 힘이 간섭할 여지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
그 예측이 제대로 들어맞아 룬델의 데이터 송신기능을 무력화시킨 순간부터 이미 전투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레녹이 굳이 룬델의 마지막 발악을 용납해 준 것은, 자신이 조작하는 공간이 룬델의 간이공간 밀림에 대처할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을 뿐.
거기까지 확인한 뒤에는 충분했다.
중요한 것은 내부 배신자를 색출한 것으로도 모자라, 기어사이드의 일원을 직접 생포했다는 성과였으니.
“팔라드에게 메시지를 보내 상황을 알려줘.”
멈춰 세운 바이크 쪽으로 걸음을 돌린 레녹이 말했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품 안에서 연초를 하나 더 꺼내 든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담뿍 들이마시며 바이크 위에 걸터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어사이드의 개입 증거를 찾았다고 말해주면 되겠군.”
* * *
에이전트 본부.
본부 지하에 위치한 광활한 대강당.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을 거뜬히 수용가능한 계단식 구조의 무대가 돋보이는 곳이다.
그 계단의 방향이 몰리는 중앙 단상에 선 팔라드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시정부 보안 네트워크에 등록된 방위군 첩보부대 요원들 중 67%의 신원확인이 끝났다.”
파앗!
동시에 스크린에 떠오른 무수한 방위군 대원들의 사진들. 개중 새빨간 X자가 쳐진 사진이 절반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첩보부대 열 명 중 거의 일곱에 가까운 이들을 잡아 사살한 셈이지. 다분히 모험적인 작전임을 감안하면 지극히 성공적인 성과다. 물론 거기 두 사람의 공헌이 지대했음은 부정할 수 없겠지.”
그 두 사람이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대강당에 난 무수한 자리 사이에서도 서로 떨어져 앉은 반과 이리야에게 자연스레 시선이 쏠렸다.
무표정한 얼굴의 반과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은 이리야.
“특히 반의 경우에는 작전 도중 기어사이드 소속의 전투원과 조우하고도 이리야와 대등한 전과를 올렸다. 긴말하지 않고 직접 확인하지.”
스크린 화면이 바뀌고, 나타난 것은 다소 화질이 조잡한 카메라 영상.
온몸에 육중한 구속구를 채워 넣은 남자가 독방에 갇혀 있는 모습이 비춰진다.
[츠즈즈즈즈즈!!!]같은 인간의 모습이라기에는 다소 기이하기 그지없는 형상.
틀림없이 인간의 얼굴과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 그 모든 구성요소는 생명보다는 기계에 가까운 이질적인 어색함이 거기에 있다.
“…….”
그 광경을 확인한 이리야의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레녹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내가 왜 자네들에게 이 정보를 공개하는지는 이해하겠지.”
팔라드가 말했다.
“작전에 협력해 준 이들에게는 이 모든 일이 단순한 방위군의 쿠데타가 아님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침묵이 흘렀다.
“기어사이드. 기계도시 마키나에서도 배척당한 마도공학 연구의 이단아들. 우수한 두뇌와 개조된 육신으로 무장한 엘리트라지.”
가만히 입을 다문 프리랜서들을 상대로 팔라드가 말을 이었다.
“이들이 어째서 이번 일에 참여했는지는 모르나, 이번 일로 직접적인 개입이 있음은 확실해졌다. 요새를 멈춰 세우는 수준을 넘어, 그 이상의 적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지.”
그 말과 함께 다시 스크린의 화면이 변하고, 까마득한 상공에서 찍은 위성 영상이 나타났다.
“지금부터 시작될 이동요새 공략작전에서 말이다.”
쿠우웅!!
지면이 부서져라 밟으며 끝을 알 수 없는 땅울림을 내뱉는 거대한 강철의 요새.
그 형체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앞으로 전진하며 사방으로 눈부신 마력광을 내뿜고 있다.
요새 사방에 달린 포신과 갑주의 수는 눈대중으로 보아도 수천 이상.
단신으로 화망을 형성하는 수준을 넘어, 전선을 구축하고 저지선을 만들기 위해 설계된 전략병기의 위용이 그곳에 있었다.
스크린을 뚫고 뛰쳐나와 대강당을 가득 메우는 소음.
팔라드는 그 소음을 뻔히 내버려 둔 채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미리 말해두지. 빠질 사람은 되도록 빨리 내게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무슨 뜻이지?”
앞줄에 앉아 있던 나이 든 장년 남성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우리들 중에 일하다가 뒤통수를 때릴 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인가?”
“…….”
“휴가가 끝나고 돌아온 현궁한테 머리가 뚫리고 싶은 놈이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그렇게 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만큼 지금 바깥에서 돌아가는 상황이 다급하다는 의미지.”
팔라드의 담담한 대답에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자네들이 대원들을 사살하는 사이, 나는 따로 차출해 둔 요원들과 함께 13구역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만약 방위군 사령부가 13구역을 노리고 있다면, 첩보전력들이 사살당하는 사이 그쪽을 향해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결과가 어땠을 것 같나?”
대꾸할 틈도 없이 팔라드가 이어 말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13구역은 사령부의 안중에도 없었던거야. 놈들의 목적은 오직 이동요새를 거대도시 근처까지 전진시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어.”
“그 말은…….”
그제야 팔라드가 하는 말을 이해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전트는 단순히 이동요새를 상대하기 위해서만 작전을 짰던 것이 아니다.
