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501
약먹는 천재마법사 501화
중간결산(2)
레녹은 그 뒤로 하루 정도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떠나기 위한 채비를 마쳤다.
섬에 남겠다는 주시자들과 대화를 주고받은 뒤 섬 밖으로 향하는 보트에 선다.
갑선이 건네준 부적, 래퍼드의 십자가 같은 물건들을 양손에 잔뜩 거머쥔 레녹의 모습에 그리샤가 웃었다.
“너도 참 어지간하군. 아직 이번 작전에 대한 공과를 제대로 나누지도 못했는데, 거기에 큰 미련도 없는 거냐?”
그리샤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레녹에게 휙 던졌다.
툭!!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놓친 레녹이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주워들었다.
“곱게 좀 건네주면 어디가 덧나나?”
“어라? 전에도 이런 일이 한 번 있던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린 그리샤가 이내 씩 웃으며 레녹의 손에 들린 물건을 가리켰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여기서 너보다 더 활약한 주시자도 없는 마당에.”
“……그래서 이건?”
“섬의 모든 시설에 자유롭게 출입가능한 열쇠다.”
그리샤가 말했다.
“새롭게 건조될 세 번째 등대는 물론이고, 유물이나 영약이 보관된 금고와 자재창고, 설비들이 있는 격납고까지 전부 열리지.”
그녀가 씩 웃으며 레녹의 손에 들려 있는 물건, 희미한 푸른 빛으로 빛나는 열쇠를 응시했다.
“그 열쇠로 열 수 있는 모든 물건들, 자유롭게 가져다 사용해도 좋아.”
“…….”
교단 극동지부의 이름으로 쌓여 있던 모든 자산들을 사실상 레녹의 소유로 넘긴다는 말인가.
일단 청의 눈이 관리하며 공동으로 사용하겠지만, 물자를 꺼내 사용하는 것 자체는 언제든지 불문에 부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사실상 이 섬에 존재하는 자산 자체를 레녹의 명의로 돌려놓겠다는 선언.
그제서야 그리샤가 무슨 뜻으로 이런 열쇠를 건네주는지 이해한 레녹이 피식 웃었다.
“당장 공적을 나눌 수 없는 상황이니 아예 통째로 주겠다 이건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청의 눈 초기부터 레녹과 일해온 그리샤는 에반이라는 마법사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필요한 물건이라면 거리낌 없이 취해도,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이런 열쇠를 건네줄 수 있는 것이겠지.
극동지부 전체의 자산을 레녹에게 허락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 대한 신뢰나 다름없다.
“열쇠에 마력을 주입하면 실시간으로 섬의 위치가 떠오를 거야.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알아서 가져가라고.”
“실시간으로 섬의 위치가 떠오른다고? 이런 아티팩트가 금고에 있었던가?”
“내가 어제 만들었다.”
“…….”
하품을 하며 대꾸하는 것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아티팩트다.
해역을 떠다니는 섬의 위치를 절대좌표로 관측해 수치화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술사 본인의 뛰어난 직관과 요령 없이는 불가능한 일.
하물며 그런 아티팩트를 고작 하룻밤 사이에 제작해서 레녹에게 건네준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리샤 본인이 오랫동안 살아온 만큼 주구 제작 경험이 많고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실력을 이런 식으로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레녹으로서는 살짝 의외였다.
“뭐……. 좋다. 교단의 무구들 중에서 쓸만한 장비들도 꽤 있었으니까. 필요할 때 종종 들리도록 하지.”
극동지부는 교단의 후방보급을 담당하던 곳 중 하나인 만큼 보관하고 있던 물자나 무구의 양도 상당하다.
개중에서는 교단의 신도로서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금기병장 역시 존재하는 바.
아라샤크 탐사단의 이리나 페스필드가 사용하던 핏줄 솟은 대검 역시 그러한 종류의 무구가 아니었나.
레녹 본인은 날붙이나 장병기를 사용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알고 지내는 용병 중에서 그런 무구를 사용할 수 있는 인재가 있었다.
“슬슬 가보지.”
“그래. 이번에는 좀 여러모로 불상사가 많았지만, 다음번엔 좀 더 좋은 일로 보자고.”
“그건 좀 재미있는 말이군.”
레녹이 웃었다.
“우리가 언제 즐겁고 행복한 일로 같이 모인 적이 있었던가?”
그리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쓰게 웃었다.
