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393
약먹는 천재마법사 393화
가지치기(1)
[뭔가 하려는 건 알겠는데, 그럼 일단 저거부터 치워봐라.]투덜거린 맨슨이 머리에 위에 맴도는 마력의 소용돌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잘못하다간 이 멍청이가 네 마력에 홀려서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흠, 그건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군.”
레녹이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웨이안은 마력감응력 하나만큼은 레녹과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특출난 적성을 타고났다.
문제는 본신의 경지가 상승하는 것과 동시에 감응력도 미친듯이 증폭되며 원하지 않는 부작용을 가져오는 경우.
레녹은 감응력에 걸맞는 여타 다른 적성과 능력을 통해 과도한 감응력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지만 웨이안은 경우가 다르다.
예지에 가까울 정도로 민감하기 그지없는 감응력은 웨이안을 군위의 경지까지 급격하게 성장시켜 주었지만.
반대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감응력을 웨이안은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염려한 제니도 웨이안에게 최소한의 업무와 출장만을 할당시킨 뒤, 감응력을 통제하는 훈련에 집중하라 일러두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어 보였다.
‘아리스가 새삼 대단해 보이는군…….’
웨이안처럼 한쪽으로 극한까지 발달한 재능을 가지고도 스물 중반을 넘겨서야 6레벨에 손이 닿았는데, 이것조차 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다.
하물며 아리스는 비슷한 나이에 군위의 끝에 도달해 심상을 각인하고 위계를 완성하기 직전에 와 있었다는 게 아닌가.
그녀의 선한 성정에 가려져 쉽게 실감하기 어려울 뿐. 괜히 그녀가 천재의 대명사처럼 거론되며 이름이 알려진 것이 아니었다.
재능을 타고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재능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 역시 주어지는 자격과 자질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레녹이 입을 열었다.
“좋아. 거기까지 감안해서 조정에 들어가지. 시작하자.”
웨이안의 명치 한가운데 검지를 들어 올린 레녹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위잉……!!
그 손짓을 따라서 허공에 덧칠된 마력이 선명한 원을 형성하고, 하나의 결계진으로 변한다.
진의 형태를 완성했다면, 그 사이에 규칙을 채워 넣는 것은 의념과 지식에 따른 무수한 분기점의 결실일 뿐.
그리고 가장 적합한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은 레녹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일이었다.
“됐다.”
동전 크기 정도의 결계진 사이로 빼곡하게 문양과 문자를 채워 넣은 레녹이 그대로 결계진을 웨이안을 향해 밀었다.
웨이안의 몸에 접촉한 결계진이 그대로 외곽선을 쭉 늘리더니, 목을 둘러싸고 피부 위로 문신처럼 새겨지기 시작했다.
치이익!!
“윽……!!”
살갗이 달아오르는 고통에 웨이안이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레녹이 곧바로 웨이안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가만히 있어라.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후우, 후우……!!”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는 했지만, 웨이안은 타오르는 고통에도 눈을 질끈 감았을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레녹이 무슨 마법을 걸어주려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와중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 믿고 있는 것이다.
웨이안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굳은 신뢰에 자연스럽게 레녹의 표정도 신중하게 변했다.
‘척수 쪽을 시작으로 뇌하수체 주변까지 엮어 들어간다. 조금만 조정에 실패해도 후유증이 상당할 테지.’
심상, 마력, 육신. 심기체로 대변되는 세가지 요소 중 레녹이 직접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웨이안의 심상을 건드리는 것은 어불성설.
하지만 안 그래도 예민한 마력감응력 자체에 레녹이 간섭하는 것 역시 부담이 될 확률이 높았다.
결계술을 통해 조정해야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터프하면서도 자극에 대한 내성을 갖추고 있는 웨이안의 육신 그 자체.
목에 걸어넣은 결계술을 통해 마력을 조심스럽게 웨이안의 척수 안으로 침투시켜 들어간다.
웅!!
비틀거리는 웨이안의 목덜미를 뒤에서 맨슨이 잡아 세웠다.
[반쯤 정신이 나가 보이는데, 꼭 이런 자리에서 세워놓고 진행해야 하나?]“대련을 하면서 온몸의 감각이 극한까지 예민해졌을 때가 가장 적합해. 이 순간을 놓치면 오히려 작업이 어려워지겠지.”
