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797
약먹는 천재마법사 797화
배신과 광신(4)
“무간에 안치된 승천자의 육체가, 교주의 그릇이었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어두운 강물 아래로 한없이 깊게 가라앉는 함선을 바라보며 레녹이 말했다.
“하지만 도래가 교주 본인인 것과, 도래의 그릇을 교주가 사용한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
[…….]“어느 쪽이지?”
침묵하는 신녀를 보며 레녹이 재차 물었다.
“수백 년 전 존재하던 광전사, 도래는 교주 자신이었던 건가?”
교주가 도래의 육신을 사용했었으며, 과거 승천에 도전한 광전사로서 존재했다는 충격적인 진실.
레녹이 결국 교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공허한 인정.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신녀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도래가 교주 본인인 것과 도래의 육체를 교주가 빌려 쓴 것은 완전히 다른 경우의 이야기.
레녹은 그 사실을 이 시점에서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교리에 따르면, 그분께서는 강림하시는 것과 동시에 육체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존재하셨으며…….]신녀는 말없이 레녹을 바라보다, 양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교단의 교리를 자연스레 암송하는 신녀의 모습.
[자신의 그릇에도 미련을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무간에 존재하는 그릇은, 그분 자신이면서도 아니기도 한 것이지요.]“교단의 교리를 빌린 말장난에는 관심이 없다. 말했을 텐데.”
레녹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교주가 수백 년 전부터 그런 식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순간, 레녹의 목소리가 살짝 멎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설명 자체가 교주가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아서.
동요를 억누르고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은 레녹이 물었다.
“그렇게, 다른 존재로서 의태를 반복해 왔는지에 대해서다.”
[…….]“교주는, 도래 말고도 다른 그릇을 빌려오며 이 세계에 존재해 왔던 건가?”
질문을 던지는 순간, 잠시 흔들렸던 레녹의 목소리 때문일까.
신녀는 그런 레녹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대로 교단의 의식을 다루다 보면, 전대 신녀들의 기억을 돌아볼 때가 있지요.]“…….”
[시작은 아주 작은 계기였습니다. 그분께서 바라마지 않던 일은 아니었지요.]작게 호흡을 이어붙이듯,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음색으로 신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해내야만 하는 일이 있었기에…….]“…….”
[그분은 선택을 해왔던 겁니다…….]그 기억을 돌이켜보며, 언급하는 것 자체를 망설이는 듯한 신녀의 모습.
레녹은 순간 그를 보며,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교주는 누구일까?
그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첫 번째 세계에서 권사의 길을 선택하고,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며 무엇을 보고 돌아왔을까.
승천에 성공해 다음 세계로 넘어가며, 멸망한 세계를 돌아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오직 그 하나만이 기억하고 있을 시간의 흐름과 인과가 너무나도 두터워, 감히 그 감상을 헤아릴 수가 없다.
분명 시작은 레녹과 비슷했을지도 모르는 그의 여정이.
육신마저 내버리고 기억 속에서 연명하는 그의 존재가.
서로 다른 이름을 빌려 가며 인과를 남겨온 그의 행적이, 너무나 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겹쳐 보인다면 이상한 일일까.
“…….”
한참을 그렇게 침묵하던 레녹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쪽을 처음 만났을 때는 진와의 언령을 해주하기 위해 요르타로 향하고 있다고 말했었지.”
[…….]“그렇게 육신의 죽음을 감수하고, 영혼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레녹이 중얼거렸다.
“그때는 그 두 가지 말이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지만…….”
신녀 세이나 나이드리가 진와에게 죽음을 선고받은 뒤에도, 죽은 몸을 이끌고 요르타로 향하던 이유.
그건 그녀의 육신에 내려진 진와의 언령을 무간에서 해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무간 안에 보관된 교주의 오래된 그릇을 확인하기 위해서기도 했던 것이다.
신녀 세이나 나이드리 자신이 죽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누차 다짐했던 그 결의.
그것이 도래의 시체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레녹은 이제야 이해하고 있었다.
“도래의 유해가 무간에 안치된 건 오래전의 일인데도, 왜 이제 와서 교단에서 그것에 손을 대려 하는 거지?”
“너희들의 교주가, 이미 쓰고 버린 승천자의 유해를 통해 다시 움직여야 할 이유가 있는 거냐?”
신녀는 수십만 명의 신도가 존재하는 귀도 교단 내부에서도 가장 출중한 제사장의 역량을 지닌 존재.
그런 재능을 지닌 교단의 신녀가 교주의 그릇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면, 교주 본인의 의사가 개입된 결과가 아니겠는가.
만약 교주가 레녹에게 언급을 남긴 것이 이러한 미래를 예지하고 안배한 것이라면.
교주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할 거대한 계획이 예비되어 있는 것이라면 어떠할까.
