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502
약먹는 천재마법사 502화
중간결산(3)
“결산과 교환이라…….”
교환이라는 명목으로 시비를 걸 생각인가 싶었지만, 남자가 결산에 대해 언급한 시점에서 레녹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 위성도시 바이루츠에서 복마전의 중간결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정체가 누구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은가.
겉으로는 주정뱅이처럼 보이는 저 배불뚝이 역시 틀림없는 판데모니엄의 일원.
상대 역시 레녹이 이번 결산에 참가한 멤버임을 알아보고 유물 교환을 제의해 온 것이다.
“재밌는 말이군.”
“그렇지?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아티팩트 역시…….”
“하지만 사용법은 필요 없어.”
레녹은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한 번 더 대천사의 연민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로브 안쪽에서 터져 나온 빛이 사방에서 도망치는 구울들의 머리 위에 공평하게 쏟아져 내린다.
치이이익!!!
“끄아아악!!!”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 위의 살점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기괴하기 그지없는 모습.
대천사의 연민이라는 유물에 내재된 능력은 무생물이나 마력의 공간전이뿐만이 아니다.
이리나 페스필드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수준급의 증강술식.
레녹 본인은 마나중독증 때문에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이것이 구울 같은 존재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령계통. 그중에서도 증강술식은 기본적으로 체내 신진대사와 재생능력, 전반적인 신체 능력과 컨디션을 대폭 끌어올리는 데 맞춰져 있다.
이러한 힘 자체는 술식의 힘으로 구현되고 있지만, 그 기반은 어디까지나 대상자 본인의 생명과 에너지, 영양분에 존재하는바.
하지만 스스로 더 이상 재생하거나 회복할 수 없고, 다른 존재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살아가는 구울에게는 강제적인 재생과 신진대사 촉진이 굉장히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빠르게 재생되어 촉진된 세포들은 구울의 몸에서 그대로 소모된 채로 회복되는 일 없이 녹아내리고.
다른 존재의 고혈을 빨 시간조차 갖지 못한 구울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재생하지 못하고 소멸한다.
“비, 빌어먹을!!”
“성령계통 술사라고. 이런 말은 없었잖아……!!”
“안 돼, 난 아직……!!”
치이이익!!
달려드는 구울을 향해 증강술식을 때려 박는 순간,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는 시체들의 모습.
레녹이 그동안 이해하고 있던 술식의 법칙과는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는 결과.
아마 이것이 복마전에서 구세계의 유물을 수집하는 일에 투자하고 있는 이유 그 자체겠지.
이 세계에 성립된 법칙과는 다른 셰계의 질서를 통해 작동하는 유물이라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해답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복마전의 목적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 계획의 진척도와 구체적인 방안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설계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그런 유물을 수집해서 중간결산에 들어간다는 오늘 이 자리라면 어느 정도 감을 잡기에는 충분할 터.
레녹은 바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는 대신 곧바로 바이루츠로 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뭐야, 이미 어느 정도 감은 잡고 있었던 건가? 괜히 쓸데없는 제안을 했잖아.”
마력사를 갈무리하는 레녹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칼칼한 목소리.
“생각보다도 훨씬 더 음흉한 놈인데. 그 멋대가리 없는 새카만 가면만큼 말이야.”
그는 붉어진 콧등을 씩 훑어 코를 풀어내더니, 레녹을 향해 껄껄 웃었다.
“내 이름은 버논이다. 그쪽이 빅터라고 했던가? 광대랑 같이 일했다고 들었는데, 사람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이게 술을 먹다 보면 기억력이 흐려지더라고.”
이런 스산한 유령도시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인 언동.
“헛소리가 길어.”
레녹이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설명할 생각이 없다면 난 가겠다.”
“흐흐흐, 오만한 성정이라고 소문이 파다하더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군.”
다소 날카로운 대꾸에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히죽거리기만 하는 버논의 모습.
“뭐, 그렇게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야. 경험상 결산에 모이는 놈들은 한가락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 쓸 만한 물건들을 거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거지.”
“…….”