레녹은 정신을 집중한 채로 힐끗 맨슨을 돌아보며 말했다.
“상대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극 수용체의 역치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면서, 마력회로의 작동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게 만드는 거다.”
[……그런 작업을 지금 나랑 떠들면서 해도 되는 건가?]살짝 질린듯한 맨슨의 말을 무시한 레녹이 천천히 웨이안의 정수리에서 손가락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레녹이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낼 때마다 웨이안의 목에 새겨진 문신이 선명하게 변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채 입을 헤 벌린 웨이안의 뒷덜미를 쓱 매만진 레녹이 손을 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으니 눈 떠도 괜찮다. 슬슬 정신 차렸겠지?”
“……알고 있었어?”
머쓱하게 웃으면서 눈을 뜨는 웨이안을 보며 레녹이 픽 웃었다.
“그거라면 당분간 네 감각을 좀 둔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거다. 감응력이라는 건 결국 머리로 받아들이는 마력의 이물감을 감지하는 개념이니, 신체 부위를 특정하고 호르몬을 조절하면 감응력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겠지.”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수준의 인체조정이군.]맨슨이 웨이안의 목에 새겨진 결계진의 문장을 가까이서 뜯어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단순히 목에 문신을 씌우는 게 아니라, 완전히 몸에 녹아들어 가는 방식이잖아. 어지간한 치유술사도 이런 식으로는 못 한다고.]“척수 부근 회로를 특정하고 필터를 씌우면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방향을 조절할 수 있다.”
레녹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시에 그렇게 조절된 자극수용체의 기능을 다른 감각에 치환시키면, 감응력만큼이나 오감 자체도 더 예민하게 변하겠지.”
[…….]“육체를 다루는 초인에게는 기연이라면 기연인 셈이다. 이걸 어떻게 활용할지는 웨이안 본인에게 달렸군.”
당장 웨이안의 경지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감응력의 반응성을 다른 오감에 연결시켜 해소한다.
본디 있을 수 없는 재능과 반응의 조정. 스스로는 통제할 수 없는 그릇의 방향을 바꾸어 반응성 자체를 좀 더 개선된 방향으로 이끄는 일.
영역을 규정하고 법칙을 새롭게 정의하는 진둔의 결계술을 응용할 줄 알게 된 시점에서, 레녹은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끝을 짐작할 수 없는 레녹 자신의 그릇이라면 몰라도, 다른 이의 그릇이 가지는 총량을 파악하고 그 방향성을 만져주는 정도라면 가능할 터.
단순히 웨이안의 성장이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인체에 결계술이 어디까지 작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나면, 레녹의 몸에도 어느 정도 그 효과를 적용해 볼 수 있을 터.
장기적으로 레녹은 결계술을 통해서 마나중독의 후유증을 줄이는 방향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만간 버질의 부탁에 따라서 카르텔의 3사장을 상대하러 가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그나마 시간이 나는 것은 지금뿐이었다.
그제서야 레녹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한 맨슨이 머리통을 덜그럭거렸다.
[미친 자식……. 술식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마법사가 어디에 있다는-]“성채의 균열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한 기운이군.”
남색 머리칼을 길게 묶어내린 여성 창사, 수련이 레녹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팔굉성채의 8가문.
그중에서도 오륜가의 가주를 맡았던 그녀라면, 균열과 그 안에 존재하던 결계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있겠지.
그녀는 투명한 시선으로 레녹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반, 비밀에 대한 대답을 얻었나?”
“……어느 정도는.”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아. 그걸 위해서라도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한번 카르텔의 회장을 만나야 한다.”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바라보는 레녹의 두 눈이, 새파란 안광으로 빛났다.
“난 그걸 위해 이 도시로 다시 돌아온 거야.”
“그렇군…….”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결정했다면 그걸로 됐다. 성채의 의사는 이제 너와 함께할 테니.”
[카르텔의 회장이 이번에 모습을 드러낼지 좀 궁금해지는군. 반 너와 사장 간의 알력다툼이라 생각한다면, 오랜만에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레녹을 둘러싸고 뒤늦게 다가온 다른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목을 매만지던 웨이인이 중얼거렸다.
“아니, 다 좋은데……. 이거 너무 개 목줄 같지 않냐…….”
* * *
두두두두두!!
쏟아지는 박수갈채. 하지만 그에 비례하는 환호성은 들리지 않는다.
