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93
약먹는 천재마법사 493화
불멸과 필멸 사이(1)
쿠웅……!!
한발 앞으로 내딛는 것과 동시에 압도적인 기세를 내뿜는 융합체의 모습.
“믿을 수가 없군요……!”
서슬 퍼런 기색으로 걸어오던 트리탄조차 충격받은 것처럼 멈춰 섰다.
“합체한 겁니까? 두 사람 각자의 육신을 버리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변이와 동조를 조합해 도달한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이지.”
피오와 지오, 두 사람이 융합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 담담하게 말했다.
“술자 자신의 몸이 아닌 무언가를 융합시키기도 어렵지만, 안정화시키는 건 훨씬 더 어렵거든.”
육신의 융합은 피오의 변이술식으로 해결하고, 두 사람의 심상과 마력은 지오의 동조술식으로 합일한다.
한 사람의 초인으로서 완성된 두 성위능력자가, 스스로의 존재를 일시적으로 포기하면서까지 선택하는 강력하기 그지없는 서약.
“저런 식으로도 위계를 초월해 8레벨에 도달할 수도 있는 건가……. 굉장히 획기적인 발상이군.”
레녹 역시 제단 밖에서 그 모습을 눈도 떼지 못하고 지켜본다.
쌍둥이 두 사람이 각자 다른 계통의 술식을 완성시킨 성위급 능력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해봤으나.
육체와 심상 양면에서 각기 다른 두 사람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이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일란성 쌍둥이임은 물론이고, 각자 다른 계통의 술식을 위계를 완성시킬 정도까지 쌓아 올렸기에 가능한 일.
그와 동시에 쌍둥이 둘 모두가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는 그 위험천만한 각오를 마쳐야 한다는 실로 위험하기 그지없는 기아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들이 위계를 초월하는 ‘경계선’을 넘어섰다는 것은 틀림없다.
개개인으로 적합한 자격과 힘을 갖추고 위계를 초월한 것이 아니다.
위계를 초월한 경지에 하나로서 도달했기에 그들에게는 적합한 자격과 힘이 부여되는 것일 뿐.
그렇게 완성된 피오와 지오의 초융합체는…….
“시작할까.”
끼이이익……!!
치이이익……!!
8레벨의 변이술식과 동조술식을 동시에 발현하는 괴물이 된다.
사방에서 몸에 꽂혀 들어가는 수십 갈래 창극을 모조리 받아들인다.
푹, 푹, 푹!!
창검과 도끼 같은 온갖 날붙이들에 베이고 꿰뚫린 채로 고개를 푹 숙인 융합체가 양손으로 자신을 꿰뚫은 기사들의 창날을 움켜쥐고.
동시에 융합체의 온몸이 수백 갈래 창날로 변해 부풀려 터져 나온다.
카가가가가가각!!!
사방에서 달려들던 무수한 교정기사들의 갑주 위를 무참히 두들기는 창날의 파도.
전혀 예상치 못한 터프하기 그지없는 반격에 사방에서 경악 섞인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창검의 파도 사이로 걸어 나온 융합체의 팔이 기관포대로 변하는 것과 동시에 불을 내뿜었다.
변이계통 고유술식
대군적술 발체
[비귀천병백마행(比鬼千兵百魔幸)]콰아아앙!!
두 눈을 멀어버리게 할 법한 섬광과 화려한 불기둥이 제단 앞의 공동을 타고 솟아오른다.
폭염이 들끊는 아지랑이 사이로 거대한 사자의 머리통이 튀어나와 닥치는 대로 갑주와 살점을 씹어삼킨다.
쿠과과과과과!!!
“패턴이나 궤적이 없다, 정면에서 막을 수가 없어……!!”
“예측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이건 사실상……!!!”
“흐아아악!!”
온갖 기이한 마물과 병기의 형태로 변해 사방을 휩쓸고 무차별적으로 신도들을 짓밟는 융합체의 돌진.
‘변이속도와 패턴 변주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군.’
제단 아래쪽에서 미친 듯이 갈려 나가는 교단의 사제들을 보며 레녹이 작게 감탄했다.