“꼭 구세계의 유물이 아니더라도 좋아. 결산에 제출할 건수는 남겨둬야 하니까 말이다. 어떠냐?”
요컨대 결산이 시작하기 전에 마음이 맞는 멤버들끼리 간단하게 물물교환을 하기도 한다는 말인가.
하기야 판데모니엄에 들어올 정도의 실력자라면 자의든 타의든 여러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양지에서는 아티팩트를 어디서 입수했고 보관 중인지 설명해야 하지만, 이런 범죄 조직에서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상대를 죽이고 뺏었든, 시체에서 탈취했든, 어딘가에서 훔쳤든 누구도 책을 묻지 않는다.
철저하게 서로가 지닌 물건의 가치만 보고 거래를 하자는 제안.
레녹 역시 날카롭게 반응하긴 했지만 마냥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팔짱을 낀 채로 가면을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꺼내봐.”
“음?”
“제안을 했다면 원하는 게 있을 것 아닌가?”
가면 너머로 레녹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내게 필요한 게 있는지 일단 확인하고, 그쪽이 필요한 물건을 골라주지.”
오만하다 못해 당당하기 그지없는 선언. 벌게진 얼굴로 웃어대던 버논조차 살짝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운 친구였군. 하긴 그런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뺨을 긁적인 버논이 꺽 트림을 하며 품 안을 뒤적거렸다.
“내가 그쪽보다 훨씬 더 정신이 이상한 병자들과 거래 경험이 많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중고 거래에 얼마나 이상한 놈들이 많은지 알고 있나? 다짜고짜 깎아달라는 놈은 양반이야, 지가 원하는 가격만 말해놓고 물건을 받으러 가겠다는 미친놈도 있고, 왜 이 가격에 파냐고 따져대는 정신병 걸린 경쟁자도 있지.”
“…….”
“저번 분기에는 심지어 400년 할부를 요구하는 놈도 있었다니까. 더 놀라운 건 자기가 400년 뒤에는 진심으로 갚을 수 있다고 믿는 미친놈이었다는 거야. 아니, X발 그럴 거면 사채를 빌리러 가야지 왜 나한테 할부를 요구하는 건지…….”
중고거래에 마치 한이 쌓이기라도 한 것처럼 마구 혼잣말을 토해내는 버논의 모습.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레녹의 태도는 이 바닥에서 굉장히 양심적인 지성인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럼 자리를 옮겨서 시작해 볼까!”
레녹을 문 닫힌 상가 안쪽으로 끌고 들어간 버논이, 기운찬 손짓으로 품 안에서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탁!!
가판대로 보이는 선반의 가장 왼쪽에 그가 내려놓은 것은 낡은 고문서.
종잇장 사이로 희미한 마력이 흐르고 있는 것이, 꽤 강력한 마도서로 보인다.
버논이 술병을 들이켜며 말했다.
“글라시아 마탑의 정위마법 실험 기록이다. 빙결계통의 고유마법을 연구한 기록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
“좀처럼 외부로는 유출되지 않는 마탑의 사료야. 속성계통의 마법을 연구하고 싶은 거라면, 이것보다 더 좋은 표본은 절대 없을 거다.”
“마탑의 사료라…….”
이미 반쯤 먹혔다고 확신하는 듯한 버논의 목소리.
“이쯤에서 내가 원하는 물건을 말해두자면, 나는 기본적으로 필터나 여과기에 해당하는 접합 아티팩트 종류를 무척이나 선호…….”
탁!
버논의 말은 레녹이 내려놓은 굵직한 다이어리를 보자마자 멈췄다.
다이어리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전류 가닥을 확인한 남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빠르게 페이지를 넘긴 버논의 눈꺼풀이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이, 이건 토르번 마탑 군위마법 연구 일지!! 그 전쟁광 새끼들이 어떻게 이런 물건을 유출……!!”
버논이 꺼내놓은 것보다 완벽하게 상위 호환에 해당하는 마탑의 사료.
“보다시피 이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군.”
순식간에 입을 꾹 다문 버논의 뒷모습을 보며 레녹이 말했다.
“더 꺼내봐라.”