오늘 이 자리는 어디까지나 카르텔의 수뇌부 간의 의사결정을 보조하기 위한 자리.
사원들의 의례적인 박수는 필요하지만, 앞선 전투를 기대하는 열띤 환호성은 회장님을 모시는 자리에 있어서는 아니 된다.
버질은 자신이 비서실에 주문했던 사항이 제대로 지켜진 것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회장님, 어떠셨습니까?”
[비명 소리가 없어서 흥이 영 안 나는군. 버질 네가 주문한 것이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버질을 두고 가볍게 코웃음을 친 여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 아래로 길게 내려온 베일이 흔들리며 그 너머의 안광을 희미하게 비춘다.
전성기를 지나 그 힘이 쇠했음에도 찬란한 마안의 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올리비에라 론 메이즈라는 술사를 상징하는 칠채보의 마안.
몇 년 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힘이, 아직까지 건재하다는 사실에 버질은 희미한 안도감을 느끼며 말했다.
“간만에 거동하셨으니 회장님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사원들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흠……. 아무래도 좋다.]따사로운 몸짓으로 의자 한쪽에 몸을 기댄 올리비에라가 전성을 퍼트렸다.
[반은 어디에 있지?]“……곧 있을 시연을 위해서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본사가 소유한 미개발지구 사유지에서 진행되는 바, 관리직 이상의 직원들에게 송출될 예정입니다.”
칼같은 그녀의 말에, 버질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아도 3사장 아윤의 요청으로 두 사람 모두에게 각기 시연 장소를 알려주고 하루의 여유를 주었습니다. 회장님의 지시라면 곧바로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하루의 여유라고?]그 말에 따분한 기색으로 버질의 말을 듣고만 있던 올리비에라가, 슬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예.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지……?”
조심스러운 버질의 질문에, 그를 빤히 바라보던 올리비에라가 픽 웃었다.
[그 요청을 들어준 것을 보면, 아직 아윤 그자가 자신의 내력을 제대로 밝히지 않은 모양이구나.]“……네?”
[되었다. 싱거운 의례행사라 생각했는데, 기대한 것보다는 재밌어지겠군.]버질의 본사 사장실 꼭대기. 벽면을 가득 채우는 위성화면을 뒤로하고,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마치 그것만으로 작금의 상황을 관망하기에는 충분하다는 것처럼.
베일 너머로 일곱 갈래 광채가 섞인 마안이 느릿하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마치 인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십 킬로미터 저편에서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린 레녹이 중얼거렸다.
“취임식이라……. 핑계는 그럴듯하게 대는군.”
3사장 아윤의 새로운 사장직 취임을 축하하는 자리라 했던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건 것처럼 보여도, 그 실상을 알고 있는 레녹으로서는 헛웃음이 나오기에 충분한 상황.
이사진에서 새로이 승진한 5사장은 놔두고, 3사장에게만 시연을 요청한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것도 사외이사의 자리를 차지한 레녹을 상대로, 이런 미개발지구 한복판에서 그 일을 맡긴다는 것.
이번 일의 당사자인 레녹과 아윤은 물론이고, 이번 시연을 지켜보는 카르델의 조직원들조차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회사 내부에서는 이미 좀 다른 소문이 돌기 시작한 모양이에요.”
“무슨 뜻이지?”
레녹이 천천히 컨디션을 점검하는 사이, 뒤에서 시간을 점검하던 등기이사, 예리엔이 입을 열었다.
카르텔 두 정상급 수뇌부를 상대로 벌이는 시연. 그 장소 준비와 현장 지휘를 그녀가 직접 도맡아 처리하게 된 것이다.
“이번 일이 맥퀸 전 1사장 때 반 님이 나서셨던 것과 엮어서 이번 일도 비슷하게 진행되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
“반 님께서 사외이사 자리에 머무르시는 것도, 사실 수뇌부들을 관리하기 위한 처형인 역할을 맡은 게 아닌가…….”
“……뭐?”
소문이라는 게 가만히 놔두면 끝도 없이 부풀어 오르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레녹은 카르텔을 가지치기 해주는 정원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
괜히 귀찮게 카르텔 수뇌부와 엮이기 싫어서 방관했던 레녹의 태도가 오히려 더 큰 오해를 불러오고 있던 모양.