장초를 뻐끔거리는 주술사를 뒤로하고, 레녹이 곧장 작은 보트 위에 몸을 실었다.
보트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피오가 능숙하게 모터를 당기고, 레녹의 몸이 뒤로 홱 쏠렸다.
쿵!!
빠르게 물살을 헤치고 섬에서 멀어지는 보트 안에서 레녹이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천천히 좀 가지.”
“크헤헷, 최고 속도로 데려다드리겠습니다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킬킬 웃어대는 피오와 지오.
격렬한 전투의 여파로 온몸에 칭칭 붕대를 감고 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텐션이 높다.
레녹은 서로 자신이 보트를 몰 거라고 투닥거리는 쌍둥이를 보다가 물었다.
“몸은 좀 괜찮나?”
다른 주시자들 역시 적지 않은 고생을 하긴 했지만, 이번 전투에서 레녹 다음으로 무리한 것은 이 쌍둥이다.
구속주문을 해제한 주교 여럿을 상대한 것은 물론이고, 레녹을 대신해서 수백 명의 사제들을 상대로 집단전을 치르지 않았던가.
심신을 융합해 8레벨에 다다랐다고 해도, 신전 심처에서 버텨낸 전투가 보통 격렬한 소모전은 아니었을 터.
피오와 지오가 살짝 의외라는 표정으로 레녹을 돌아보았다.
“네가 그런 걱정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감동적이군.”
“그러게 말이야. 너 처음 나한테 말할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기계라고…….”
“미친 새끼야, 조용히 해!!”
기겁하며 지오의 입을 틀어막는 피오의 모습.
레녹은 지겹게 들어왔던 그 헛소문에 대꾸하는 대신 되려 다른 것을 물었다.
“부상도 부상이지만, 융합이 끝난 다음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다.”
“융합?”
“서로의 심신 양면에서 합일을 이루는 것에 아무런 대가도 없을 리가 없지. 틀림없이 상당한 후유증이 있을 법한데.”
“…….”
레녹 역시 그들에게 융합술식의 원리를 대충 배우게 된 만큼 짐작할 수 있다.
한날한시에 같이 태어난 쌍둥이.
각자 변이와 동조 계통의 술식을 익혀, 서로의 이질감을 보완해 줄 수 있다는 완벽한 조건.
하지만 그럼에도 각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 두 사람이 하나의 존재로 융합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일 리가 없다.
합일을 통해서 두 사람이 본디 보유한 것보다 더 높은 위계의 존재로서 일시적으로 화할 수 있다면, 그만한 대가를 감수해야 하는 것 역시 분명하겠지.
그제서야 레녹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쌍둥이가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아예 문제가 없는 건 아니긴 하지.”
“가끔 서로의 기억이 섞이거나, 융합이 끝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경지가 추락하는 일도 있어.”
“맞아, 그래서 언제 한번은 이 새끼가 지 애인이랑…….”
“X같은 새끼야, 그런 거 떠벌리지 말라고!!”
언제 또 심각했냐는 듯 이번에는 서로의 아굴창에 주먹질을 날리기 시작한 쌍둥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보트 속에서 속이 울렁거리는 레녹의 안색만 보랏빛으로 물들 뿐이다.
[하아……. 한심한 유기체들이란.]품 안에서 구경하던 다비가 한숨을 내쉬며 모터를 해킹, 보트가 다시 균형을 잡고 물살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해안가에 도달할 때쯤 주먹질을 멈춘 쌍둥이가 보트에서 내려 각자 필요한 물건을 정리했다.
“그, 어쨌든 이번 일에서는 신세를 졌어.”
피멍이 들어 부르튼 얼굴로 레녹에게 손을 내미는 피오.
그 꼴이 교단과의 전투 때문이 아니라, 방금 막 만들어진 것이 기가 찰 뿐이지만 피오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난 말이지, 솔직하게 세계의 멸망이니 뭐니 하는 사명에는 큰 관심이 없거든.”
“…….”
“오늘 즐기면 내일 좀 힘들어도 괜찮지. 내일에는 내일의 해가 떠오르는 거 아니겠어?”
피오가 말했다.
“마찬가지야.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살았으면, 언젠가는 끝이 온다는 걸 납득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거든.”
세계의 결말에 대해서 큰 감상이나 반감 자체가 없는 타입인가. 고위계의 초인인 것 치고는 흔치 않은 사고방식이다.