육신을 완전히 변형시키는 것도 아니고, 팔다리를 잠깐씩 바꿔 휘두르는 사이에 강력한 초인들이 장난감처럼 터져 나갔다.
하지만 진정으로 까다로운 것은 그 화력과 강도가 아니라, 스스로의 몸을 변이시키는 속도와 다양성 그 자체.
‘저런 식으로 육체를 주물러대면 부담이 엄청날 텐데, 그걸 지오의 동조술식으로 억누르고 있는 건가.’
눈을 한번 깜박이는 순간 창검의 파도가 덤프트럭으로 변해 처박히고, 앞선에 떨어진 유리조각이 점토폭탄으로 변한다.
발아래를 깨물고 독을 흘려 넣던 독사가 어느 순간 거대한 두꺼비로 변해 사람을 집어삼키고, 이내 거대한 식인식물로 화해 사람을 집어삼켰다.
팔다리 일부만을 병기와 생물로, 그것도 거의 동시에 여덟 가지가 넘는 변이체로 바꿔가며 초 단위로 전투 패턴을 갈아치우고 있다.
피오가 아무리 뛰어난 변이술사라 해도, 저 정도로 육체를 변형시키다보면 조직세포의 마찰과 과열로 몸 자체가 짓뭉개져 녹아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것을 지오의 동조술식으로 억누르고, 원형을 향해 회귀하는 경향성 자체를 육신 합일로 버텨내고 있는 것인가.
뱀의 머리로 변한 오른손으로 교정기사의 어깨를 베어 문 융합체가 시선을 휙 돌렸다.
“주교, 보고만 있을 테냐!!”
“그럴 리가……!!”
차가운 냉기를 내뿜는 낫을 든 주교 트리탄이 섬찟한 돌진과 함께 그 몸을 전력으로 부딪쳐 온다.
융합체 역시 한쪽 어깨를 거대한 철벽으로 변이시켜 트리탄의 낫을 받아냈다.
쩌어어엉!!!
등 뒤로는 빙결의 날개를 떨쳐 올린 채, 아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융합체를 밀어낸 트리탄이 이를 악물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좋습니다, 어디 갈 데까지 가보자구요……!!”
트리탄의 마력이 강해지는 것과 함께 아치형으로 휘어진 낫이 철벽 사이를 파고든다.
냉기의 소우주와 마력의 성질변화를 극한까지 운용 그대로 철벽과 그 너머의 융합체까지 절단 낸 그 순간.
카각!!
트리탄의 등 뒤에 떠오른 빙결 날개 중 한 짝이 마치 그 참격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잘려나갔다.
“……!!”
그것이 다른 이변이 아니라 눈앞에 서 있는 이 자의 힘이라는 것을 트리탄이 깨닫고 얼굴을 굳힌 그 순간.
“이미 늦었어.”
융합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너덜너덜해진 양손으로 신전의 구조물을 그대로 움켜쥔다.
동조계통 고유술식
전지평일신(全地平一伸)
[천류동공(遷流同公)]파지직!!
융합체의 마력을 타고 일대 지형의 구조물과 자신의 육신을 그대로 동조.
트리탄의 낫이 철벽을 꿰뚫고 양쪽으로 갈라내는 것과 동시에, 융합체가 동조시킨 신전 내부 구조물이 깔끔하게 양단되었다.
쩌저적……!!
거대한 균열이 구조물에서 그치지 않고 예배당 뒤쪽의 제단까지 퍼져 나간다.
제단의 지지대 몇 개가 순식간에 세로로 쪼개지며 균형을 잃고 크게 흔들리며 한쪽으로 주저앉고.
쿠구구구구궁!!
제단의 위에서 두 명의 사도가 혈전을 벌이는 정상까지 향하는 완만한 경사로가 만들어졌다.
융합체가 잠깐 날뛰면서 일대 지형지물의 충격을 모조리 동조시킨 것으로 만들어진 활로.
“맙소사,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고차원의 동조술식을 위대한 교단의 신전에……!!”
