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798
약먹는 천재마법사 798화
배신과 광신(5)
위령탑 지하 8층계. 파벨론의 수중정원.
심해 한복판에 위치한 거대한 유적지 폐허에 앉아, 레녹은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딸깍, 딸깍.
“연결이…… 안 되는군.”
다비의 도움을 받아 회선을 연결해도 휴대폰이 말을 듣지 않는다.
잠시 여유가 생긴 틈에 판데모니엄의 동향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지만, 역시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록은 레녹이 요르타로 진입하기 직전 하이레아가 보낸 메시지 하나뿐.
[빅터. 이번에 토커퍼즈에서 예정되어 있던 중간결산이 취소됐어. 박사를 비롯한 몇몇 인원이 불참의사를 보내왔거든.]“…….”
간단한 전언을 끝으로 끊겨 있는 하이레아의 메시지.
하지만 레녹은 이 간단해 보이는 메시지가, 조금 더 묘한 의미를 품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그네타가 전령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큰일이 생겼다는 의미겠군.’
고대종의 혼혈이자, 허수차원을 오가며 말을 전하는 복마전의 전령.
그녀가 제대로 전령 역할을 할 수 없을만큼 큰 사건이 있었거나, 일어날 예정이라는 말이겠지.
‘마지막으로 아그네타를 봤을 때가 분명…….’
질리언의 성채에서 작전을 끝낸 뒤, 아그네타는 광대의 부탁을 받아 대륙 밖으로 떠났었다.
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경고라면, 아마 그쪽과 관련이 있는 일이 아닐까.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다비를 품 안에 들여보낸 순간, 뒤에서 큰 소음이 울려 퍼졌다.
“아, 여기 있었군.”
쿵!!
거대한 석고 형태로 이루어진 문짝의 형상.
“이쪽 경치가 꽤 보기 좋지?”
휘하 군령들을 부려 유적지 언덕까지 옮겨놓은 심판관이 웃으며 물었다.
“물질계와 영계 양쪽에서 흐르는 강물은 생자와 망자의 눈물을 모아 흐르며…… 그렇기에 또 결코 마르지 않지.”
“…….”
“요컨대 이 강은 시간이 흐르며 깊어져 왔고, 또 세계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흐를 예정이라는 거다.”
침묵하는 레녹을 두고 심판관이 웃었다.
“그때까지 이 강물 아래 잠든 영들이 어디로 향할지는, 오직 바깥 바다의 신들만이 알고 있겠지.”
“신이라…….”
흘려듣기 어려운 말에 레녹은 말없이 오리스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외해의 종말들이 신이라고 생각하나?”
“어이쿠, 교단의 신녀가 있는 자리에서 신학에 대해 토론이라도 해보자고? 별로 대답하고 싶은 주제는 아닌데.”
[…….]어깨를 으쓱인 소년이 대꾸했다.
“하지만 외해의 존재에 대해 교단과 요르타가 한때나마 비슷한 견지를 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교황성과 진혼정은 승천자의 유해를 무간 너머에 보관해 둔 것이었으니.”
“…….”
“만귀야행을 통해 만들어진 영혼의 다리 역시, 바깥에 답이 있을 거라 믿은 희망의 발로였지.”
요르타의 만귀야행은 다음 세계로 건너가는 영혼의 다리를 만들기 위한 대의식.
그들은 그다음 세계라는 것이 외해 너머에 있을 거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히 레녹을 바라보던 오리스가 물었다.
“틀렸다고 생각하나?”
“실패한 시점에서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있나? 주제에 맞지 않은 저열한 수단이었을 뿐이지.”
레녹이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다만 외해에 대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
“요르타의 귀신들이, 외신들을 보며 경외심을 품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암흑의 바다를 헤엄치는 괴물들을 직접 보고 온 레녹으로서는, 그들을 신으로 여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외신의 본질과 존재감. 재단할 수 없는 힘을 두려워하고 경외시하는 것도 일견 당연하다.
평범한 인간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초인이라 해도 그 앞에서는 다르지 않겠지.
오히려 가장 오랫동안 존재해 온 도시이기에, 외려 외신들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품었을 수도 있을 터.
다만 그 과정에서 요르타와 교단이 한때마다 결탁했었다는 사실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정신 나간 놈이로고. 그들에 대해 알면서도, 그 사실에 아무런 감흥도 없는 거냐?”
오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외려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해했다. 하기야 그런 놈이니까 오니온의 유지를 이어받을 수 있었겠지.”
“……마드리치 오니온이 발칸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는 모양이군.”
“블랙컨슈머 프로젝트? 알다마다. 이 대륙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시도되었던 승천의식이 아니더냐.”
