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645
약먹는 천재마법사 645화
집행관(2)
“3급 거주지역의 58%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었습니다.”
“하급 공방지구 거리 전체가 완파. 사상자 150명 이상. 계속됩니다.”
“식량 연구지구와 중단 공장지구가 이동 중에 충돌. 블록 30여 개가 추락했습니다.”
수천 개의 모니터가 떠오른 통제실에서, 오퍼레이더 수백 명이 빠른 속도로 보고를 이어나간다.
그들의 입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거의 대부분이 파손과 붕괴, 사상자와 사건사고에 대한 것들뿐.
감정이 실리지 않았던 그들의 목소리에도 점차 망설임이 생기고, 보고를 할 때마다 조금씩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통제실의 가장 뒤편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누군가 빙그레 웃었다.
“왜 그러시죠?”
“…….”
“잘 듣고 있습니다. 보고를 계속해 주세요. 도시 전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전해 듣고 싶군요.”
백금색의 장발을 길게 기른 젊은 청년의 모습. 인상 자체가 희미해 정갈한 분위기가 외려 강렬하게 다가온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데도, 그 속내를 알 수 없고 묘한 기품이 느껴지는 태도.
그 안색이 평소보다 창백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섣부르게 말을 걸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헤르메스 의원님…….”
오퍼레이터들을 지휘하던 간부들 중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죄송하지만, 구획 이동 속도를 조금만 늦춰주시지 않겠습니까.”
“…….”
“일정보다 빠르게 구획이동을 시작해서, 미리 대피령을 내렸는데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감정 없이 보고를 진행하려고 해도, 모니터 너머로는 죽음과 파괴의 순간이 실시간으로 비친다.
“구획이동 시작 직후 이미 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대로 구획 이동을 진행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길모어 브렙트 통제관.”
헤르메스의 담담한 말에 이름을 불린 통제관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헤르메스는 그런 그의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42세. 3급 책임자. 경력은 19년차. 통제실에서 일한 지는 6년이 넘었고, 가까운 사택에서 출근하고 있군요. 가족은 셋. 부인과 아들 딸 하나씩이라.”
별다른 기록지나 보고서 없이 통제관의 신상정보를 줄줄 읊어대는 헤르메스의 말에, 길모어가 이를 악물었다.
“의원님,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외무부의 캐트시 서기관과는 2년째 관계를 유지하고 있군요?”
“……!!!”
그 순간, 길모어의 얼굴이 불쌍할 정도로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헤르메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구획이동 분기마다 각 구역의 관리인들에게 뒷돈을 받고, 미리 배정 위치를 알려준 지 4년 차. 따로 챙긴 금액이 8억 셀이 넘는군요.”
“그, 그만…….”
“부모님이 물려주신 저택을 두고 동생과 다투다가, 8년 전 비 오는 날. 쓰레기 소각장에서…….”
“아아악!! 아아아아악!!!”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은 길모어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제발!! 제발!!”
미친 듯이 양손을 싹싹 비비는 길모어의 모습. 통제실이 순식간에 죽은듯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내린 상관을 바라보는 오퍼레이터들의 표정은 시체와도 같이 창백했다.
헤르메스는 그런 길모어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길모어 통제관. 저는 사실 당신 같은 사람들을 싫어하지 않아요.”
“으, 흐흐흑……!!”
“누구나 내면에는 선의와 치부를 동시에 안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상황에 따라 바꿔 내보인다 하더란들, 누가 책망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소리죽여 들썩이는 길모어의 머리를 쓰다듬던 헤르메스가, 대뜸 그의 머리칼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뚜둑!!
힘없이 헤르메스의 손길에 따라 길모어가 그대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의 머리채를 움켜쥔 헤르메스가 인자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모순을 지적받는 것만으로 무너져내리는 인간에게 그런 조언을 듣고 싶지도 않군요. 제 마음을 이해하겠습니까?”
“알겠, 알겠습니다……!!!”
선함과 추악함. 헤르메스는 이 두 가지 개념이 그리 상반되지 않은 것이라고 믿는다.
수십 년이 넘는 생애를 살아가며 사람이 어찌 일관된 신념 아래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승천에 도전하는 위대한 초월자들조차, 처음에는 세계를 초월하겠다는 생각을 감히 품지 못했을진대.