“……으으음!!”
벌게진 얼굴로 허리춤을 뒤적인 버논이 두 번째로 꺼내 든 것은 물병 형태의 호흡기.
안에는 푸르스름한 기체가 부유하며 호흡기 안쪽을 맴돌고 있다.
“마력을 기체 상태로 압축하는 저장 장치다. 입가에 둘러메는 것만으로 편리하게 이용이 가능하지.”
버논이 말했다.
“성위급 마법사의 평균적인 마력량을 저장해 둘 수 있을 정도의 물건이다. 용량과 휴대성을 동시에 갖춘 이런 물건은 절대 흔하지 않…….”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녹이 또 다른 물건을 꺼내 호흡기 옆에 내려놓았다.
새파란 마력이 나선형으로 수렴하는 수정 구체. 은은한 열기를 띤 채로 혼자서 발광하는 마력노심의 모습.
카르텔의 처형부대가 습격했던 다이크 사의 공장 부지. 그곳에서 설치되어 있던 마력노심을 레녹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했던 물건.
파르덴 맥퀸을 죽일 때도 사용했던 만큼, 무려 자성영역의 마력량을 한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마력 저장 장치다.
파피루스 아르겐테우스를 손에 넣은 뒤로는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지만, 웬만한 마력 저장 장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물건일 터.
버논 역시 마력노심에 담긴 마력량의 용량을 알아보았는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레녹은 그런 버논을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끝인가?”
“…….”
“거래를 제안한 것치고는 가진 물건이 별로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니, 아직 안 끝났어!!”
고개를 번쩍 치켜든 버논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술에 취해 벌개져 있던 그의 표정은 어느새 뺨을 후려맞은 것처럼 또렷해져 있었다.
품 안을 뒤적거린 버논이 연달아서 선반에 아티팩트를 내려놓고, 레녹도 뒤따라 수중에 있는 물건을 맞춰나갔다.
“기계도시 마키나의 사제 무기다. 설계도는 구하지 못했지만…….”
“기어사이드의 커스텀 병기 설계도. 마키나의 것을 개조해 만든 물건이다.”
버논이 입을 쩍 벌렸다.
“……아타크샤 공방의 손목 보호대. 비록 블랙팰리스 공방의 물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블랙팰리스 공방의 장갑이 여기 있군.”
레녹이 장갑을 벗어서 내려놓자 삐질삐질 땀을 흘린다.
“천령개의 주걱. 위급한 상황에 사용자를 술법결계로 보호해 주는…….”
“사용자를 탈출시켜 주는 에낙필의 다섯 손가락. 여분도 몇개 가지고 있지.”
깊게 흐르는 침묵.
“텔로미어의 법구. 속성술식의 위력을 보조해 주는 상위 아티팩트로…….”
“블레이버 마탑의 염주 후보들에게 선물된다는 혁주책자. 염열마법의 속도와 구현상태를 크게 개선시켜 주는 물건이다.”
“…….”
버논이 거래 물품으로 내놓는 모든 물건과 비슷하거나, 더 좋은 물건을 따라 내려놓는다.
희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버논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꺼낼 수 없는 물건을 이 시점에 꺼낼 생각인 것처럼 눈을 질끈 감고 품 안에서 손을 홱 뻗어 선반 위에 탁 내려놓았다.
“스타니아 수도원의 대수도승이 직접 제작한 주물부적이다!! 무려 반영구적으로 사용자에게 강력한 축복을 내려주는……!!”
“8레벨 극위 부적술사가 직접 제작한 호신부적. 부동장벽이라는 술식을 담고 있다고 하더군.”
“X바아알!!!”
걸쭉하게 쌍욕을 내뱉은 버논이 레녹을 향해 소리를 꽥 질렀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교환 물품으로 좀 더 가치 있는 물건을 꺼내놓으라는 의미였다만.”
“몰라, X발 진짜!!”
버논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됐으니까 너도 원하는 게 뭔지 말해!! 내가 원하는 아티팩트랑 빨리 거래해 달라고!!”
“…….”
