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796
약먹는 천재마법사 796화
배신과 광신(3)
지하 1층계에 기거하고 있어야 할 대심판관이 탑을 박살 내고 뛰쳐나와, 만귀와 맞서고 있는 갑작스러운 상황.
하지만 레녹은 그것보다 심판관이 언급한 거래에 신경이 쏠리는 것을 느꼈다.
‘교황성과 진혼정의 거래라…….’
귀도 교단과 군령도시 요르타를 대표하는 두 수뇌부.
전혀 연관성이 없어야 할 두 집단이, 무간 안에 존재하는 승천자의 시신를 두고 거래를 했다는 증거.
교주는 무엇을 위해 무간 안에 도래의 시체를 보관했으며, 요르타는 어째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본디 요르타로 들어오는 생자들을 시험하고 있어야 할 심판관이 어째서 지금 여기에 와 있는지.
레녹을 도와주려는 이유 역시 제안에 응한다면 설명을 들을 수 있을 터.
그 사이 만귀 역시 상대의 존재를 인지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리스 대심판관. 이게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긴. 너희들이 먼저 탑 아래까지 찾아와 시끄럽게 소란을 벌이지 않았더냐.”
오리스라 불린 소년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발아래서 넘실대는 강물을 따라 헤엄치던 유령상어가 강한 콧김을 내뿜었다.
[푸우!]“아랫집에 사는 유령이라고 매번 참을 수는 없지. 가끔씩은 여기에 들러붙은 잡귀가 있다고 알려줄 필요가 있는 거다.”
“…….”
만귀와 싸우는 도중 레녹은 탑의 바닥을 부수며 지상을 향해 하강하고 있던 바.
그 여파가 지하 1층계까지 영향을 미치며, 대심판관 역시 탑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지금 탑 사방에 범람하는 물길 역시 본래 심판장에 존재하는 헤드레인 강물이 범람한 것이겠지.
대심판관이 어째서 이 시점에 개입할 마음을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녹의 존재가 그 판단에 의거했음은 틀림없어 보였다.
만귀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천천히 오리스를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그대가 지하 1층계에 유배된 것은 야행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은 응당한 판결의 결과다.”
백발의 청년이 소년을 노려보며 말했다.
“요르타에 찾아오는 생자를 심사하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도, 이제 와 그 책무를 배신할 셈인가?”
“배신? 누구 마음대로 배신이지? 나는 진혼정의 결정에 승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오리스가 크게 웃으면서 반문했다.
“배신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힘이 모자라 일을 그르쳤을 뿐이다.”
“…….”
“기회가 되면 언제고 다시금 시도하여, 내 자리를 되찾을 준비는 되어 있었지. 그러니-”
소년이 레녹을 정확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은 내가 데려가겠다.”
“저자는 무간에 남겨진 치부를 엿보고 진혼정의 위대한 영령들을 모욕했다. 그 죄는 생자의 운명을 바치는 것으로 온전히 갚아져야 하지.”
만귀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야행을 저버린 배신자 주제에, 지금 진혼정의 판결에 거역하겠다는 말인가?”
“그 사실에 대해 내가 해줄 말은 하나뿐이군.”
오리스가 코를 후비적대며 비웃었다.
“내 알 바 아니야.”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야행을 저버린 배신자의 죄업 역시 같이 청산할 수밖에!!”
그렇게 말한 만귀가 손을 들어 올리자, 위령탑의 군령들이 뜯겨 나와 양손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군령의 영기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응집되다 못해, 거대한 두 갈래 창극의 형상으로 변한 그 순간.
심판관 역시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허세 부리지 마라, 무간의 화신체야.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영체 따위가 무엇을 안다고 지껄이는 거지?”
“…….”
“거짓된 대리인 주제에 그 힘이 온전히 자신의 것인 줄 아는군. 무간을 지키도록 개조된 문지기를,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상대하는 정도라면…….”
오리스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적당히 받아주며 도망치기에는 차고도 남지.”
“탑 지하에 갇힌 죄인 주제에 참으로 시건방진 말이로군.”
만귀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두 번 다시 지상에 기어 나오는 일이 없도록 그 버릇을 고쳐주겠다!!”
쐐애애액!!
만귀의 손에 잡힌 유령의 창극이 내리 찍힌 순간, 오리스 역시 기다렸다는 듯 힘을 끌어올렸다.
유령상어가 크게 지느러미를 휘젓자 강물이 크게 솟구치며 얼어붙어 단단한 방패로 변했다.
두 갈래 군령의 창극이 그대로 얼음의 방패에 내리 찍히며 격돌.
[끼아아아악!!]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사방으로 묵직한 충격파를 터트렸다.