심판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문했다.
“우리와 마키나의 실패를 거울삼아, 상상도 하지 못할 결실을 손에 넣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
“그렇지. 카이세라는 자가 죽었을 당시, 요르타에서도 그 영혼을 찾으려 했던 적이 있었을 텐데…… 나도 관계자는 아니라 잘 모르겠구나.”
마음 같아서는 더 묻고 싶지만, 빅터의 신분으로 거대도시와 연관성을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도시의 권력구도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군.”
그렇기에 레녹은 외려 오리스를 향해 화제를 돌렸다.
“오니온의 존재를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것도 그렇고, 진혼정의 실패를 빌미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건가?”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 준 모양이군. 아까부터 계속 말이 날카로워.”
대번에 저의를 읽힌 것처럼 오리스가 쓰게 웃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는 진혼정을 끌어내리고, 야행이 실패한 뒤로 고착된 이 도시를 바꾸고자 하니까.”
“…….”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너를 돕는 것으로 인해 진혼정의 위상이 흔들린다면, 그 자리를 내가 가질 수도 있겠지.”
자신만만하게 말한 소년이 양손을 허리에 짚고 선언했다.
“칙칙한 비석에 갇힌 놈들보다는, 내가 좀 더 요르타의 정점에 어울리는 품위를 갖고 있지 않겠느냐?”
[…….]“……글쎄. 난 잘 모르겠군.”
대심판관이 강력한 군령인 것과는 별개로, 소년의 모습이 그리 기품 있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신녀의 영체 역시 레녹의 뒤에서 기가 막힌 듯이 고개를 저었을 뿐.
다만 소년이 탑의 지하에서 벗어나, 진혼정의 자리를 찬탈하고 싶다는 욕심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네놈, 요르타의 정세나 구도에 대해 생각보다 아는 것이 많군.”
레녹을 바라보는 오리스의 시선이 예리하게 빛났다.
“도시에 입성하자마자 진혼정을 만난 것도 그렇고, 역시 인도자의 영령에게 지식을 전달받은 것이냐?”
“아니, 그쪽이 날 가둬두었던 감옥에서 발견한 물건 때문이었지.”
레녹이 꺼내든 파피루스를 확인한 심판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유령견문록?”
“진혼정에 방문해 무간을 몰래 엿보는 방법을 알고 있더군.”
“호오, 견문록이라…….”
심판관의 얼굴에서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 역시 이 파피루스가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겠지.
“이 오래된 도시에 비범한 기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건 이것대로 풍미가 있구나…….”
“…….”
이 시점에 견문록의 존재를 오리스에게 내보이는 것은 예상치 못한 변수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리스의 질문에 맞춰 견문록을 꺼내든 이유.
그건 이 견문록이 어디까지나 요르타 안에서 가장 강력한 지식의 보고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목표가 확실하게 정해진 이 시점에서, 가지고 있는 수단을 가장 잘 활용할 방법을 궁리해 봐야 할 터.
야행의 참가자라면 이 견문록을 보다 잘 써먹을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레녹의 설명을 들은 오리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정도면 따로 준비가 필요하진 않겠군.”
“준비?”
“요르타의 풍습과 관례, 절차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여러 자료들을 준비했는데…….”
그렇게 말한 심판관이, 휘하 군령들을 시켜서 가지고 올라온 석고 문짝을 살짝 뒤집었다.
석고 안에 깨알만 한 글씨로 새겨져 있는 엄청난 양의 글귀와 기록들.
요르타 내부 관례와 절차를 새겨둔 기록판임을 깨달은 레녹이 질린 기색으로 물러섰다.
“내게 공부를 시키려 했다고? 팔자도 좋군. 그럴 시간이 어디 있지?”
“아니,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소년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령용의 요새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런 절차들을 암기해 두어야 하니까.”
“……유령용의 요새?”
“내 입으로 직접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오리스가 그렇게 말하며 견문록을 힐끗 바라보았다.
“예의 물건으로 확인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 말대로, 심판관이 돌려준 파피루스 위에 견문록의 글귀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유령용의 요새. 요르타 최북부에 위치한 천귀지구 상위층계 지휘구역.
=진혼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치외법권이자, 유령용 야오 쉰이 다스리는 철혈의 요새. 요르타에 존재하는 유일한 도시방위시설.
=무간의 역문이 위치한 고대의 성소.
“…….”
레녹은 그제서야 오리스가 유령용의 요새라는 곳을 언급했는지 깨달았다.
유령용 야오 쉰의 요새.
군령도시의 유일한 방위시설이자, 진혼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치외법권.
그리고 무간의 역문이 위치해 있는 고대의 성소를 가리키는 이름인가.