레녹은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진위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예리엔을 돌아보고 피식 웃었다.
가져온 장비와 아티팩트를 점검하는 사이, 예리엔에게 신호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 이제 나가시면 됩니다.”
긴장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예리엔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수행원이 천천히 길을 열어주기 시작했다.
코트를 매만지고 자리에서 일어선 레녹이 그대로 안내해 주는 직원을 따라 걸어나간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마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예리엔 역시 지금 이 순간이 카르텔의 수뇌부 서열정리의 분기점이 될 것임을 직감하고 침을 삼켰다.
‘일이 잘 풀려야 할 텐데…….’
3사장 아윤이 유흥에 미친 것도 모자라 카르텔 자회사 내부로 마약을 수입하고 있다는 소문이 이사진 내부에 자자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카르텔이라는 거함이 단 한 명의 미꾸라지 때문에 휘청거려도 이상하지 않은 지경.
예리엔은 지금 그녀를 뒤로하고 건물 밖으로 나서는 저 마법사가, 이번 일에 가장 적합한 인재라는 것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회장님을 배신한 전 사장 파르덴 맥퀸을 단신으로 상대해 죽여버린 49구역의 견뢰.
두 귀로 듣고도 쉬이 믿기 어려운 일화들을 쌓아올리면서도,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마법사가 바로 저기 서 있었으니까.
* * *
화악!
쏟아지는 햇빛을 한 손으로 가리며 레녹이 건물 밖으로 나섰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적한 거리의 풍경.
당장이라도 오가는 사람들이 보일 것처럼 잘 완성된 거리의 풍경. 하지만 이 근방에서 인기척이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 미개발지구는 카르텔이 과거 많은 인력과 자본을 투자해 완성했던 외곽도시의 일부.
수십 년 전 존재했던 도시확장개발계획에 따라 음지의 거물들 역시 미개발지구에 강행했던 투자의 흔적이다.
레녹과 3사장 아윤은 바로 그렇게 완성된 미개발지구의 거리 한쪽 구역에서 시연을 벌이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휘이잉!!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널찍한 4차선 도로로 나서자, 맞은 편에서 레녹을 기다리는 청년의 모습이 보인다.
흑발과 백발이 섞여 있는 독특한 외견. 어딘가 느긋해 보이는 행동거지.
하지만 레녹을 바라보는 청년, 아윤의 표정은 그리 썩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침묵하는 레녹 대신, 아윤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가 바로 그 유명한 견뢰로군. 취임한 뒤에도 아무런 활동에 나서지 않는 사외이사가 있다는 소문은 나도 들어 알고 있지.”
주위에는 어떤 카메라도 보이지 않지만, 틀림없이 지금 이 장면은 카르텔의 본사를 비롯한 전 직원들에게 송출되고 있다.
아윤은 그것을 알고 최대한 새로운 사장에게 어울리는 모습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 시연에 선뜻 손을 빌려주어서 고맙네. 나도 이런저런 일이 바빠 괜찮은 상대를 찾기 힘들었는데, 회장님께서 신경을 써주신 모양이야.”
비록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이 어떤 말도 받아주지 않는 싸늘한 관중이라 할지라도.
“내 오늘 시연이 끝나고 나면 크게 사례하…….”
“말이 길군.”
“…….!!”
심드렁한 어조로 아윤의 말을 끊은 레녹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마치 카르텔의 본사에서 이곳을 내려다보는 시선과 눈을 마주치는 것처럼.
마안을 통해 그 모든 광경을 훤히 내다보던 올리비에라가, 자신과 눈을 맞춘 듯한 레녹의 반응에 감탄을 터트렸다.
[오호라.]“버질이 약속을 했으니, 당신이 지켜야 할 거다.”
지금 이 곳에서 보이지 않는 칠채보의 마안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며 레녹이 말했다.
“당신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아.”
미궁에서부터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마안에 대한 해결책.
블랙컨슈머 프로젝트를 잇는 새로운 프로젝트와 마드리치 오니온에 대한 내막까지.
그 모든 진실을 움켜쥐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물이 저 멀리서 레녹을 지켜보고 있다.
사장단에 얽힌 일이 아니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카르텔의 회장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면, 남은 일은 하나뿐이었다.
눈앞에서 불쾌한 표정으로 일그러진 아윤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레녹이 거침없이 마력을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