첩보부대를 사살하며 상대의 반응을 기민하게 관찰하고, 그 근거를 토대로 사령부의 진짜 목적을 알아차리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방위군 사령부의 목적이 폐쇄구역이 아니라, 발칸 미개발 지구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군요.”
“정확해요.”
파노아의 첨언에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름이라는 짧지 않은 유예기간은 진짜 목적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 동시에 도시 내부에 혼란을 일으키며 양동작전을 벌이는 사이 미개발 지구 근처까지 전진할 생긱이었겠죠.”
그 진짜 목적지이라는 것 자체가, 방위군 사령부와 손을 잡은 기어사이드의 목표와도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당장 그게 무엇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사령부가 미개발지구 근처까지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금제율령에 묶이지 않은 에이전트 현장요원 대부분이 도시 외곽으로 나가 이동요새의 이동경로를 파악 중에 있다. 경유지는 아마 위성도시 델타 인근이 될 가능성이 높아.”
다시 마이크를 붙잡은 팔라드가 이어 말했다.
“한나절의 준비시간을 주지. 그때까지 여기 이 회의실에 남아 있는 이들은 전원 미개발지구 밖으로 나가 이동요새 공략작전에 함께하게 될거다. 질문 있는 사람?”
“전력이 지나치게 부족하다고 생각이 듭니다만.”
기어사이드의 전투원이 생포당한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이리야가 불쑥 말했다.
“방위군 특수부대를 사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에 따르면 어디까지나 이쪽의 시선을 거대도시 안쪽으로 돌리기 위한 일환이었을 뿐. 진짜 방위군의 핵심 전력은 여전히 이동요새 근방에 포진되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사령부를 지휘하는 중장 트레펜은 성위급 육체능력자……. 그 밑에 남아 있는 세 명의 소장 역시 공식적으로는 7레벨에 도달했으며, 휘하 대령들도 기본적으로 마력의 성질변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아는 이들이겠죠.”
방위군의 전력에 대해서는 딱히 비밀이라 할 것도 없다.
거대도시 발칸의 경계구역을 가장 바깥에서 수호하던 시정부 직속 무력집단.
20년 동안 끝없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이제는 그 힘과 명성이 다한 지는 한참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성위급 초인과 군위급 능력자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음은 당연한 일.
규격 외라 불리는 8레벨의 괴물들을 제외하면 군위급 이상의 초인들은 언제나 도시 내 주요전력으로 취급되어왔다.
“거기에 기어사이드의 참전을 가정한다면 아무리 낙관적으로 보아도 전력이 부족한 상황……. 이쪽의 승기를 점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만.”
한창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그녀의 말. 하지만 이 자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동요새의 전진을 막아내는 것이 아니다.
이동요새를 공략하고 사령부 주요 간부들을 소탕한 뒤, 기어사이드의 계획까지 분쇄하는 그 모든 과정에서 전력을 온전하고 살아서 돌아오는 것.
이 도시의 질서와 치안유지에 목숨을 건 에이전트들과는 달리, 프리랜서가 무엇보다 중요시 여겨야 하는 것은 바로 그 과정이 아니겠는가.
당장 이번 일의 성공을 위해 나서는 것과는 별개로, 승산이 있느냐 없느냐는 굉장히 중대한 문제였다.
이번 작전에서 방위군 사령부를 상대할 수 있는 성위급 능력자는 레녹을 비롯한 극소수.
결국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서는 사령부 장성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을 직접 상대해야 할 텐데, 그 과정에서 특기전력의 머릿수가 밀린다는 것 자체가 승산을 점치기 어려운 상황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팔라드는 이리야의 날카로운 질문을 듣고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정확한 지적이야.”
“…….”
“방위군 사령부의 쿠데타가 발발한 시점에서 나와 메이어 의원 모두 그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지. 그렇기에 저번 암살모의가 있기 전까지 각자 역할을 나누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거다.”
팔라드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 거대도시에서 금제율령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도, 도시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능히 나서줄 수 있는 7레벨의 성위마법사.”
끼익!
그 말과 함께, 대강당 옆쪽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그녀가 바로 이번 작전의 마지막 참가자가 될 거다.”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환한 금발과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 간소한 셔츠와 채도가 낮은 푸른빛의 정장을 걸친 젊은 여성.
하지만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기세는 이 자리의 그 누구에도 밀리지 않을 만큼 강고하기 그지없다.
“아리스 리첼렌이라고 합니다.”
팔라드가 슬쩍 자리를 비키는 것과 동시에, 단상에 올라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런 자리에 함께하는 건 처음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서로 불편함을 감내해야겠죠. 잘 부탁해요.”
에이전트 부국장, 팔라드가 발품을 팔며 사방으로 지원군을 구하고 다닌 결과는 헛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 도시에서 그 누구보다 이번 일에 적합한 지원군을 데려오는 데 성공했으니.
싱클레어 마탑의 최고재능. 라바테논 대학의 석좌교수. 20대 중후반의 나이로 위계를 완성한 괴물.
다변화 원소변환 마법의 대가라 인정받으며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하기 그지없는 실력자.
아리스 리첼렌을 이번 작전에 섭외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고개를 들어 올린 아리스와 레녹의 눈이 동시에 마주치고.
“…….”
식은땀을 흘린 레녹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