무간에 숨겨진 비밀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무수한 추측이 꼬리를 물고 떠다니며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든다.
교단의 주인이 보내온 시간이 너무나 두텁고 난해하여, 그 비밀을 하나 읽어내는 것으로는 목적을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
하지만 신녀는 흐릿한 표정으로 레녹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분의 현신이 조금이라도 목전에 놓였다면, 이미 교단 전역이 성대한 축제를 벌이고 있었겠지요.]“그렇다면?”
[승천자의 그릇이 의미를 다한 뒤, 그분께서는 요르타와 거래하여 무간 너머에 그것을 안치해 두셨습니다.]신녀가 말했다.
말을 멈춘 신녀의 영체가 싸늘한 한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 그분께서 남기신 유해와의 의식 연결이 끊기기 시작했습니다.]“……유해와의 연결이 끊기기 시작했다고?”
[교황성에서는 이 사태에 대해 진혼정에서 그분의 그릇에 손을 댄 것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린 신녀의 얼굴이 한없이 차갑게 변했다.
[낡은 야행에 갇힌 영령들이, 감히 그분과의 약속을 어기고 성역을 침범한 것이지요.]“…….”
진혼정에서 무간 안에 보관된 승천자의 육신에 탐을 내고,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말인가.
그것은 분명 승천자의 육체를 고이 보존하거나, 성심껏 관리하겠다는 상식적인 이유는 아니겠지.
육신을 잃고 영락한 군령들이 주인을 잃은 그릇에 손을 대는 이유.
신녀는 그들의 목적이 한없이 불순하고,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욕망에 의거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의미를 다한 그릇이 시간의 흐름에 잊혀 사라지는 것은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남겨두신 유산으로 이어지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죠.]신녀가 말했다.
[하지만, 무간에 안치된 그것이 그분의 의도와 달리 악용되기 시작한다면…… 저는 결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대답 없는 레녹을 두고 신녀가 물었다.
[귀하. 부디 제가 맡은 바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세이나 나이드리의 말을 듣고서, 레녹은 비로소 신녀가 요르타에 찾아온 진정한 목적을 깨달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진와의 언령을 해제하거나, 저주의 흐름을 관측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죽어서도 그 몸을 이끌고, 오직 교단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책무를 다하고 있는가.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광신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레녹은 신녀가 얼마나 그 사명을 간절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이해했다.
“교단의 사명을 도와달라니, 웃기지도 않는 말이군.”
침묵하던 레녹이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난 교단의 조악한 광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믿음의 대상부터 비틀린 신앙이, 얼마나 망가져 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지.”
[…….]“뻔히 틀린 대답을 골라 기어들어 가는 추태를 내가 왜 지켜봐야 하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눈앞에서 교리를 부정당하면서도 차분한 신녀의 영체를 바라보며 레녹이 말했다.
“승천자의 육체를 두고 거래를 하는 셈 친다면, 손을 거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
[……거래, 말입니까?]“진혼정이 도래의 유해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도와주지. 대신, 무간에 안치된 유해의 소유권을 내게 양도해라.”
말이 없어진 신녀를 두고 레녹이 돌아서며 물었다.
“도래의 그릇을 진혼정에게 넘기지 않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그걸 내가 대신 관리해도 상관은 없을 텐데?”
[…….]“그쪽이 말한 대로, 유산으로서 다루어지는 것도 상관없다면 더욱 그렇겠지.”
무간에 안치된 도래의 유해를 확인한 순간부터, 레녹은 그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닌 유물인지 알고 있었다.
승천에 도전할 자격을 얻은 광전사의 육체. 교주 본인이 육신으로 삼아 수육했던 그릇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 그릇을 일견하고 조사하는 것만으로 엄청난 가능성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다.
란시아와의 수련을 통해 도래의 무예를 익힌 레녹은 그 잠재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수준인지 알고 있었다.
‘구중도래 팔경을 우로보로스와 섞어 사용하는 것만으로 물리법칙을 비트는 반격기가 됐었지.’
고민하는 신녀를 바라보며 레녹이 생각했다.
‘도래의 무예와 우로보로스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일체감. 그때는 우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구중도래라는 무술이 레녹에게 어째서 그렇게 잘 맞았는지.
구중도래 팔경의 위력이, 습득 시간과 원리에 비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주 오래전에 권사로서 존재하던 누군가 만들어낸 무예가 한참을 지나 레녹에게 이어진 것은 아니었는지.
승천자 도래의 본질을 알게 된 순간, 그때 느꼈던 의구심에 실재하는 대답을 붙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란시아에게는 단지 구중도래의 일부. 아주 간단한 동작 몇 가지를 배웠을 뿐이지만.
