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16
약먹는 천재마법사 416화
바다의 진혼곡(1)
[한번 빚을 지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말이 있죠.]레녹이 벗어둔 코트 위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하품을 하던 다비가 중얼거렸다.
[알고 보니 돈이 아니라 유기체들의 사회생활과 관련된 말이었군요?]“……요즘 들어 묘하게 뼈아픈 말이 많은걸.”
셔츠 한 장만을 걸친 채 땀범벅이 된 레녹이 다비를 돌아보며 웃었다.
“인간에 대해 부쩍 관심이 많아지기라도 한 모양이야.”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한적한 공사판.
시멘트 가루가 풀풀 날리는 싸늘한 폐허 사이에서 레녹은 양 손을 들어올린 채 집중하고 있었다.
도시로 돌아온 만큼 미궁에서는 형편상 할 수 없었던 이런저런 수련이나 연구들을 다시 시작하고 있는 요즘.
꽤 오랜만에 방문한 카르텔의 미개발지구 언저리에서 레녹은 공간마법을 다듬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레녹이 다시 시선을 돌리고 콘크리트 더미에 마력을 집중하는 사이, 다비가 콧방귀를 뀌며 도리질을 쳤다.
[다른 유기체들에 대한 무지가 발목을 잡는 건 싫으니까요. 저는 마스터를 잘 챙겨주는 착한 정령이라구요.]“그래그래, 무척 고맙다.”
토라지듯 말하기는 했지만 다비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관심이나 칭찬받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기는 하지만, 사람 개개인에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정령이 이제와서 태도를 바꾸는 이유가 있다면 레녹 때문이겠지.
반대로 말하자면 다른 사람에게 큰 관심이 없는 다비가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레녹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말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레녹은 흔들리는 마력을 천천히 거두어들이고 숨을 골라냈다.
“…….”
시간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레녹이 생각했던 전제들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런 변화가 있다면 그 방향성 자체는 반드시 레녹이 통제할 수 있는 쪽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아직 이 세계의 결말이 어디로 치달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변수를 늘리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레녹 자신조차 그 근거를 알 수 없는 확신과 직관에 따라 대답을 원하고 있지만, 그 결말이 비극으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이해하고 있다.
기약 없는 약속으로 세워진 허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 내리는 것도, 또 그런 거짓말로 다른 이들을 속이는 것도 못할 짓이다.
오래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었다. 레녹은 상념을 끝내고 눈앞에 놓인 문제로 신경을 되돌렸다.
“……결계술을 접목시켜도 공간전이 자체의 효율성을 개선하는 일은 요원하군.”
빠지지직!!
손짓에 따라서 눈앞의 공간이 종잇장이 구겨지듯 일그러지다, 이내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찢어진다.
그와 함께 레녹의 앞에 놓여 있던 묵직한 콘트리트 덩어리가 그 균열에 맞춰 조각조각 박살 나다, 공간 사이의 마찰을 이기지 못하고 불타 녹아내렸다.
치이익!!
시멘트가 녹아내리며 내뿜는 독한 내음이 코를 찌르지만, 레녹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공간전이 술식의 발동 자체에 막대한 마력이 소모되는건 물론이고, 면적이 늘어날수록 기름에 불을 붓는 격이야.”
[한참 전에 결론이 나온 이야기잖아요.]다비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대답했다.
[공간계열 내부에서 새로운 영역을 정의하고 그 안에서 조정을 거치는 거라면 모를까, 지금 이상의 효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84일 5시간 48분 전에 쓰여진 연구일지에 기록이 남아 있네요.]“……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어. 오늘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다시 찾아온 거니까.”
레녹 자신이 연구해서 기록한 마법에 대한 성취들을 간략하게나마 일지로 남겨 다비의 데이터베이스 내부에 보관하고 있다.
마법의 이론을 토론하는 시점에서 다비가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누군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것을 올바르게 인지한 뒤로 레녹은 다비에게도 자신이 이해한 깨달음을 어느 정도 전달해두고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해둔 뒤였다.