자신의 처지에 크게 개의치 않는 그 가치관 때문에, 모습에 얽매이지 않는 변이술을 그렇게 높은 경지까지 익힐 수 있던 것 아닐까.
레녹이 가만히 그의 말을 듣다가 물었다.
“그런데도 청의 눈에 입단한 이유가 뭐지?”
“지오에게 가족이 있어.”
피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내 동생은 다르지. 아이 둘 모두 열 살도 되지 못해.”
“…….”
“세계의 끝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면 여기뿐이지 않겠어?”
피오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지만, 보트를 정리하고 성큼 다가온 지오가 그대로 그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빠악!!
“끄엑!!”
“개 같은 소리하지 마. 누가 네 동생이냐?”
투덜거리며 레녹을 돌아본 지오가 피오의 엉덩이를 걷어차 보트 쪽으로 쫓아내며 말했다.
“저놈이 하는 말은 흘려들어라. 영 미덥지 못한 놈이니까.”
“이해한다.”
“나랑은 달리 불성실하고, 한량 같은 성질에, 저축도 제대로 못 하는 한심한 놈이지만…….”
지오가 코웃음을 쳤다.
“그게 결말을 받아들일 이유는 되지 못해. 나는 살아남을 거다. 내 동생도, 가족도 같이.”
“…….”
“그런 의미에서 청의 눈에 너 같은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는군……. 적어도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이 잘못됐다는 의미는 아닐 테니까.”
레녹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빚을 졌어. 다음번에는 꼭 이쪽에서 사례하지. 내 동생과 같이.”
잠깐의 침묵.
하지만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머리를 싸매고 있던 피오가 지오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진짜……. 내가 너보다 몇 분 먼저 나온 거 모르냐, 임마!!”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우리가 자란 문파에서는 나중에 나온 놈이 먼저 태어난 거다……!!”
“…….”
모래사장을 뒹굴며 싸워대는 두 쌍둥이의 모습은 방금 전까지의 진지한 각오와 그리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이해했다.
어딘가에 소속되는 일 없이 떠돌던 실력자들조차, 이제는 하나의 방향성을 선택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피스 말로는 성위급 주시자들을 상대로 하는 동서부 통합 소집이 한 번 더 있을 거라더라. 그때 보자고!!”
“야, 그거 아직 확정된 사항 아니니까 미리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레녹은 그 뒤로 얼굴이 부어터진 두 얼간이와 적당히 인사를 나눈 뒤 발길을 돌렸다.
주시자들과 하루 남짓 같이 어울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아마 저들과 함께 세 번째 등대를 건조하는 일에 협력하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 되었겠지.
하지만 무언가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시간이 촉박해 지금이 아니라면 해결할 수 없는 일에 손이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광대와 프레이야의 언급으로 알게 되었던 복마전의 중간결산.
‘원래 이 시기에 참가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번 일을 통해 본의 아니게 교단 내부의 귀중한 정보들을 몇가지 손에 넣었다.
그중 몇 가지는 오래지 않아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기밀들.
교단의 상황이 바뀐 만큼 다른 조직들의 동향을 미리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레녹은 그 정보들을 썩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시점에 중간결산에 참가해 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휴대폰을 들고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이레아. 나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변조된 목소리.
전화기 너머로 긴장된 수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전에 말했던 판데모니엄의 중간결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대답 없는 침묵을 무시하고 레녹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참가할 생각이니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말해. 지금부터 그곳으로 가겠다.”
[……발칸 위성도시 바이루츠. 정확한 시간은 하루 뒤 자정이야.]잠깐의 공백 직후 한결 차분해진 하이레아의 목소리.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담담해진 그 음색이, 실제로 통화기 너머의 상대가 인격을 바꿨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다만 정말로 참가할 생각이라면, 어느 정도 마찰은 감안해야 할 거야.]“무슨 뜻이지?”
[구세계의 유물을 수거하는 작전 상당수가 최근 들어서 크게 어그러졌거든.]“…….”
[교단과 주문연맹의 휴전으로 중앙전선의 판도가 크게 바뀌면서, 그 여파를 직격으로 맞은 작전들이 있어.]애초에 위성도시에서 소집을 가지는 것 자체가 구세계의 유물을 획득한 멤버들끼리 중간결산을 하기 위한 것.