그 말도 안 되는 속도에 다른 대행자들까지 동요를 숨기지 못한다.
본디 동조술식이란 서로 다른 개념들을 대등한 상태나 조건으로 이어붙이는데 사용되는 지정술식의 하나.
개념 자체에 간섭하는 만큼 그 위력은 아주 강력하고 범용성도 엄청난 수준이지만, 동조술사 본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다는 심대한 단점을 지니고 있다.
같은 쌍둥이임에도 이번 작전에 피오가 참가하고 지오는 후방에 남아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
하지만 그런 단점조차 두 쌍둥이가 하나로 몸을 합일해 8레벨에 도달한 순간에는 잠시나마 초월할 수 있다.
변이술식으로 사방을 무차별적으로 휩쓸면서, 그렇게 만들어낸 충격을 동조술식으로 일대 공간에 동조.
그 힘을 온전히 자신의 시공에서 다루어내며 레녹에게 암리타에게 도달할 길을 만들어준다는 말도 안 되는 발상.
쌍둥이의 융합체는 그 작업을 오직 적진에 홀로 떨어진 이 고립무원의 상황속에서 해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쿠과과과과!!!
그 밖에도 사방에서 번쩍이며 터져 나오는 은빛과 화신의 광채.
하늘에서 물결치듯 부유하며 펄럭이는 수백 장의 부적들까지.
라이자와 래퍼드, 갑선이 피오와 지오보다 한발 늦게 도착해 전장에 난입을 시작했다.
팟!!
직후 레녹의 옆에 번뜩이며 내려앉은 한줄기 묵색의 섬광.
두꺼운 로브를 펄럭이며 착지한 것은 구릿빛의 주술사, 그리샤였다.
자성영역 남만도해경을 전개한 채로 극동지부 신전 위에 통째로 때려 박은 장본인이, 가장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에반, 가자.”
땀을 줄줄 흘리며 레녹을 돌아본 그리샤가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 결착을 내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레녹을 포위한 대행자들 사이에 스스로 몸을 던진 것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대행자들의 가장 앞에 서 있던 뚱뚱한 주교, 보더 역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밀종주법……. 역시 회행(回行)의 주술사, 당신이었습니까?”
“…….”
“제정신이 아니군요. 아무리 상황이 다급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이면서 개입하다니……. 이 마법사가 당신들에게 있어 그 정도로 중요한 인간이란 말인가요?”
“준비는 모두 끝났다.”
떨리는 손으로 장초를 문 그리샤가 대답했다.
“에반이 생각보다 훨씬 시간을 벌어줘서 말이지. 필요하다면 전쟁을 감수할 생각으로 이 자리에 왔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허어?”
“이해의 바다 전역을 자치령의 해군으로 포위하고 봉쇄했다. 지금부터 3시간 동안은 그 누구도 영해 안으로 진입할 수 없겠지.”
“…….”
그제서야 그리샤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한 보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교단의 증원은 물론이고, 제3자의 개입도 통하지 않아. 오늘 이 자리에서 10사도 암리타는 죽고, 극동지부는 무너진다.”
장초를 입에 문 그리샤의 입술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만큼 지금 그녀가 섬 전체를 거꾸로 뒤덮은 영역을 유지하는 것이 힘겹고도 어려운 일이라는 방증.
보더는 그런 그리샤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조용히 다른 대행자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 의미를 깨달은 대행자들이 연달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본격적인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구속주문 1단계 해제.”
“술식영해 지정. 음양지례 회순 준비.”
트리탄처럼 구속주문을 해제하고 힘을 끌어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교단의 영지로 지정된 땅의 힘 자체로 술식을 증폭시켜 강제로 컨디션을 끌어올린다.
두두두두두!!!
그들 사이엔 방금 전까지 두 사도들의 전투를 수습하고 있던 대행자들 역시 간간이 섞여 있다.
더 이상 암리타와 자이프 사이에 일어난 전투를 말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 두 괴물 간의 전투는, 이미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 있었던 것이다.
[끄으윽…….]으저적, 으적!!