당장 별다른 효과는 크지 않더라도 혹시 누가 알겠는가.
레녹의 이론을 모두 이해한 다비 역시 어엿한 한명의 마법사로 거듭나게 될지.
생각만 해도 실소가 나오는 상상이었지만, 큰 시간이나 노력이 필요한 일도 아닌 만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진정으로 노력과 시간을 빠듯하게 쪼개가며 투자해야하는 것은, 지금부터 시도할 새로운 공간마법의 연구에 있었으니까.
“시작해 볼까.”
우웅!!
왼쪽 눈을 매만지는 것과 동시에 자색의 마안이 떠올라 은은한 보랏빛의 안광을 흩뿌리기 시작한다.
마안을 빼곡하게 덮고 있던 균열은 여전하지만, 더 이상 시력이 떨어지는 일은 없다.
새로운 마안을 개안한 것과 동시에 출력이 분산되면서, 몸에 해가 되지 않는 수준까지 조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후우…….”
낮게 숨을 몰아쉰 레녹이 망설이지 않고 품 안에서 거대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촤르르륵!!
파피루스 아르겐테우스.
진둔의 항하사미궁에서 습득한 술식병장 중 하나로, 원래는 사전준비가 필요한 복잡한 결계진이나 술식을 미리 기록해두고 사용하기 위한 물건.
단순히 마력 저장고로도 사용 가능한 만큼, 활용법이 많은 물건임은 틀림없지만, 레녹은 이 술식병장을 손에 넣었을 때부터 단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력소모가 크고 사전영창이 필요하며 계산을 요구하는 복잡한 공간도약마법, [점멸(點滅)].
바로 이 마법이야말로 파피루스에 기억해 두고 소모품처럼 사용하기 적합한 마법이 아닌가.
그것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점멸 술식을 파피루스에 기록하지 못했던 것은, 두 술식과 유물의 충돌로 기능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파피루스 아르겐테우스는 술식이나 결계진을 극한까지 압축시켜 페이지의 면 사이에 기록시키는 유물이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공간과 술식의 정보에 간섭하는 것은 당연한 일.
똑같이 공간 계열을 직접 건드리는 레녹의 점멸 술식은, 그런 파피루스의 기본적인 작동원리와 충돌해서 그 안에 기록해두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공간 간섭은 지극히 정교하고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작업이고, 이미 완성된 두 계통의 유물과 술식이 충돌하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레녹이 점멸술식을 마력 소모 걱정 없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임은 틀림없었다.
마력량을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부풀리거나, 공간계통 술식의 마력소모량을 획기적으로 줄여내는 것보다는 훨씬 할만한 작업.
그리고 지금까지 레녹이 손에 넣은 새로운 능력을 잘만 조합한다면,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위이잉……!!
파피루스의 페이지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대고, 손가락으로 자그마한 원을 그린다.
손가락에 끼워진 또 다른 술식병장 [파이겐바움의 눈]이 허수차원을 비춰 억지로 파피루스 위에 다른 공간을 열어젖힌다.
끼기기긱…….!!
허수차원을 관측하는 파이겐바움의 눈동자를 과부하시켜 직접 허수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0.75초.
인간의 반응속도로는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레녹이 오른쪽 눈을 매만지는 것과 동시에 허수차원이 열린 상태로 파피루스가 고정되기 시작한다.
레녹의 오른쪽 마안은 올리비에라가 지닌 칠채보의 마안을 모방해 개안해낸 이능.
인과의 결과를 관측해 고정하는 그녀의 마안에 아직 비할 바는 아니지만, 술식적으로 진행 중인 상황을 고정해 유지시키는 정도는 가능하다.
우우우우웅!!
널찍한 두루마리의 페이지 위에 허수차원으로 향하는 통로를 열고, 마안의 힘으로 억지로 고정시킨 상황.