자격을 얻은 이들조차 생각이 변하고, 마음을 고쳐먹으며, 심상이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지막에 올바른 대답에 도달하기만 한다면, 중간과정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렇기에 헤르메스는, 스스로의 치부를 부끄러워하는 이에게는 어떠한 책임이나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흐흐흐, 흐흑……!!!”
헤르메스가 손을 놓자마자, 길모어가 이마를 땅에 처박고 조용히 흐느꼈다.
마치 신을 숭배하기라도 하듯, 헤르메스의 발등 아래 납작 엎드린 그 모습을 모두가 애써 못 본 척 외면했다.
통제관이 필사적인 각오로 건넨 간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 몇 마디로 철저하게 짓밟아버린 헤르메스의 모습.
때리거나 죽이기는커녕, 담담하게 무너뜨린 그 태도가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두렵게 느껴졌기 때문.
기세나 권위, 무력으로 압박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투명한 말투와 반응, 그 끝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상대의 비밀과 모순을 지적하고 붕괴시킨다.
어째서 엑스 마키나가 이 남자에게 계엄령 발동과 관련된 모든 권한을 허락했는지.
기계도시 마키나의 구획 이동 일정을 크게 앞당기는 결정권을 양도하였는지.
평범한 권력가나 지도자가 지닌 것과는 다른, 이질적인 카리스마를 통해 모두가 깨달았던 것이다.
다른 오퍼레이터들을 돌아본 헤르메스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투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계속할까요?”
“……알겠습니다.”
창백한 안색으로 기판을 조작하는 오퍼레이터들의 손길이 한결 분주해진다.
헤르메스는 그 모습을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지켜보며, 쓰러진 길모어를 힐끗 바라보았다.
“통제관은 지금 이 광경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기계도시의 구획이동은 이런 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랍니다.”
“……예, 예……?”
길모어가 시선을 들어 올리고, 오퍼레이터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을 알면서도 헤르메스가 투명하게 웃었다.
“도시가 변할 때마다 부품이 마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예요. 원래라면 훨씬 더 빠르게 갈아치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헤르메스는 승천자의 기억에 잡아먹힌 자아 그 자체이지만, 동시에 엑스 마키나 수뇌부의 일각을 차지한 권력자이기도 하다.
마키나 권력의 정점으로 군림해 온 경험과, 승천자의 기억을 보유한 그는 기계도시가 어째서 구획이동이라는 존재방식을 선택했는지 알고 있었다.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부품으로 갈려 나가는 것은, 무기물뿐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죠.”
헤르메스가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는 어째서 도시가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그 인과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지만…….”
기계도시가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름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부품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피와 살에서 쥐어짜인 기름과 고혈. 고통의 절규와 공양되어 바쳐지는 영의 존재까지.
그를 통해 도시 전체를 하나의 토대로 삼아 완성되는 거대한 결실.
도시가 세워지기 한참 전부터, 창립자들은 언젠가 찾아올 이런 순간을 대비하려 했던 것이다.
헤르메스가 하려는 일은, 그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세워두었던 안배를 지금 미리 일깨우려는 것뿐.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 벌어지는 사고와 폐해는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도시의 힘과 영육이 하나로 모이고 있군요. 좋습니다…….”
눈을 감은 채, 앉은 자리에서 도시 전역을 내다보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헤르메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돌아가서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구세계의 승천자가 남겨둔 기억에 자신을 내맡긴 뒤, 헤르메스는 오직 그것만을 위해 자산과 여력을 갈아 달려왔다.
인간의 미욱한 정신 따위는, 초월자의 압도적인 자아 앞에 한낱 자그마한 촛불에 불과할 뿐.
육신도, 권력도, 지위도, 상황과 인연마저 어떤 의미도 없다.
중요한 것은 승천을 위해 경도된 그 위대한 의지를 이 세계에서 이어받아, 진짜 그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뿐.
마이스터의 생명을 거래로 삼아, 문 너머에서 구세계의 대천사를 꺼내는 데 성공하며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남은 것은 처음 시작한 그때처럼, 승천자의 압도적인 자아와 기억 너머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던지는 일.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 도시의 희망이 불씨를 피웠던 곳에서, 헤르메스는 다시 한번 ‘자격’을 손에 넣는다.
* * *
침묵에 휩싸인 상급 공방지구. 레녹의 공방.
싸늘한 시선을 들어 올린 마이야 렌슬릿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레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 도시에서 적지 않게 들었지.”
“…….”