술기운에 머리가 맛이 가기라도 했는지 마구 떼를 쓰기 시작하는 버논의 모습.
레녹은 그런 버논의 모습을 다소 한심하게 바라보다 말없이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네가 원하는 여과기라는 게 이런 물건을 말하는 건가?”
로브 끝에서 나타난 파이프 형태의 길쭉한 관을 바라본 버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오오오!!!”
벌떡 일어난 버논이 그것을 움켜쥐려 하는 그 순간, 레녹이 그대로 그것을 뒤로 휙 던져 버렸다.
버논의 몸이 그 방향을 따라 기울었다 다시 넘어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력사로 그것을 잡아챈 레녹이 물었다.
“말해.”
“마, 맞아!! 그걸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거냐!!”
레녹이 혼자 힘으로 연초를 제작하기 어려웠던 시절, 플럼버의 과수원에서 비싼 값을 주고 구입했던 연초 필터들 중 하나.
아티팩트는 아티팩트지만, 술식적으로 증강이나 보조와 관련된 기능은 전혀 없는데 이런 물건에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다.
벌떡 일어난 버논이 침을 줄줄 흘리며 레녹의 손에 들린 필터를 노려보았다.
“거대도시 음지에서 극비리에 제작해 한정 수량으로 판매되었다는 여과기……!! 술맛을 무려 56종 이상으로 여과해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로 애주가들에게 아주 높은 값으로 팔리고 있지……!!”
“…….”
“그 물건이 필요 없다면 내 아티팩트와 교환하자, 아니, 필요하다면 구세계의 유물이라도 거래할 수 있어, 뭐가 필요하냐!!”
이 정도로 간절하게 나온다면, 아마 버논의 요구가 단순히 취미의 영역은 아닐 가능성이 있다.
아마 술과 관련된 무언가, 혹은 능력에 필요한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여과기가 그에게 이렇게 큰 가치를 지니는 것도 이해는 가능하다.
다만 문제는 버논이 가진 물건중에서 마땅히 필요한 아티팩트가 없다는 점인데…….
잠시 고민에 빠졌던 레녹이 이내 해답을 떠올리고 고개를 돌렸다.
“구세계의 유물을 준다는 건, 이번 결산을 포기하고서라도 이 여과기가 탐이 난다 이 말이겠지?”
“그래!”
“그럼 이렇게 하지.”
레녹이 그렇게 말하며 여과기를 다시 품 안에 갈무리했다.
“내가 듣기로는 이번 결산에 제출한 구세계의 유물이나 정보에 따라서, 소정의 대가를 돌려받는다고 들었다.”
“……그렇긴 하지. 그게 뭐 어쨌다고?”
“그 대가가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설명해 봐.”
레녹이 가면을 고쳐 쓰며 희미하게 웃었다.
“경우에 따라서 그 대가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겠다 약속한다면, 거래에 응하지.”
* * *
레녹은 버논과 합의를 마친 뒤 곧바로 그와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
버논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위성도시의 스산한 건물들 중에서도 유난히 크기가 큰 거대한 극장이었다.
바이루츠의 다른 건축물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독보적인 디자인과 크기.
돌고래를 닮은 유선형의 곡선 지붕이 인상적이다. 도시를 설계할 당시에도 주요 랜드마크로 계획되었던 건물이었겠지.
크게 눈에 띌 정도인 만큼 회담 장소로 쉽게 선택하지 않을 법도 한데, 이번에 모인 멤버들은 그런 것에 굳이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극장실의 메인 홀로 들어가기 위한 후문.
버논을 따라 후문 뒤쪽 널찍한 창고 구석을 지나치던 레녹이 걸음을 멈췄다.
쐐애액!!
목덜미 사이를 정확하게 노리고 터져 나오는 섬뜩한 살기.
핏빛의 안광이 허공에서 이리저리 비틀리다 이내 레녹의 바로 뒤에서 멈춰 선다.
직후 살기가 터져 나온 방향을 확인한 버논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표정에는 당황이나 놀람보다는 짜증에 가까운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거 X발 진짜……. 적당히 못 하겠냐? 피 냄새가 진동해서 술맛이 떨어지잖아!!”