레녹은 여기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미리 준비해둔 점멸 술식의 술법진을 천천히 불어넣기 시작했다.
찌지지직……!!
진둔의 결계술로 미리 도식화해둔 점멸 마법의 결계진을 부여하기 시작하자, 격렬한 반발로 마치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서로 다른 공간계통 사이의 반발. 그것을 허수차원의 이면에서 편법을 사용해 욱여넣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
“후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데도 가벼운 셔츠를 걸친 레녹의 이마에선 쉴새없이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팔을 타고 허수차원의 잿빛 광채가 역으로 번지면서, 손가락 끝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지만, 반대로 파피루스의 지면 위로 천천히 점멸의 술법진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쩌저적!
마치 오랜 시간동안 굳게 닫혀 있던 암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
그것은 레녹이 지닌 모든 역량과 방법을 극한까지 정교하게 갈아서 쌓아올린 아슬아슬한 균형과도 같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그려지듯 두루마리 위로 점멸의 술법진이 온전히 각인된 그 순간.
두루마리에서 터져 나온 강렬한 충격파가 그대로 레녹의 몸을 뒤로 튕겨내버렸다.
파앙!!
한창 공사중이던 외진 고층 빌딩의 벽면 밖으로 그대로 떨어지는 레녹의 모습.
[마스터!!]당황한 다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총총거리며 같은 자리로 뛰어내리려 발을 굴렀지만.
파밧!!
다비의 머리 위에서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낸 레녹이 그대로 새끼여우의 목덜미를 잡고 수십 미터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어라?]레녹의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전뇌정령.
바람결에 펄럭이는 셔츠를 부여잡은 레녹이 지상을 등지고 떨어지는 그대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무래도 성공한 것 같으니까.”
[점멸(點滅)]허공에서 번뜩이듯 사라지는 레녹의 모습.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허공에서 두 번을 더 번뜩이며 순식간에 바람이 몰아치는 밤하늘을 주파한다.
마력사를 뻗어 근처의 건물을 붙잡고 활공. 그대로 한 번 더 점멸을 사용해 빌딩 안쪽으로 도약해 사무실을 내달렸다.
타다다닥!!
땀범벅이 되어 숨을 몰아쉬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팔을 휘적거리고 비틀거리며 앞으로 달리다, 그대로 다시 한번 점멸을 사용해서 허공으로 도약.
바람을 타고 그대로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낙하했다.
쐐애애액!!
귓가로 들려오는 날카로운 바람소리. 얼굴을 스치는 싸늘한 냉기.
폐가 터져라 공기를 들이 마쉬는 사이에도 레녹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연달아서 점멸을 사용했는데도, 레녹의 마력에는 한 줌의 변화도 없다.
이미 파피루스에 기록시켜둔 점멸 술식이 대신 소모되면서 레녹의 몸을 그대로 이동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사전에 기록해둔 거리와 속도에 따라서 도약해야만 하지만, 한시적으로 마력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
마침내 전투에서도 활용할 만한 기동력을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후우…… 죽는 줄 알았잖아요.]레녹의 어깨 위에 올라타 그를 바라보던 다비가 한숨을 내쉬며 셔츠 깃을 물고 대롱대롱 늘어졌다.
그런 다비를 끌어안고 숨이 터질 때까지 달리며 점멸, 또다시 도약한다.
파바바밧!!
몇차례 허공에서 몸을 번뜩이며 질주한 레녹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환희에 가까운 확신이 번져 있었다.
“하아, 하아……!! 준비는 끝났어.”
눈 앞에서 천천히 부유하며 레녹의 주위를 맴도는 파피루스를 말아쥐고 돌아선다.
한쪽 구둣발로 빌딩 외벽을 즈려밟고 선 레녹이 까마득한 지상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마드리치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 * *
거대도시 최외곽에 널브러진 미개발지구. 그중에서도 동남부 대륙 끝에 위치한 해안가.