파아아앙!!
위령탑 하층부에 가득 찬 강물이 쭉 밀려나며 다시금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고, 복도와 사이 방 안까지 물길을 가득 채워 넣었다.
쏴아아아!!
“흐하하핫!!”
몰아치는 파도와 군령의 폭풍 사이로 엇갈리는 두 귀신의 형상.
오리스가 광소를 터트리며 손을 휘젓자 유령상어가 군령의 폭풍 사이를 헤엄치며 질주하고.
만귀 역시 강물 아래 내려서 연달아 군령의 창과 폭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웅혼한 진동과 함께 탑의 하층부를 터트릴 것처럼 격렬하게 충돌하는 영혼의 흐름.
코앞에서 폭발하는 군령술식을 피해 오리스가 레녹을 돌아보며 빠르게 소리쳤다.
“복마전의 술사야. 함선을 꺼내거라!!”
“…….”
콰아앙!!
정면에서 달려드는 만귀의 공세를, 강물을 여러 차례 얼려 붙여 받아낸다.
차갑게 얼어붙은 강물이 날카로운 파도로 화해 만귀의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얼려 붙은 강물을 여러 차례 덧대 날카롭게 다듬어 무기로 화한다.
헤엄치는 상어 위에 올라탄 채, 얼어붙은 냉기 파편을 조작해 만귀를 향해 휘두르는 능숙한 솜씨.
카가가각!!
정면에서 보고 반응하는 만귀조차 쉽사리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절묘하게 시간차를 두고 내리꽂혔다.
동선과 패턴을 한 번에 읽어내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게 꼬여 있는 고차원적인 수싸움.
“……!!”
콰아아앙!!
탑 하층부에 범람하는 물길 아래로 만귀의 형상을 처박아 던져 버린 오리스가 다급히 외쳤다.
“위령탑의 층계를 지키는 천귀들이 더 합류하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빨리!!”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군. 이런 곳에서 함선을 꺼내봤자 운신에 방해가 될 뿐이다.”
레녹이 위령탑 내벽에 내려앉아 몸을 추스르며 대꾸했다.
“애초에 그쪽을 어떻게 믿고 거래에 응한다는 말이지?”
“빌어먹을, 지하 1층계에서 내가 베풀어준 선심은 다 까먹은 거냐!”
소년이 순간 발끈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반응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강물 아래서 희끄무레한 섬광이 번져 나온다 싶은 찰나.
엄청난 속도로 상승한 만귀의 형체가 그대로 유령상어의 아래쪽에서 솟구쳤다.
쐐애액!!
군령의 사슬에 제 몸을 묶은 채로 소년과 상어를 통째로 꿰뚫으려는 진득한 살의.
유령상어가 즉시 그 거체를 휙 돌려 피해냈으나, 지느러미가 반쯤 뜯겨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어어어!!]“네가 원하는 건 승천자의 유해를 확인하기 위해 무간에 직접 들어가는 일이겠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몸을 비트는 상어의 형상에, 오리스가 이를 악물고 레녹에게 소리쳤다.
“위령탑을 거치지 않고 무간에 진입할 방법이 있다. 그걸 알려줄 테니 당장 함선 꺼내!!”
“…….”
근엄한 말투도 내려놓고 소리치는 오리스의 말에, 레녹이 고개를 저었다.
대심판관의 충동적인 언행이 못 미덥긴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감안할 만한 변수다.
무간을 엿보다가 만귀에게 발각당한 이상, 무한한 유령의 군세를 뚫고 무간으로 향하는 강행돌파는 어려운 일.
전력을 다한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구체적인 정황을 모르는 이상 손해를 볼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적어도 지금 도래의 시체가 무간에 보관된 이유와 그 목적을 이해하고 나서 다시 방향을 잡아야 할 터.
하지만 레녹이 혼자 탈출한다 하더라도, 위령탑과 진혼정의 추적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여기서는 차라리 대심판관의 손을 잠시 잡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레녹은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그쪽이 언급한 방법.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면 바로 들려줘야 할 거다.”
“알았다니까!!”
소년의 다급한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레녹이 가볍게 로브 안쪽으로 손을 뻗어 휘둘렀다.
로브 아래로 떨어진 그림자가 폭발적으로 확장되어 거대한 유령함선의 형상으로 변했다.
콰아아앙!!
넘실대는 강물 위로 선체가 떨어져 내리자, 그 여파로 물살이 좌우로 갈라지며 선체가 아래로 푹 꺼졌다.
“닻을 내리고 조타실로 들어가!!”
오리스가 영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유령상어가 발작하듯 뛰어올라 선체에 매달린 사슬을 깨물었다.
절그럭!!