아마 역문으로 향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 같은 곳이겠지.
본의 아니게 역문의 존재를 교차 검증하는 사이, 심판관이 수중정원에 정박된 함선을 가리켰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할까?”
* * *
“유령용 야오 쉰은 본래 이 도시의 원주민이 아니다.”
고오오!!
강물 아래 속에 울려 퍼지는 유령상어의 신비로운 울음소리.
상어가 끄는 함선이 강 아래쪽을 유영하는 사이 오리스가 설명했다.
“그 이명을 들으면 알겠지만 애초에 인간조차 아니었던 존재지.”
“용이라는 생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헌에서 본 적이 있다.”
“그 말이 맞다. 야오 쉰은 쿤다라의 고대종. 그것도 진혈종이라 불리는 용족으로 태어나, 군령이 된 존재니까.”
“…….”
외겁도시 쿤다라.
고대종이 기거하며 멸망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신비의 도시.
야오 쉰은 그곳에서 진혈종이라 떠받들리는 용족이자, 군령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였던 것이다.
레녹의 지인 중에서 따지자면, 아리스의 스승이었던 클라리스 리첼렌 정도는 되어야 유사하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이 심드렁하게 이빨을 쑤시며 말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고대종에게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
“…….”
“그렇기에 고대종의 유령은 탄생하는 일이 없고, 존재하는 모든 군령들은 인간이나 아인종 출신뿐이지.”
“그럼 어째서 유령용은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거지?”
“그건 유령용이 익히고 있는 본신술식 때문인데-”
거기까지 말한 오리스가 말을 멈추고 고민에 잠겼다.
“흠, 이건 네가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게 좋겠군. 잘못하면 내 사견이 들어갈 수도 있는 문제다.”
“무슨 뜻이지?”
“유령용이 다루는 술식이, 이 도시에서도 찬반이 거세게 갈리는 종류라서 말이다.”
심판관이 시선을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 요새 안에 존재하는 규율 아래서는 더욱 그러하지.”
쏴아아아!!
그 순간, 함선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더니, 수면 위로 그 모습을 튕기듯이 솟구쳤다.
강이라고 불린다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광활하고 한적한 수면 위.
수평선 저 끝에, 은은한 회백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요새가 보이고 있었다.
“야오 쉰은 굉장히 엄격한 성정이라 누구와도 가까이하지 않았지. 나 역시 왕래가 잦지 않아,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아.”
“…….”
“무간의 역문이 이곳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도 추방당한 직후에야 알게 된 비사였을 뿐…… 결국 진혼정은 모두에게 숨기고 몰래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던 것이겠지.”
심판관이 그렇게 자조하며 손을 휘저었다.
“나는 지금부터 진혼정과 담판을 지으러 갈 생각이다. 네놈이 견문록이라는 기물을 가지고 있는 덕분에, 내게도 시간이 좀 생겼거든.”
“……혼자 진혼정을 상대하며 시간을 끌겠다?”
소년은 그런 레녹의 반응을 보며 씩 웃었다.
“야행을 포기하고 추방당한 신세지만, 나 역시 탑의 일부. 쉽게 소멸시키려 들지는 않겠지.”
레녹이 유령용의 요새에서 무간의 역문을 찾는 사이, 심판관이 진혼정을 상대하며 시간을 끌겠다는 말인가.
그건 진혼정이 모든 역량을 집중하면, 유령용의 요새에서조차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
“요새 안에서 무간의 역문을 찾아라. 야오 쉰의 협력 여부는 네 판단에 맡기지.”
“당연한 말을 길게도 늘여서 하는군. 처음부터 그리할 생각이었다.”
레녹은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갑판에 서서 요새까지 거리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오리스 본인이 직접 나서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무간의 역문이라는 정보를 제공해 준 것만으로 충분하다.
승천자 도래의 유해. 무간 안에 존재하는 교주의 오래된 그릇.
그 존재를 확인하고, 지식의 가치를 확신하는 이상 상황이 어떻든 움직여야 했으니까.
단순히 교주 하나, 교단 하나만이 엮여 있는 문제가 아니다.
거의 틀림없이, 에단 바쥬르도 무간 너머에서 도래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왔을 터.
그렇다면 에단이 손에 넣은 ‘부활의 술’ 역시, 승천자의 유해와 관련이 있는 힘이 아니겠는가.
“…….”
레녹이 요르타에서 보고 들은 기기묘묘한 비밀 모두가, 저 무간 안에 존재하는 유해와 엮여 있다.
틀림없이 카이세 바쥬르가 남겨놓은 프로젝트의 흔적 역시, 마찬가지겠지.