아직 바다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대도 코끝을 감도는 짠내와 차가운 바닷바람이 레녹의 몸을 두들긴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몸을 움츠린 레녹이 숨기고 있던 기척을 감추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려던 그 순간.
“반 님, 이쪽입니다.”
두꺼운 바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조용하게 레녹의 이름을 불렀다.
레녹 역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위 위쪽에 등을 기댄 채 장비들을 점검하고 있는 남자가, 레녹을 확인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레녹은 그런 남자의 곁에 다가서면서 조용하게 물었다.
“에이전트?”
“현장대응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스트루먼입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외부고문과 같이 일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머리를 짧게 친 강인한 인상. 절도 있는 자세와 태도가 인상적이다.
“해군 출신이라 들었는데.”
“전역한 지는 5년이 넘었습니다. 사실 이제 군인이라 불리기는 어려운 연차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스트루먼이 등을 돌리고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시죠. 반 님이 오시기 전에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사전에 그쪽에게 전해준 정보는 이쪽 해안가, 그것도 대략적인 위치 뿐이었을 텐데. 벌써 뭔가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 건가?”
가벼운 인사 한두 마디를 나누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스트루먼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만.
그 과감한 움직임에 확신이 깃들어 있지 않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터.
아니나 다를까, 앞서 걷던 스트루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사실 이번 임무를 수락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제게는 큰 의미 없는 승진시험을 제쳐두더라도, 이 해역에 대한 기억은 그리 좋게 남아 있지 못하니까요.”
“…….”
“하지만 반 님께서 이 해역에 자리 잡은 것이 예의 군령술사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제게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해안가로 왔음에도 스트루먼의 발걸음은 바다로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짭조름한 모래사장의 외곽에 만들어진 간소한 풀밭으로 향했을 뿐.
그 풀밭 위에 빼곡하게 세워진 수백 개의 길쭉한 묘비들의 모습.
바닷바람에 닳아 없어진 묘비의 곳곳에는 사망자의 이름과 군에서 사용할법한 직위가 적혀 있었다.
그제서야 이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를 깨달은 레녹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해군 전사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묘지군.”
“군령술사가 이 해역에 자리를 잡았다면, 놈이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겠죠.”
수백 개의 묘비를 앞에 둔 스트루먼이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편히 쉬어야 할 제 친구들이 그런 식으로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더군요.”
“…….”
지금은 사라진 시정부 직속 해군전력이 해산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레녹이 상대했던 방위군 중장 트레펜이 그랬던 것처럼, 규모와 힘을 잃고 약해져 가다 끝내는 사냥이 끝난 개처럼 버려지는 현실.
그 일이 해군을 상대로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품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문 레녹이 스트루먼을 돌아보며 말했다.
“협조해 줘서 고맙군. 에이전트 측에 따로 연락해서 보상하지.”
“……정말 혼자 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레녹의 말에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스트루먼이 말했다.
“마르시아 팀장님께서는, 현장이 지나치게 위험해 보이면 반 님을 만류하는 것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우리 방금 만난 사이 아닌가?”
레녹이 픽 웃었다.
“그렇죠. 사실 저는 해군에 몸담을 시절에도 동료들에게 이런 말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스트루먼도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마르시아 팀장님이 많이 슬퍼하실 겁니다.”
“…….”
레녹이 입을 다물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연초를 문 채로 말없이 까닥이던 레녹이, 스트루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대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노력해 보지.”
“……묘지 중앙 6시 방향으로 내려가면 지하로 향하는 납골당이 있을 겁니다. 해산된 해군 지휘부에서 선호하던 방식이죠.”
스트루먼은 그렇게 말한 뒤 한 발 뒤로 물러서 고개를 숙였다.
“건투를 빌겠습니다.”
할 말이 더 남아 있음에도 말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다.
아마 방위군에서도 틀림없이 뛰어난 군인이었겠지.
그저 이런 남자조차 오래 버티지 못할 만큼, 당시 방위군의 상황이 형편 없었다는 반증이리라.