도래의 유해와 그 안에 담겨 있는 마력을 조사하면 훨씬 더 많은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을 터.
인체실험 따위를 할 생각은 없지만, 승천자의 육신을 조사해 그 구성성분을 연구하는 것으로도 엄청난 수확이 될 수 있다.
“말해두지만, 거래의 형식을 빌리는 건 요르타에서 그쪽의 공능을 빌리기 위해서다.”
레녹이 신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가면을 고쳐 썼다.
“거절한다 해도, 무간 안에 들어간다면 나는 말한 대로 움직일 테니 알아서 판단하도록.”
신녀의 공능을 빌린다면 일이 편해지기야 하겠지만, 그녀가 거래를 거부한다고 물러날 생각도 없다.
어차피 일을 직접 수행하는 것은 레녹의 몫인 만큼, 모든 일이 끝나고 승천자의 유해를 처리하는 것도 레녹에게 달린 일.
그 과정에서 빅터의 신분이 교단과 적대하게 된다 해도 이제 와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신녀 역시 그런 레녹의 말을 이해했는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혼정과 복마전.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배신자보다는 무법자의 손을 잡아야겠죠.]“…….”
[알겠습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다음의 일은 귀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그것은 분명 레녹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식의 시원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마치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을 거라는 투의 수긍이었을 뿐.
신녀 자신이 허락할 수 있는 권한이 그것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일까.
레녹이 신녀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던 그 순간, 유령함선이 크게 흔들리더니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쿠웅!!
“……도착했나?”
창문을 향해 시선을 돌린 레녹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비춰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길 아래 위치한 거대한 유적지의 형상.
오래전에 무너져 원형을 잃고, 이끼와 녹이 슬어버린 잔해들이 가득한 폐허.
함선을 끌고 나온 유령상어가 물고 있던 사슬을 내려놓고 주변을 맴돌며 헤엄치기 시작했다.
유적지 사방에는 형태를 짐작할 수 없는 무수한 배편이 사방을 오가고 있었다.
“위령탑 지하 8층계. 파벨론의 수중정원.”
레녹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이, 등 뒤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함선 안으로 들어온 심판관, 오리스가 이쪽을 바라보며 씩 웃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추적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다.”
“…….”
“요르타에서도 가장 오래된 유적지 중 하나로, 이곳을 거쳐 가는 수류는 요르타의 모든 선착장과 연결되어 있지.”
오리스가 제 손을 물고기처럼 휘저으며 물었다.
“왜 고대의 문명이 이런 험지에 자리를 잡았는지, 그것만으로 대충 이해가 가지 않나?”
“……요르타의 고고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레녹이 짜증스레 가면을 매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지하 1층계에 있어야 할 대심판관이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그것부터 먼저 듣지.”
“뭐,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된 건 유감이다. 사실 나도 이렇게 무식한 방법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오리스가 레녹을 향해 양해를 구하듯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네놈을 본 시점에서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인도자의 힘을 쥐고 요르타에 온 놈이라면, 무간에 숨겨진 비밀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심판관이 껄껄 웃으며 배를 두들겼다.
“그럼 내게도 기회가 한 번 더 생길 거라고 생각한 것뿐이다.”
“기회라고?”
“진혼정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면 알고 있을 텐데?”
소년이 느긋하게 말했다.
“만귀야행은 이미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야행에 참가한 이들은 모두 선택해야 했지.”
“…….”
“끝나지 않는 야행에 갇혀 영원히 탑에 귀속될지, 야행을 포기하고 배신자로 낙인찍혀 추방당할지…… 나와 오니온은 후자 쪽이었지.”
침묵하는 레녹을 보며 오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는 상황이 좀 나은 편이다. 선택을 할 기회라도 있었으니까. 대부분의 군령들은 여지조차 없이 탑의 부품이 되어버렸거든.”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군.”
레녹이 차갑게 대꾸했다.
“승천에 실패한 낙오자들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생색이라도 내고 싶나?”
“허…… 혓바닥이 참 예리한 놈이로군.”
서슴없이 던진 그 말이, 요르타의 치부를 너무 아프게 찌르고 있었던 것일까.
답지 않게 쓴웃음을 지은 심판관이, 함선 바깥에 보이는 유적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해한다, 인간아. 진혼정의 제안이 너를 이용하기 위한 함정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라도 화가 나겠지.”
“…….”
“하지만 그만큼 이 도시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너는 알아야 한다. 우리의 도전은 한참 전에 끝나 버렸고, 이제는 남은 의미를 붙잡고 침잠하고 있을 뿐…….”
시선을 돌리고 표정을 감춘 오리스가 말했다.
“천천히, 오랫동안 썩어들어 간 갈망이란 다들 그런 법이 아니겠느냐.”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군.”
레녹이 가면을 고쳐 쓰며 말했다.