알 수 없는 괴성을 흘리며 자이프의 육신을 씹어먹는, 거대한 털뭉치의 형상.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쉴 새 없이 같은 사도의 몸을 먹어치우며 점차 단순한 털뭉치 이상의 무언가로 형태를 바꿔간다.
외신을 불러내는 통로로 사용되며 부상을 입은 상태, 하물며 의식이 끝나 되찾았던 지성까지 잃어버린 암리타에게 선공을 때려 박고도 자이프는 그녀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두 사도 간의 위계와 경지, 육체능력의 차이가 그만큼 극단적이었다는 증거.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돌아가는 사도들 간의 우열이 처음부터 승부를 결정지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암리타의 손길에 따라 휘청이는 자이프의 눈은 이미 생명의 빛을 다한 지 오래였다.
“…….”
결국 마지막에 자이프가 확신했던 무언가가 정말로 존재하는 진실인지, 레녹은 대답해 줄수 없었다.
단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멈춰서지 않겠다는 것만 다짐할 수 있을 뿐.
마지막까지 스스로가 바라는 것이 진실이라 믿고 죽었는가. 레녹이 바라는 결말 역시 적어도 그와 비슷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렇다면 움직여야겠지.
화아아아악!!!
레녹이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일대 공기가 크게 달아오르며, 그리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렇게는 안 됩니다……!!”
양손으로 수인을 맺은 보더가 눈 부신 빛을 터트리는 것과 동시에 레녹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깐, 이건 도대체……!!”
순식간에 레녹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은 대행자들이 어떻게든 발을 잡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리에 비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실로 흐릿하게 번뜩이며 경사로 사이를 거닐었을 뿐.
“기척이 아예 느껴지지 않아!!”
“마력패턴을 관측할 수가 없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생명반응조차 이토록 희미하다니, 이미 인간이 아닌 건가……!!”
대행자들이 좀처럼 잡히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레녹을 추적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고, 다른 몇몇은 황급히 암리타의 곁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늦었다, 이 병신들아!!”
제단의 옆에서 터져 나온 은빛의 폭풍 사이로 라이자와 래퍼드가 나타나 대행자들을 걷어차 버렸다.
콰아앙!!
근육질의 개머리거인과 격투가가 삽시간에 대여섯 명의 대행자들을 지상에 처박아버리고, 피 튀기는 공방을 이어나간다.
동시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수백 장의 부적이 거대한 장벽이 되어 한순간 멀어진 레녹과 대행자들 사이를 가로막고
[천혜부동장벽(天惠不動障壁)]하늘 위에 펼쳐진 밀림의 숲이 그대로 떨어져 내리며 일대를 축축한 늪지대로 흠뻑 뒤덮었다.
“이……!!”
마지막 순간에 제대로 발이 묶이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은 보더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지고, 그리샤가 힘겹게 웃었다.
“쓸데없이 방해하지 말고 우리끼리 놀아보자고.”
* * *
마력감지를 극한까지 끌어올리자, 그리샤의 남만도해경과 극동지부 섬 사방의 모든 것이 감각에 닿는다.
은빛의 건틀렛을 장착한 라이자와 격돌하는 교정기사대장 거빈의 모습.
거대한 신전기둥을 휘두르는 개머리거인 래퍼드와, 장대한 크기의 할버드를 휘두르는 대행자의 대극.
제단의 계단 한쪽에서 그리샤와 보더가 눈부신 광채를 터트리고, 하늘 위에서는 갑선과 안대를 쓴 주교가 제공권을 제압하기 위해 술식을 난사한다.
그 모든 전투와 동선이 섬 중앙에 위치한 신전과 그 심처의 제단을 향하고 있다.
누군가는 레녹을 막기 위해, 누군가는 레녹을 보내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앞의 상대와 칼날을 맞대고 살의를 교환하는 전투의 연속.
하지만 레녹은 그 모든 혼란을 올바르게 인식하면서도 제단의 끝으로 향하는 경사로에 발을 내디뎠다.
‘멀지 않아.’