트레펜 중장의 몰락, 그리고 시정부에서 새로이 내세운 공군의 존재를 생각하면 그 내막을 추측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레녹은 그런 감상들을 깔끔하게 뒤로하고 묘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후우…….”
상대가 준비해둔 아가리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
결국 감춰진 비밀을 들춰내야 하는 것은 레녹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레녹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상대 역시 지금까지의 태도를 고수한 채 끝나지 않는 결말을 기다릴 뿐.
그 모든 실수가 한줌의 후회로 남아 흘러내리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후회는 없다. 항상 같잖은 핑계와 시답잖은 이유로 스스로를 납득시켜왔지만, 모든 순간에 의미를 남기고 싶다는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리라.
할 수 있는 준비는 전부 끝냈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레녹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였다.
덜컥!!
묘지 중앙에 놓인 거대한 주춧돌의 아래 방향.
그 사이 놓인 균열에 마력을 뻗자 자연스럽게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레녹은 어느새 사라진 스트루먼의 빈자리를 확인한 뒤, 곧바로 계단 아래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코트를 입은 마법사의 모습이 땅 아래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달이 조금 기울어 각도를 바꾼다.
직후 수백 개에 달하던 묘비들의 모습이 유령처럼 그대로 자취를 감추고, 한적한 풀밭만이 남겨졌다.
사아아아…….
불어오는 저녁바람이 부드럽게 풀밭을 스치고 사라질 뿐이었다.
* * *
차가운 돌계단을 밟고 끝을 알 수 없는 지하 공간으로 내려간다.
레녹은 계단을 통해 지하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사이, 감각권을 통해 느껴지는 스스로의 위치가 급격하게 바뀌는 것을 인지하고 속도를 늦췄다.
‘공간왜곡…… 8레벨에 인접한 술사들은 숨쉬듯이 사용해대는군. 입구만을 해역에 놓고 내부 위치를 바꾸는 방식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력으로 확인하는 레녹 본인의 좌표가 휙휙 건너뛰면서 빠르게 해역 밖으로 멀어져 간다.
‘평범한 군령술사는 결코 아니야. 그렇다면 도대체……?’
군령도시 요르타 출신의 술사가 어떻게 거대도시의 의사결정에 이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
지금 레녹이 지나오고 있는 이 거대한 묘지와 납골당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 모든 이유와 의미를 확인해 볼 수도 있는 기회임은 틀림없다.
마음을 굳힌 레녹의 걸음걸이가 한층 더 빠르게 변하고, 끝없는 지하로 이어지던 계단의 끝에 나타난 돌문 앞에서 멈춰 섰다.
“젊군.”
타악!!
어느샌가 돌문 앞에 나타난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레녹을 보며 조용히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리고 혈기가 넘쳐. 최근 수십 년간은 마주하기 어려웠던 갈망이야.”
“그 얼굴은…….”
눈앞에 서 있는 것이 그리모어 갱단의 레이스 시작 직전에 참가자들에게 안내사항을 고지하던 바로 그 노인임을 간파한 레녹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레녹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말했다.
“제안을 거절하고 나의 안식처를 직접 찾아내려 할 줄이야. 그 패기도 기특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광오한 발상을 유의미한 결실로 만들어낸 그 능력 자체겠지.”
레녹을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에는, 어느새 숨길 수 없는 희미한 감탄이 엿보이고 있었다.
“초대없이 방문하는 손님을 허락할 정도로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지만, 나를 매료시키고 싶었다면 훌륭한 판단이구나. 고작 단 한번의 만남으로 이 해역을 찾아내 납골당의 입구까지 내려올 줄이야.”
“…….”
“좋다. 문제를 내지 않았음에도 해답을 찾아온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어야겠지.”
노인이 등을 휙 돌리는 것과 동시에, 납골당의 돌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레녹을 힐끗 돌아본 노인이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오거라. 나 역시 네가 원하는 대답을 준비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