함선 전면부에 매달린 사슬을 문 상어가 아가리를 물길 아래로 처박고 거세게 몸을 비튼 찰나.
위령탑 하층부를 가득 채운 유령함선이, 갈라진 물길을 따라 그대로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잠깐, 설마 탈출이라는 말이…….”
상어가 오니온의 함선을 가라앉히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레녹이 돛대를 움켜쥔 그 순간.
쿠과과과!!!
함선이 그대로 박살 난 탑의 하층부 아래로 처박히며, 물길 아래로 하강했다.
탑의 지하층계 헤드레인 강 아래로 함선 자체를 끌어당기는 상어의 형상.
미리 닻을 내려둔 함선의 돛대가 아슬아슬하게 물길 아래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려던 그 순간.
“어딜 도망치려는 게냐!!”
뚜두둑!!
희끄무레한 군령의 손아귀가 함선의 갑판을 움켜쥐고 선체가 가라앉는 것을 막아섰다.
유령상어의 행동을 보자마자 만귀 역시 군령을 변형시켜 조작. 함선이 물길 아래로 숨어버리는 것을 막아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진혼정의 법정에 올라설 때까지는 결코 이곳을 나설 수 없다!!”
“아까부터 자꾸 짜증 나는 방해만……!!”
“심판관, 함선을 인도하는 일에 집중해라.”
발끈한 심판관이 상어를 돌려세워 만귀를 떨쳐내기 위해 힘을 끌어올린 찰나.
“이쪽은 내가 해결하지.”
레녹이 소년에게 고갯짓하며 만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함선의 갑판 위에 올라타 있던 레녹이 품 안에서 파피루스 아우레우스를 활짝 펼쳐 들었다.
파아아앗!!
레녹의 의념이 파피루스 안에 흘러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황금빛의 두루마리 위로 펼쳐지는 환상.
무간 저편에 존재하는, 온몸이 새카맣게 물들어버린 승천자의 시체.
레녹이 무간 너머에서 보고 나온 풍경을 정확하게 투사해 띄워 올린 그 순간.
“……!!”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만귀의 표정이 느닷없이 다시 멍하게 변했다.
마치 그 자리에서 모든 명령어가 끊긴 기계처럼 어색하고 이질적인 모습.
그에 맞춰 함선을 붙잡고 있던 군령의 손아귀가 소멸하자, 오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함선을 물길 아래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좋아, 탈출한다!!”
“…….”
촤아아악!!
갑판 아래로 들어차는 강물을 지르밟으며 레녹이 멈춰버린 만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간 밖에서 정작 무간 안의 정보를 기억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만귀의 습성을 이용한 변수.
하지만 레녹은 저 증세가 단순히 건망증이나, 치매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저것은 만귀 자신이 스스로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며 발생하는 증상이 아니다.
위령탑에 철저하게 복속되어 문지기로 기능하는 존재이자, 오직 그렇게밖에 존재할 수 없는 영체이기에 벌어지는 현상.
그리고, 레녹이 알고 있는 영체들 중에서 그렇게 술자에게 의탁하여 존재하는 힘이라 한다면-
“화신술식.”
일그러진 만귀의 모습을 바라보는 레녹의 시선이 강하게 빛났다.
“역시 극에 달하면 그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거였군.”
꾸르르륵!!
상념이 끝나기도 전에, 오니온의 함선은 강물 아래로 완벽하게 그 모습이 사라진다.
“이런……!!!”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만귀가 일그러진 얼굴로 군령술식을 휘둘렀으나,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콰앙!!
“빌어먹을!!”
하지만 만귀는 섣불리 강물 아래로 들어가지 못한 채, 한참을 서성이며 범람하는 물살을 노려보았을 뿐.
“아, 안돼……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쉴 새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만귀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무너져내린 위령탑의 형상이 천천히 복구되기 시작한다.
쿠구구구!!
요르타 내에 새롭게 흘러들어온 군령들이 탑의 부속품이 되어 다시 무너진 층계와 천장을 만들고.
외벽과 내벽을 다시금 쌓아 올려 흔들리던 위령탑을 다시 안정시킨다.
[오오오…….]쉴 새 없이 울부짖던 군령들의 절규가 잦아들고, 다시금 탑에 찾아온 침묵.
“그래, 나는 무간을…… 지키는…….”
멍하니 위령탑이 복구되는 것을 바라보던 만귀의 몸이 그 자리에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버렸다.
마치 제 기능을 다해 멈춰버린 듯한 문지기의 영체가, 그 자리에서 천천히 흐릿하게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손발이 새하얀 가루처럼 부서져 소멸하듯, 한 줌의 연기로 변한 만귀의 영기가 위령탑 위로 솟구쳤다.