공방 벽면을 천천히 걸으며, 창문 틈으로 남아 있는 커튼을 마저 쳐버린 레녹이 물었다.
“승천문의 실패와 함께 도망쳤다던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레녹은 이미 다른 상황에서 마이야를 여러번 마주한 적이 있다.
청의 눈 에반의 이름으로 항하사미궁에서, 복마전 빅터의 신분으로 위성도시 바이루츠에서 진둔과 중간결산으로 충돌하고 협력하지 않았던가.
마이야를 아군과 적 양측에서 대면해 보았지만, 그녀의 존재가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적은 한순간도 없다.
위계를 초월해 8레벨에 다다른 육체능력자.
혈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정도로 술식 재능을 감각적으로 타고난 기재.
집행관으로서 일해오며 쌓아 올린 풍부한 경험과 그 모든 능력을 망라하는 날카로운 판단력까지.
과거 이 도시에서 압도적인 실적을 쌓아 올리며 엄청난 명성을 거머쥐었던 영웅이라 했던가.
레녹이 경험했던 마이야 렌슬릿이라는 존재는 그 거창한 이명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강자이자, 뛰어난 지성을 지녔고.
그럼에도 승천문의 실패라는 굴레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망령 같은 존재였다.
애초에 그녀가 판데모니엄에 입단한 계기 자체가 승천문의 실패와 관련이 있음은 물론이고.
아직도 그 사실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할 정도로 민감한 역린을 지닌 존재.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레녹은 설마 이 시점에서 마이야를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계도시 마키나의 존재가, 생각하고 되새기는 것만으로 마이야를 고통스럽게 할 만큼 민감한 실패였다면.
마이야가 다시 이 도시를 찾는 날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은 다음일 거라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
적인가, 아군인가.
적어도 레녹이 알고 있는 마이야 렌슬릿이라는 집행관은, 문제의 원인을 해소하기보단 직접 잘라내는데 능한 초인에 가까웠다.
당장 이 자리에서 레녹의 목을 치고 기계도시를 안정화시키겠다 말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닐 터.
‘전투가 시작되면 에낙필의 다섯손가락으로 거리를 벌린 다음 시간을 끌어야겠지. 문제는 마이야의 소우주를 최소 두 번 정도는 막아내야 조건이 성립한다는 의미인데…….’
대답을 기다리면서도 무심코 머릿속으로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구도를 짜 올리고 있다.
마이야는 그런 레녹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시선을 쭉 들어 올렸다.
마치 이 공방의 풍경이 아니라, 그 너머를 한껏 넓게 돌아보는 듯한 망연한 눈길.
그녀가 중얼거렸다.
“얼마 남지 않았군.”
“뭐?”
“두 번째 승천문이 망가지면서 도시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고, 마키나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무력집단이 이 사태의 원인을 뒤쫓고 있다.”
마이야의 날카로운 시선이 레녹의 얼굴에 닿았다.
“헤르메스가 새로운 육신에서 깨어나며, 용의자가 이쪽으로 좁혀졌지.”
“…….”
“구획이동이 강제로 진행되면서 도시 전체가 들썩이고 있지만, 네놈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일 거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레녹이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물었다.
품 안에서 연초를 꺼내 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신다.
세 사람의 머리 위로 피어오르는 연초 연기를 바라보며 레녹이 말했다.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어. 난 그것보다는 당신이 어째서 내 공방을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듣고 싶군.”
“…….”
“승천문의 실패 이후로 도시를 떠나 도망쳐 왔다면, 이 시점에 돌아올 이유가 없어. 이 도시의 권력자들은 문의 실패를 묻어버리려 했으면서도, 당신이 남겨둔 문의 유산을 양껏 사용해대고 있었으니까.”
레녹이 연초를 한쪽 손에 끼운 채로 가볍게 손짓했다.
“난 해저장벽 심성관에서, 헤르메스가 무엇을 노리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당신은 달라.”
마이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레녹이 첨언했다.
“당신 같은 존재가 개입했다가는 상황 자체가 비틀릴 가능성이 높겠지. 그걸 알면서도 내 공방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마이야가 레녹의 공방이 아니라 마키나 다른 구역에서 출현했다면, 이미 도시 전체의 주목이 그쪽으로 쏠렸을 터.
그것을 생각하면 마이야는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고 가장 먼저 레녹의 공방을 찾았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행적 자체가 레녹에게 볼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자명했다.