기존의 작전에서 실패하거나 손해를 입은 이들이 있다면 심기가 불편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확인하고 싶어 할 거다?”
레녹이 웃었다.
[……편람의 우물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는지 알고 싶어 하겠지.]“좋아. 그 정도 들었으면 충분하군.”
전화를 끊으려는 기색을 보이자 하이레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상부는 멤버들 간의 충돌에 일절 간섭하지 않아.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뚝-
레녹은 그대로 통화를 끊어버리고 전화기를 품 안에 쑤셔 넣었다.
판데모니엄이 어떤 기조로 움직이는 조직인지 이제 와서 말해봤자 새삼스러울 뿐.
그 정도 리스크는 가면을 받아든 순간부터 상정하고 있었다.
흑요석 가면을 꺼내든 레녹이 그것을 얼굴에 가져다 대는 것과 동시에, 발밑의 그림자가 솟아올라 로브의 형태로 변했다.
“바이루츠라…….”
다비가 건네준 전자지도를 한번 확인한 레녹이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루 정도면 도착하겠군.”
바이크의 시동음이 들리고, 그림자가 한번 크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레녹의 모습은 해안가에서 그대로 사라진 뒤였다.
* * *
발칸의 위성도시, 바이루츠.
거대도시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인구와 자산, 규모와 물자를 감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확장개발계획의 산물.
당시 시정부는 발칸 근방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위성도시를 구성, 하나의 거대한 도시연합을 만들려 했으나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실패와 함께 물거품으로 변했다.
투자가 끊긴 위성도시들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버려졌고, 지금에 와서는 누구도 찾지 않는 유령도시가 되었을 뿐.
도시 밖을 방황하는 갱단, 스캐빈저, 강도와 테러리스트만이 간간이 위성도시를 아지트 삼아 생활하고 있지만.
막상 그들조차 바이루츠처럼 버려진 도시에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버려진 도시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는 장소라는 의미.
시민들을 유린하는 무법자들조차 이런 무법지대에서는 한낱 피식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꺼어억……!!”
어두운 밤하늘. 싸늘한 바람이 부는 유령도시.
본디 도시 곳곳에서 운행될 예정이었던 녹슨 부유열차의 철도 사이로 간간이 들려오는 신음소리.
갱단의 문양이 새겨진 옷을 피로 물들인 채 죽어가는 남자의 모습. 하반신이 통째로 사라진 채 허리 단면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다.
힐끗 이쪽을 돌아보는 레녹을 보며 입을 뻐끔거리는 갱단원.
망설임 없이 스쳐 지나가는 레녹의 모습에 남자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이내 그대로 초점을 잃는다.
“현명한 선택을 했군, 친구.”
그런 레녹의 옆에 어느새 나타나서 낄낄거리는 비쩍 마른 사내.
“요즘은 저렇게 겁 없이 나돌아다니는 멍청이들이 많지 않아서 고민이란 말이지. 저런 놈들을 반으로 잘라서 그 골수를 쪽쪽 뽑아먹으면 얼마나 달콤한 줄 아나?”
사내가 히죽거리며 서슴없이 레녹의 옆에 다가와 같이 걷기 시작했다.
“평생 동안 자기가 우월하다고 믿고 살아온 놈들이 특히 더 맛있지. 허리를 굽혀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연골이 아주 싱싱하거든…….”
“…….”
“모른 척을 잘한다는 거, 자기 주제를 잘 안다는 거. 그거 아주 대단한 미덕이야. 앞으로도 잘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게.”
그 말과 동시에 텅 비어 있던 거리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습.
사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허리 아래쪽이 잘려나가고도 살아 있을 수 있다면 말이지.”
전원이 마력사용자임은 물론이고, 어딘가 인간 같지 않은 스산하고 공허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단순한 살기나 분노보다는, 굶주림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은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울인가.”
제니에게 풍문으로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사령과 강령, 군령 계통의 술식을 배우거나 익혔던 초인이 가사상태에 빠졌다 원래대로 일어나지 못했을 경우.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된 채 끊임없이 산자의 영육을 탐하는 괴물이 된다고 했던가.
꽤 인상적으로 끔찍한 괴물의 이야기라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면 너머로 차갑게 변한 레녹이 말없이 주변을 쭉 훑었다.
“쓸데없이 말이 많은 걸 보니 생전에는 괜찮은 초인이었던 모양이군.”
“크흐흐, 거 젊은 친구가 말을 그리 험하게 해서야 쓰겠나.”