흐릿한 연기로 화한 영기가 순식간에 위령탑 최정상으로 향했다.
쿵!!
수백의 군령들이 지금도 실시간으로 고도를 높여가는 위령탑의 끝자락.
제대로 된 천장조차 존재하지 않고, 밤하늘의 별들만이 엿보이는 어두운 상공.
탑의 정상에는 거대한 옥좌와 그 옥좌 위에 눈을 감고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모습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흑발과, 그에 대비되는 새하얀 도포.
순백색의 도포 위로, 발아래서 솟구친 만귀의 영기가 흐르듯이 휘감겨 도포의 옷자락으로 변한다.
처음부터 남자의 일부였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합일.
“…….”
그제서야 옥좌위에 앉아 있던 남자가, 눈을 뜨고 탑 아래를 응시했다.
고오오오!!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탑의 정상.
군령의 폭풍과 구름에 가려 지상이 보이지도 않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 너머를 훤히 바라보듯 초점마저 선명했다.
“저주의 경계를 지키던 나의 화신체가 당했구나.”
한참을 그렇게 탑 아래편을 바라보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무간 밖에서 오랫동안 움직이게 놓아둔 탓에, 허락되지 않은 기억을 보여주고 말았다. 쉽게 가야 하는 일을 그르쳤군.”
[군주, 오리스 대심판관이 반역을 저질렀소.]화르르륵!!
옥좌를 중심으로 타오르는 아홉갈래 영기의 불꽃.
진혼정의 오래된 영령들이 어느새 탑 정상을 찾아와, 남자의 등 뒤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와 결코 마주하지는 않은 채, 절묘하게 비껴 서서 옥좌를 보필하는 위치.
영령들 중 누군가 영기의 불꽃을 태우며 말했다.
[복마전의 술사를 데리고 탑 지하층계로 도주했지. 오래지 않아 그 동선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오.]“다만 우리의 계획은 일정보다 조금 늦어지겠지.”
[…….]“시간이 많지 않구나, 위대한 영령들이여.”
침묵하는 영령들을 두고 남자가 옥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찍이 두 도시를 오가며 삿된 꿈을 꾸었으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망각만이 곁에 남았다…….”
“교단에서 대계를 눈치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고 있을 때가 아니겠지.”
많은 것을 잊어버렸지만,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도 있다.
잊혀지고, 또 잊어가는 와중에도…… 세계의 운명에 대해 농담처럼 이야기하던 오백로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카이세 바쥬르의 죽음. 폐쇄구역의 개방. 헤드로 군벌의 타락과 대운하 프로젝트까지.
발칸의 상원의장에게 전해 들었던 속세의 동향도 이제는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그 와중에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실낙원에 연락하거라.”
동시에 남자가 입고 있던 순백의 도포가, 한없이 새카만 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진와와 직접 대화해, 그녀의 언령을 나누어 받아야겠다.”
* * *
꾸르르륵!!
차가운 물길 아래로 가라앉은 오니온의 유령함선.
무거운 선체가 침잠하는 것과 함께 새하얀 물거품이 솟아오르고, 갈라진 물살이 거센 소음을 내뿜었다.
본래 수중항해를 고려하고 설계되지는 않았을 함선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수압에서 나름 잘 버티고 있다.
함선의 기능 중에서 그런 용도가 내장되어 있다기보단, 오니온의 함선이 그만큼 강력한 보존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낡은 창문 너머로 점차 어두워지는 수중의 풍경을 바라보던 레녹이, 천천히 반지를 빼어 들었다.
파앗!!
말없이 레녹의 눈앞에 흔들리듯 나타난 신녀의 영체.
“헤드레인 강의 규모와 수심이 생각 이상이군. 이대로면 이동에도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
레녹이 나직하게 말했다.
“심판관이 찾아오기 전까지 시간이 좀 있을 거다. 그전까지 그쪽에게 들은 이야기를 확인해야겠군.”
“교주와 도래. 그리고 그쪽이 이 시점에 요르타에 온 이유까지.”
신녀의 영체를 바라보는 레녹의 시선이, 가면 너머로 차갑게 빛났다.
처음 늪지대에서 세이나 나이드리의 시체를 마주한 뒤로 일어났던 그 모든 일에 대해.
막연한 의문만을 가지고 미뤄두었던 그녀의 목적이, 레녹과 일부나마 겹친다는 것을 인지한 시점에서.
모든 것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혼째로 소멸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모두 설명을 해줘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이제 와서 귀하에게 숨길 일 따위는 없겠지요.]차분하게 대꾸한 신녀가 시선을 들어 레녹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제가 이 군령도시에 찾아온 이유. 가장 중요한 본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