“난 요르타의 성쇠와 몰락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진혼정의 영령들이 어떤 식으로 영락했든 관심도 없지.”
“…….”
“다만 그쪽이 날 도와준 이유와 무간에 들어갈 방법. 그 두 가지에 대해 확실하게 하고 싶을 뿐이다.”
침묵하는 심판관을 보며 레녹이 냉소했다.
“아니면, 추방당한 군령에게는 이것보다 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한 건가?”
목표가 명확해진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와 그 수단뿐.
레녹은 그것을 당장 눈앞에 서 있는 심판관을 통해 명확하게 할 수 있음을 알고 그를 따라 나왔다.
진혼정이든 심판관이든, 레녹에게 선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능력과 존재를 이용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면 보다 도움이 되는 쪽을 골랐을 뿐.
“……아니. 네 말이 맞다.”
오리스 역시 레녹의 말을 이해한 듯 쓰게 웃었다.
“우리가 멀쩡히 도망친 시점에서 진혼정 역시 본격적으로 움직이려 하겠지. 약속대로 무간에 진입할 다른 방법을 알려주마.”
“가장 우선시되야 하는 건, 위령탑을 거쳐 무간에 진입하느냐의 여부다.”
레녹이 그 말을 듣자마자 필요한 조건과 상황을 정리했다.
“만귀를 상대하며 느꼈지만, 탑 안에서 군령술사를 상대로는 손해만 볼 가능성이 너무 높더군.”
위령탑의 만귀들은 탑에 복속된 군령들을 자유자재로 떼어서 다뤄내고 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시작된 만귀야행에 참가한 영육을, 술식의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금술.
하지만 그렇기에 군령술식의 효율과 위력이 대폭 상승하는 것도 모자라, 필요한 군령들을 양껏 보충하며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레녹조차 순간 엘릭서를 사용해야 하나 고민해야 할 정도였으니,
정면에서 다시 위령탑의 경계를 뚫고 무간에 진입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되겠지.
“탑을 지키는 진혼정의 입장에서는 이쪽의 접근을 경계하고 밀어내기만 하면 충분하겠지. 목적과 상충되지 않는 수단이 필요하겠군.”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완전히 배제해도 상관이 없지.”
하지만 오리스는 그런 레녹의 말에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위령탑을 통해 무간에 진입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네게 불가능한 방법이었으니.”
“……탑을 통해 무간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무간은 물질계와 영계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경계선을, 개념적으로 압축해 형상화한 공간이다.”
오리스가 설명했다.
“본디 저주의 흐름을 관측하기 위해 설계된 성소가 탑의 층계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곳이 바로 물질계의 입구이기 때문이지.”
“물질계의 입구라…….”
위령탑에 존재하는 무간의 공간이, 물질계에 존재하는 입구라는 말인가.
레녹이 그 의미를 깨닫고 잠시 말을 멈춘 사이, 심판관이 물었다.
“물질계의 입구에서 무간으로 향하는 경계선을 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고민하는 레녹을 보며 오리스가 스스로 대답했다.
“한번 죽어야 해. 그것이 바로 위령탑의 입구를 통해 무간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
“그렇기에 네놈 같은 생자는 절대로 무간을 통과할 수 없다. 저주의 성소에 가고자 스스로를 죽인다는 건 본말전도나 다름없는 일이니.”
“그렇군…….”
유령견문록에 무간에 들어가는 방법 대신, 무간 너머를 엿보는 방법만이 적혀 있던 이유.
무간을 엿보는 방법조차,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어 그 흐름을 무간 너머에서 관측하는 방법이었던 이유.
애초에 살아 있는 몸으로 위령탑을 통해 무간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나.
레녹이 그 사실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심판관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스스로 죽는 대신 무간에 들어갈 방법은-”
“반대편의 출구를 통해 들어가면 되겠군. 그렇지?”
“…….”
입을 다문 오리스를 보며 레녹이 말했다.
“물질계와 영계의 경계선에 존재하는 공간이라면, 물질계의 입구에 대비되는 영계의 출구도 존재하겠지.”
“허…….”
“그곳에서는 반대로 생자만이 무간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대화를 듣던 신녀 역시 놀란 표정으로 레녹을 내려다본다.
기가 막힌 듯이 레녹을 응시하던 오리스가 혀를 내둘렀다.
“영민하다 못해 소름이 끼치는 놈이군. 고작 그 말만으로 정답을 스스로 찾아낸 것이냐?”
“…….”
“그 말이 맞다. 물질계와 영계 양쪽에 자리한 두 개의 문. 위령탑을 거치지 않고 통할 수 있는 영계의 출구.”
오리스가 말했다.
“나는 이것을 무간의 역문(逆門)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가 지금부터 향해야 할 최종적인 도달점이라 할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