“으흐흐흐……. 이거 실례했군.”
철퍽……!!
그 말과 함께 창고 뒤쪽에서 시체 하나를 줄줄 끌고 걸어 나온 또 다른 남자의 존재.
멍한 인상의 노년 남성. 행색은 후줄근하다 못해 너덜너덜하지만, 느슨하게 쥐고 있는 칼날만큼은 시리도록 차갑게 빛났다.
“틀림없이 훌륭한 검사일 거라 생각하고 기세를 떠본 건데, 아니었던가……?”
버논이 코웃음을 치며 노인을 타박했다.
“특질계 술사를 상대로 검사는 무슨……. 네놈도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다가 완전히 눈이 삐어버린 모양이군.”
“흐으음……. 아니라면,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노인이 심드렁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쥐고 있던 칼날을 느릿하게 검집 사이로 밀어 넣는다.
하지만 레녹은 그 자연스러운 동작보다는, 칼에 한 줌의 핏방울도 묻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조금 전까지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고 다녔음에도 사용하는 무기에는 한 줌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그건 노인이 저 초라하기 그지없는 외견과는 달리, 경지에 오른 검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노인이 레녹을 보며 조용히 적광을 번뜩였다.
“틀림없이 사람깨나 죽여본 느낌인데, 이상하단 말이지…….”
“…….”
“흐흐흐, 검사가 아니라면 됐다…….”
자신이 죽인 시체를 칼집 끝으로 찍어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극장 창고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노인.
그 걸음에 따라 시체가 쭉 이끌리면서 창고 바닥에 시뻘건 핏길을 그렸다.
버논이 입에 물고 있던 술을 퉤 뱉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노친네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딜 싸돌아다니겠다는 거야?”
“오랜만에 싱싱한 인육을 사냥하고 있자니 꽤 즐겁군…….”
노인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창고 밖으로 멀어져 갔다.
“방해하지 마라…….”
“빌어 처먹을, 여전히 기분 나쁜 놈이군.”
버논이 투덜거리며 카악 가래침을 뱉었다.
“됐어, 저 노친네는 항상 저따위로 구니까. 시간이 되면 돌아올 거다. 아니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짜증스러운 시선으로 머리를 긁적인 버논이 등을 휙 돌렸다.
“혈노 저놈은 뒤지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하지. 우린 들어간다.”
복잡한 후문 창고와 분장실을 거쳐 극장 안쪽으로 진입한다.
수천 명의 관객들이 동시에 무대를 내려다보는 장대한 극장의 메인 홀.
하지만 좌석에는 희뿌연 먼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잿가루만이 담뿍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레녹의 시선을 가장 먼저 잡아끈 것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관객석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에 위치한 널찍한 무대.
본디 온갖 소품과 무대장치들이 교차해야 할 그 장소에, 거인을 조각해 놓은 듯한 거대한 신상이 놓여 있었다.
고오오……!!
두 개의 머리와 여덟 개의 팔이 달린 이두팔비(二頭八譬)의 형상.
악귀처럼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근육질의 상반신이 인상적인 석상 위로는, 알 수 없는 고대 문자가 빼곡하게 음각되어 있다.
그렇게 음각된 문자 배열이 거인상의 온몸을 타고 발광하며 은은한 광채를 흩뿌렸다.
이런 극장 한복판에 숨겨져 있기엔 실로 어울리지 않는 신상의 모습.
레녹이 그 이질적인 광경에 잠깐 멈춰서 신상을 올려다보는 사이, 극장의 어둠 사이로 다섯 개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네 명의 인간과, 인간을 흉내 낸 것만 같은 기이한 형태의 인형 하나.
그리고 놀랍게도 그중 두 사람은 이미 레녹이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
각자 극장 관객 VIP석과, 천장 조명 거치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두 남녀의 모습.
냉기를 두르고 다니는 카바힘의 왕족, 소류와 기계도시의 집행자, 마이야 렌슬릿.
카이우슈와 항하사미궁에서 마주쳤던 강자들. 레녹에게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던 실력자 두 사람이 이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