방금 대행자들 대부분이 레녹의 기척과 반응을 놓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외신의 의식에 참가해 그들의 숨결을 정면에서 직면한 그 순간부터, 레녹 자신의 마력이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레녹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생명반응과 마력패턴의 일시적인 소실과 변동.
이것이 의도치 않은 기연인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파멸로 향하는 길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외해의 종말과 아주 가깝게 접촉한 부작용으로, 레녹 자신의 직관이 흘러넘치는 것이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할 뿐.
‘멀지 않다…….’
파지직……!!
흘러넘친다.
자신을 구성하는 개성과 가치관, 사고방식과 존재의의.
마력과 기세, 체력과 영성, 정신과 의식 모두가 걷잡을 수 없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며 더 강력한 무언가를 바라고 끌어당기려 한다.
틀림없이 이 자리에 존재하면서도, 또 한없이 그와는 멀어져가는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인간이 아닌 무언가에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
휘오오……!!
바람이 불어닥치는 제단의 첨탑 위. 죽은 듯이 쓰러진 이젤과 자이프를 먹어치우고 피투성이로 잠든 암리타의 모습.
저항은 없다. 같은 사도와의 혈전으로 지친 채 축 늘어진 10사도의 거체만이 이 공간에서 숨 쉬고 있을 뿐.
다른 주시자들이 어째서 레녹에게 암리타를 죽이는 일을 맡겼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증원요청을 위해 갑선에서 일회성으로 넘겨준 진둔의 제어코드.
그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해도, 그것이 대주교의 결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비책이라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 터.
갑선이나 다른 주시자들이 그로부터 레녹이 암리타를 죽일 수 있는 수단을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자이프가 스스로의 목숨을 버려가며 벌어준 시간, 지금도 그리샤를 비롯한 다른 주시자들이 레녹을 위해 벌어주고 있는 이 시간.
원래라면 당장이라도 암리타를 죽이기 위한 비책이나 술식을 생각해 행동에 옮겨야겠지.
하지만 레녹은 그런 암리타의 거체를 한 번에 터트리기 위한 강력한 마법을 짜내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리는 대신,
타앙!!
그대로 품 안에서 꺼내든 리볼버로 뒤에 쓰러진 이젤의 머리통을 쏴버렸다.
“……!!”
쓰러져 새하얀 도자기와 같은 형태로 굳어버린 이젤의 머리가 크게 휘청이고, 그 사이로 시뻘건 선혈이 배어나온다.
하지만 머리에 정면으로 총상을 허용한 이젤은 그대로 축 늘어지는 대신, 오히려 천천히 고개를 되돌리더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어라…….”
축 늘어진 채로 자리에서 일어선 이젤의 얼굴은, 마치 귀신이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길쭉하게 웃고 있었다.
“완벽하게 속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을까요?”
지금까지 이젤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와 같은 말투.
하지만 레녹은 그 사실에 놀라는 대신, 리볼버의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타아앙!!
이젤의 미간이 그대로 관통당하는 것과 동시에 한 번 더 피가 솟구쳤지만, 오히려 그녀의 도자기처럼 굳은 피부에 균열이 생겼을 뿐.
쩌저적!!
그녀의 피부가 갈라지면서 그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살색의 피부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허물을 벗고 탈피하듯 떨어져 나가는 굳은 피부 사이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사람의 모습.
놀랍게도 더 이상 그녀는 이젤의 얼굴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았다.
“후우우…….”
경쾌한 기색으로 머리를 휙 쓸어넘긴 그녀가 허리를 펴고 일어선다.
천천히 두 눈을 뜬 그녀의 눈동자에는 끝없는 어둠만이 가득할 뿐.
새카맣게 물들어버린 안구 사이로, 무수한 별빛의 흔적이 간간이 비춰지고 있다.
마치 밤하늘의 별빛을 담은 것같은 기형적인 눈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레녹을 응시한 그녀가 웃었다.
“고마워요, 에반. 그러지 않아도 껍질을 깨고 나오려니까 힘이 들더라구요. 날 배려해준 거라고 생각할게요.”