알카이드가 누구인지. 어떤 자격을 손에 넣은 존재인지를 짐작하고 있는 이상 망설이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파앗!!
레녹의 신형이 강물 위로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유령함선이 빠르게 축소되어 로브 안쪽으로 사라진다.
조타실에 드러누운 소년의 영체가 강제로 튕겨져 강물 아래로 첨벙 가라앉았다.
“빌어먹을, 미리 말 좀 해주면 덧나나?!”
투덜대며 강물 아래로 사라지는 오리스와 유령상어를 두고, 레녹이 손을 아래로 뻗었다.
쩌저적!!
손이 닿은 물길 일부가 차갑게 얼어붙으며, 강 위를 미끄러지는 얇은 보드로 변했다.
마력사로 그것을 조작한 레녹이 곧바로 요새가 위치한 부둣가를 향해 이동했다.
쏴아아아!!!
파도가 부딪혀 갈라지는 요새의 방벽과 경계병의 존재를 확인한 레녹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요새 끄트머리를 빙 돌아 근처에 위치한 선착장으로 걸어 나온 레녹이 중얼거렸다.
“들어갈 방법을 찾아야겠군. 생각보다 경계가 삼엄해 보인다.”
[몰래 잠입할 생각은 없으시군요.]“무간의 역문을 찾기 위해서 유령용의 협력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벌써부터 야오 쉰의 규율을 어길 필요는 없지.”
레녹이 그렇게 대답하며 로브를 뒤집어쓰고 거리 사이로 걸음을 내디뎠다.
진혼정의 추적을 받는 입장에서 이러한 인상착의를 유지하면 틀림없이 알아보는 사람이 있겠지.
하지만 레녹은 그 낌새를 미리 알아볼 수 있다면, 그런 상황 자체를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견문록의 기록을 확인하면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그럴 생각이지만, 그것보다 유령용의 본신술식을 조사하는 것이 먼저다.”
레녹이 그렇게 대꾸하며 천천히 인파 밖으로 빠져나와 어깨를 주물렀다.
“오리스는 유령용의 술식이 요새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는 듯 말했지. 직접 판단하라 할 정도라면 틀림없을 거다.”
“뒤에서 쓸모없는 훈수만 두는 광신도의 조언만 할까?”
레녹이 그렇게 대꾸하며 행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만…… 거리 주변에서 길을 헤매는 사람이 많군. 최근 이 거리에 외부인이 많이 유입됐다는 증거다.”
[…….]“아마, 요새 근처에서 외부인이 참여할만한 행사나 의식이-”
피잉……!!
그 순간, 무언가가 레녹의 감각을 스치고 사라지는 느껴졌다.
레녹을 주시하는 수준을 넘어, 대놓고 알아차리라는 듯 죽일듯이 노려보는 강렬한 살의.
“…….”
싸늘해진 레녹의 반응을 직감한 신녀가 물었다.
[……귀하?]“아니, 별일은 아니다.”
레녹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생각보다 일찍 찾아와서 조금 놀랐을 뿐.”
콰직!!
시선이 이어지는 곳을 따라 걷다보니, 순식간에 번화가를 벗어나 한적한 거리 뒷골목으로 빠져나왔다.
환한 대낮에도 인적이 드물다 했더니, 평소에는 야시장으로 이용되는 거리인가.
쌓여 있던 박스가 널브러지고 온갖 과일들이 발아래로 흘러나왔다.
휘오오오!!
불어닥치는 싸늘한 바람 속에서, 야시장 뒤쪽의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야시장 한복판에 선 레녹을 둘러싸고, 거리 곳곳에 매달려 노려보는 수십마리 귀신들의 형상.
제각기 낡아빠진 망토를 덧두른 채, 길쭉하게 늘어진 곡도와 낫을 움켜쥔 군령부대.
어깨에 달린 빛이 바랜 견장만이, 그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고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반응이 지나치게 빠른걸.”
레녹이 그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진혼정에서 벌써 내 추살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길을 잃은 요르타의 죄인이 도망칠만한 곳은 많지 않지.”
거꾸로 매달려 레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창백한 피부의 남성이 대답했다.
“아직 이 도시에 남아 있다면, 필시 진혼정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향했으리라 생각했을 뿐.”
“…….”
“하지만 하고 많은 은신처와 성소들을 버려두고, 하필 이 요새를 골랐다는 것은…….”
무간의 역문에 관한 저의를 벌써 발각당한 건가.
레녹이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을 끌어올려, 마력사를 양손으로 잡아채려던 그 순간.
영귀의 입에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대뜸 튀어나왔다.
“네놈이 바로 유령용의 화신 술식을 전수받을 내정자이기 때문이겠지?”
“……화신 술식?”