기계도시 마키나에서 승천문 계획을 지휘한 당사자였던 그녀가, 문이 박살난 지금 어째서 다시 이 도시에 돌아와 레녹을 찾아온 것인지.
승천문의 실패 자체를 근본적으로 수습할 방법을 찾아낸 것인지.
이 괴물 같은 집행관과 충돌 이상의 손해를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
레녹의 날카로운 대답에서 무언가를 느끼기라도 한 걸까.
물끄러미 그 얼굴을 바라보던 마이야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컨디션이 망가졌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을텐데 주저하지 않는군. 그만큼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인가?”
“…….”
“만용을 부리듯 지껄이지만, 판단 자체는 정답에 가깝다. 역시 넌 평범한 장인은 아니야.”
마이야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마우저의 목에 겨누었던 칼날을 거두었다.
“헤르메스는 지상 위에서 새로운 문을 만들 생각이다.”
팔짱을 낀 채로 의자에 등을 기댄 마이야가 중얼거렸다.
“분기에 맞지 않게 사상자를 감수하고 구획을 이동시키는 것은, 필요한 공양물을 맞추기 위한 사전작업. 구획이동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문을 완성시키겠지.”
“…….”
헤르메스의 진짜 목적이 신살자를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구세계의 승천자 자신을 불러오는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이야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지금 벌어지는 구획이동 자체가 그 사전준비라고 일러주고 있었던 것이다.
“구획이동이 전부 끝나기 전에 헤르메스를 찾아, 그의 진체가 소환되는 것을 막는다.”
마이야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났다.
“헤르메스에게 아직 볼 일이 남아있다는 걸 안다. 협조할 생각이 있다면 패스파인더의 이름을 걸고, 내가 직접 헤르메스에게 가는 길을 만들어주지.”
“길을 만들어준다.”
레녹이 피식 웃었다.
“헤르메스는 육신과 정신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 초월자의 자아 그 자체다. 어떻게 당신 혼자서 그를 찾아낼 생각이지?”
“물론 나 혼자서 해낼 만한 일은 아니지.”
마이야는 대답하는 대신, 들고 있던 소검을 그대로 자신의 팔뚝에 가져다 댔다.
촤악!!
거침없이 팔뚝을 베어내자 상처가 벌어지며 그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져내린다.
[혈마법 4중 개진] [일자도래 타자투영(一子到來 他子投影)] [인연도복(人聯徒復)]끼이이익!!
그 자리에서 혈흔이 솟아올라 작은 문의 형상을 만드는가 싶더니,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모습.
마이야가 솟아오른 피의 문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래서 조력자를 불러낼 생각이다. 이의는 없겠지?”
“이, 이건…….”
마우저가 그 기괴한 형상에 무심코 뒤로 물러서고, 레녹 역시 마이야가 사용한 술식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항하사미궁. 진둔이 잠들어 있던 거대한 요람에서 마이야가 단장을 불러내기 위해 사용했던 혈마법.
마이야는 이 도시에 존재하지 않는 조력자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 자리에 불러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쿵!!
문 너머에서 일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지다가, 이내 씻은 듯이 사라져 소멸한다.
그 대신 보이지 않는 공간의 균열 너머로 심드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이야. 난 지금 아주 바쁘다. 무슨 일이지?]“박사, 해야 할 일이 있다.”
마이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목소리에게 용건을 밝혔다.
레녹 역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상대의 정체를 짐작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 시점에 스스로의 혈마법을 이용해, 박사를 직접 호출하려 했던 것이다.
“…….”
[부르는 방식도 실로 거칠고 예의가 없군. 소환 대상에게 출력을 일부 떠넘기다니 무슨 염치가 없는 발상이냐.]박사가 쉬지 않고 투덜거리듯 말했다.
[단장 같은 괴물이나 이런 식의 소환에도 대가를 지불하고 응해줄 수 있는 거다. 미궁에서처럼 일이 잘 풀릴 거라고 기대했다가는…….]“승천문 너머에서 초월자의 자아가 깨어났다. 상정했던 최악의 상황 중 하나지.”
그 순간, 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박사의 말이 뚝 멎었다.
“미련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적어도 이번 일에 한해서는 책임을 져야할 거다.”
마이야는 그런 박사의 반응을 신경쓰지 않고 재차 말했다.
“그건 네가 직접 설계해서 이 세상에 내놓은 미련 그 자체니까. 아터마이어.”
[…….]그 순간,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박사의 존재감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