“배려라…….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마치 알을 깨고 다시 태어난 것처럼 개운하고 상쾌한 몸짓. 지금 이 혼란스러운 전장에서는 더없이 어울리지 않는 지독한 이질감.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레녹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이번 일을 결착 짓기 위한 마지막 분기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차갑게 웃은 레녹이 물었다.
“설마 사도라는 존재가……. 인간의 육신을 차지하고 깨어날 줄은 몰랐다. 처음부터 모두 계획된 일이었나?”
이젤의 몸에서 탈태하듯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른 존재가 아니다.
대주교가 계시의 의식을 진행하는 사이 잠깐 정신을 차리고 대화를 나누었던 사도의 목소리.
바로 그것과 똑같은 음색이 이젤의 육신을 통해 깨어난 저 존재에게서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10사도 암리타. 꼼짝없이 죽음을 앞두고 대주교에게 헌신하는 줄 알았더니,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군.”
“글쎄요, 신녀님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걸요.”
느긋하게 대꾸한 암리타가 제단의 한쪽 기둥에 몸을 기댄 채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나이드리 신녀님은 저를 통해서 외해와의 동화율을 높이고, 의지를 담을 그릇으로서 스스로를 제련코자 하신 모양이지만……. 그건 다시 말하자면 저와 본질적으로 굉장히 유사한 존재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죠.”
“…….”
“광증에 오래 버틸 수 없는 몸을 두고 기회를 찾아낸 건…….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신녀님께서 남겨주신 몸을 재활용하는 게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으며 중얼거리는 암리타의 말.
이젤이 암리타의 몸에 동화되며 완성된 그릇으로서의 육신이, 암리타의 본질과 비슷해지며 자연스럽게 정신까지 옮겨타게 되었다는 것일까.
“육체가 정신의 지배를 받는가, 정신이 육체의 지배를 받는가.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지만, 어느 쪽이든 마냥 오답은 아니라는 건 분명하지.”
천천히 걸어 그녀의 옆에 선 레녹이 말했다.
“사도에게 뻗치는 광증. 한낱 본능에 충실한 짐승으로 만들어버리는 광증이 단순히 정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면 어떨까.”
레녹은 교단의 사도와 마주치면서, 그들이 끝내 인간의 형상을 벗어나 괴물이 되는 모습을 몇 번이고 지켜봐 왔다.
광증이 골수까지 뻗친 그들이, 종국에는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까지도.
하지만 그 광증이 외신의 기억을 엿보았기 뿐만이 아니라, 괴물로 변해가는 육신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면 어떨까.
“완전히 짐승으로 변한 육신 안에서는 정신도 광증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아예 육신 자체를 갈아타면 된다고 생각한 거겠지.”
레녹은 그렇게 말하며 암리타를 돌아보았다.
“본질적으로 그쪽과 비슷해진 이젤 나이드리의 몸이라면, 널 괴롭히는 광증에서 벗어나 다시 이성을 되찾을 수 있던 것 아닌가?”
“우후후, 지금 이 상황을 그렇게까지 깊게 통찰할 수 있다니…….”
암리타가 나른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당신은 우리와 비슷한 존재였어……. 나이드리 신녀님은 그걸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거군요.”
“…….”
“본능에 가까운 직관, 아니면 위화감에 가까운 동질감일까요?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죠. 기적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 일도 있으니까.”
대답하지 않는 레녹을 두고 암리타가 양팔로 스스로의 어깨를 조심스레 껴안았다.
“가엾은 신녀님……. 불쌍하기도 해라…… 본의는 아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건 정말 유감이에요.”
“…….”
“하지만 당신의 유지는, 제가 이런 식으로라도 꼭 이어나가겠어요.”
“그렇군.”
레녹은 참지 못하고 조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본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환하게 웃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하염없이 흐르는 침묵.
암리타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지듯 솟아오른다.
“후후…… 내가 왜 마법사를 싫어하는 줄 알아요?”
레녹도 그 얼굴을 보며 가만히 웃었다.
“눈치가 빨라서?”
콰아아앙!!!
제단의 일각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