사내의 등 뒤에서 희끄무레한 영체가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해골 기사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다.
레녹을 둘러싼 다른 이들 역시 제각기 다른 영체를 뽑아내 텅 비어 있는 일대 거리를 좁혀 들어왔다.
“우리도 병신은 아니야. 자네가 상당한 술사라는 건 알고 있네.”
사내의 턱이 빠진 것처럼 아래로 툭 벌어지더니, 그 안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길쭉한 혀가 쭉 비집어 나왔다.
“그런데 말이야, 꼭 그렇게 고생을 해서 잡은 먹잇감이 더 특별한 별미더라구. 왜 그런지 알겠나?”
마치 레녹을 보고 입맛을 다시는 듯한 기괴하기 그지없는 몰골.
하지만 레녹은 오히려 그런 사내를 보고 피식 웃었다.
“시체보다 못한 괴물 주제에 노력의 의미를 아직 잊지 않은 모양이군.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인간 흉내를 내도 되겠어.”
그렇게 말한 레녹이 로브 안쪽에서 대천사의 연민을 움켜쥐었다.
“그냥 죽어라.”
구세계의 유물이자, 최상급 아티팩트로 손꼽히는 대천사의 연민에 내장된 공간전이 술식이 발동.
동시에 레녹의 발치에 떨어져 있던 깨진 유리조각들이 그대로 사내가 길쭉하게 내민 혀 위에 가지런히 쑤셔박혔다.
파바바바박!!
아티팩트의 힘을 빌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면서도 완성된 공간전이.
암리타와의 전투로 공간 조작에 대한 이해도를 확 끌어올린 레녹의 감각은 아티팩트의 능력조차 제 것처럼 자유자재로 조작하는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끼헤헤헤헥!!”
얼굴 사이로 썩은 핏물을 줄줄 흘리며 사내가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고작 이걸로는 소용없지. 어림도 없어!! 어디 한번 열심히 발악해 보……!!”
“자가증강술식 발동.”
키이잉……!!
그 순간, 로브 사이로 움켜쥔 대천사의 연민에서 눈부신 광채가 터져 나왔다.
그림자의 로브에 갇혀 대부분은 새어 나오지 못하지만, 그 일부는 정확하게 소매 틈을 비집고 나와 사내의 얼굴을 뒤덮었다.
“고유능력 시전. 코드 엘리제.”
치이이익!!!
“끄아아아아악!!”
대천사의 눈물로 발동시킨 고유능력을 사내에게 뒤집어씌우자 그 자리에서 구울의 머리통이 통째로 녹아내렸다.
“뭐, 뭐야 X발!!”
“무슨 짓을 한 거냐!!”
전혀 예상치 못한 소멸현상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는 다른 구울들의 모습.
레녹이 그런 이들을 무시하고 곧바로 한 번 더 대천사의 연민을 들어 올리려던 그 순간.
머리 위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게 네놈이 가지고 온 구세계의 유물이냐?”
근처 상가 옥상에 걸터앉은 채, 술병을 들고 딸꾹질을 하는 장년 남성.
술에 잔뜩 취해 붉게 변한 얼굴로 히죽 웃으며 이쪽을 내려다본다.
“성령계통 자가증강술식. 유물 중에서도 극히 희귀하고 특이한 계통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
배가 불룩 튀어나온 방만한 자세는 한없이 무방비하지만, 레녹은 그 모습에서 일말의 빈틈을 발견할 수 없었다.
강력한 수준의 육체능력자. 틀림없이 무수한 실전을 거쳐 살아남은 베테랑의 그것이다.
레녹을 내려다보는 술고래의 눈동자가 기묘한 안광으로 번들거렸다.
“귀한 물건은 확실하지만, 사용법이 잘못됐어. 애초에 그쪽 계통에는 관심조차 없었지?”
“…….”
“고작 구울들을 조지는 데나 사용하고 있다니, 최근에나 손에 넣은 물건이겠군.”
사방에서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는 구울을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내는 남자.
레녹은 말없이 품 안에서 쥐고 있던 대천사의 연민을 놓아버리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내 말은, 그런 아티팩트의 사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쳐줄 수 있다는 거야.”
탁!!
가볍게 십수 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린 남자가 레녹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대신, 괜찮은 물건이 더 있다면 결산 전에 서로 교환이나 하자고. 어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